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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발견되는 가장 오래된 화폐는 石貨이다. 그리고 정확 한 사용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화폐로는 기원전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明刀錢이 있다. 이 밖에도 중국과 교역을 통해 한반도로 유입된 五銖錢․王莽錢도 발굴되고 있다. 이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한반도 에 화폐가 유입되어 사용되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80) 이후 조 선시대를 거쳐 근대적인 화폐제도가 성립하기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동전, 鐵錢, 銀甁 그리고 종이돈이었던 저화 등 여러 종류의 화폐가 유통되었다. 교환이 증가하면서 화폐가 이를 매개하다보면 점차 더 욱 활발하게 유통되고, 교역량이 증가할수록 이를 감당하기 위해 좀 더 고액의 화폐가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볼 때 조선초기의 화폐는 원활하게 유통되지 못 하고 시장에서 퇴장해버렸다. 이에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시대 이전 에 유통되었던 화폐나 조선 초기의 저화, 동전에 대해 비록 유통에 실패하였지만 조선 후기에 상평통보가 유통되기 위한 기반을 닦은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81) 그런데 소재 가치가 거의 없고 액면가 가 높은 최고 수준의 통화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저화는 화폐의 발 전 단계상 가장 높은 수준의 통화로 여러 가지 경제적 여건이 성숙 되어야 유통이 가능한 통화이다. 그렇다면 화폐가 유통되기 위한 주

80) 원유한은 우리나라의 화폐유통의 역사를 다섯 단계로 구분하여 점차 발전하여 근대화 폐가 수용되는 것으로 정리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화폐유통의 근거가 되는 것은 생 산력발전에 이은 상품화폐경제 화폐의 활성화이다. 구체적인 구분은 화폐의 생성기(고 조선~10세기 말), 화폐유통시도기의 전반(10세기 말~14세기 말), 화폐유통시도기의 후반(14세기말~16세기 말), 화폐경제의 성장발전기(16세기 말~1860년대) 그리고 근대 화폐수용기로 나누었다.(원유한, 앞의 책, 19~23쪽)

81) 원유한, 앞의 책, 5~6쪽

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단계에서 최고 수준의 통화의 형태를 갖 추고 있었던 저화가 한정된 지역에서나마 사용이 된 것에 대해 어 떻게 평가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이에 대한 평가는 조선초기의 저화가 당시 경제상황에 맞지 않는 것이었지만 국가에서 주도하여 강제적으로 유통시키려 했고, 결국 유통에는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 었다. 그렇다면 국가에서는 왜 저화를 유통시키려고 했으며, 근대에 사용된 지폐와 외형상 같은 화폐가 유통된 현상을 어떻게 이해하여 야 할 것인지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 식을 기반으로 조선 초기 저화유통의 성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를 위해 먼저 조선 초기에 명목화폐였던 저화와 저화의 유통이 부 진할 때 대안으로 논의 되었던 동전이 실제 어떻게 유통되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저화를 제조해서 유통하려는 시도는 고려 恭愍王대에도 있었다. 宋과 元代에 유통되었던 지폐를 따라 楮貨를 제조했지만 실제 통용시키지는 못하였다.82) 그 후 조선시대에 들어 와 다시 저화를 유통시키려고 하였고 1401년(태종 1) 4월에 저화를 발행하는 司贍署를 새로 설치하여 저화유통을 준비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1월 본격적으로 저화를 발행하여 민간에 유통시키게 된다.  大典續錄에 나오는 저화의 외형은 楮注紙로 만들었고 길이가 1척 6촌, 폭은 1척 4촌의 직사각형이었다.83) 하지만 통화를 발행하는 단 계에서도 규격에 대한 논의가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화의 ‘厚薄’이 일정하게 유지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84) 발행되 었던 저화의 외양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길이 외에 저화에 인쇄된 내용 등 구체적인 모습은 짐작할 수가 없다. 저화의 규격에

82) 고려사 권79 志33 食貨2, 恭愍王 3년 3월.

83) 大典續錄 권2, 戶典 雜令

84) 태종실록 태종 12년 11월 28일 “且楮貨之紙, 各道分造以納, 故其厚薄不同, 揀擇之弊, 亦由此而生”

대한 언급은 이후 文宗대에 이르러서야 확인할 수 있는데 중국의 체제에 따라 판을 만들어 인쇄하고 이전에 사용되었던 저화와 같이 유통 시킬 것을 정하는 것으로 미루어 저화의 외형은 文宗 이전에 는 통일된 형태로 발행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85)

다음으로 저화를 시장에서 유통시키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가격문 제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저화는 소재가치가 떨어지는 종이 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소재가치에 따라 가치가 정해지지 못했고, 가 치를 부여하고 그 가치를 유지하며 유통시켜야 하는 명목화폐였다.

저화를 만들어 유통시키면서 최초로 정해졌던 저화의 가격은 저화 한 장당 五升布 1필(米 2斗)이었다.86) 하지만 저화의 가치는 조정에 서 정했던 가격 그대로 유지되지 못했다. 당장 저화를 발행한지 1년 도 지나지 않아 가치가 떨어지고 있었다. 1402년(태종 2) 6월에는 저화 1장으로 米 1두를 사지 못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87) 저화의 가격은 반이하로도 떨어지고 있었다. 1412년(태종 12)에는 민간에서 더 이상 저화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고,88) 이후 正五升 布의 가격이 鈔 5장까지 하락하기도 했다.89) 세종대에 다시 사용하 게 되었던 저화는 1418년(세종 1) 8월에는 米 2斗의 가치가 있었지 만 역시 가격이 점차 하락하여 1423년(세종 5)에 저화의 가격이 쌀 1升에 해당될 정도로 가치 하락을 거듭하고 있었다.90) 거듭된 가격

85) 문종실록 1년 2월 1일

86) 저화의 액면가를 표현하는 방식도 송대와 원대 그리고 명대에 발행된 지폐는 동전을 기준으로 가치를 표현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저화가 발행되어 유통되었다. 한 예로 元 의 中統元年 (1260)에 발행되었던 中統元寶交鈔가 동전 10文에서 2貫까지 10종류가 있 었다.(葉世唱,, 2006 元朝的貨幣理論 中國貨幣史理論, 廈門大學出版) 그런데 조선초 기의 경우 한 장당 가격을 쌀이나 포같은 현물로 표현되어 유통되었다. 이에 태종 15 년에 저화의 가치를 쌀로 표현할 경우 쌀의 가격 등락폭이 너무 커서 가치보장이 잘 이뤄지지 못한다는 불만을 표현하였다. 그에 대한 방책으로 柳思訥은 포필로 가격을 정할것을 요청하였고 佐副代言 卓愼은 덧붙여서 저화의 종류를 大鈔와 小鈔로 나눌 것 을 요청하기도 했다(태종실록 태종 15년 6월 11일).

87) 태종실록 태종 2년 9월 24일 88) 태종실록 태종 12년 6월 5일 89) 태종실록 태종 16년 8월 22일 90) 태종~세종대 저화의 가격 추이

하락에 정부에서도 계속해서 저화의 가격 하락을 그대로 방치하지 는 않았다. 국가에서는 가격하락을 방지하기 위해 창고에 쌓여 있는 쌀이나 포 등을 내어 방매하였고 이를 통해 저화의 公信力을 회복 하려고 하였다. 국가가 현물과 저화를 교환해 준다는 보증을 통한 국가의 유통진흥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91) 즉, 저화는 종이 자체 가 갖는 소재가치가 액면가에 훨씬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전국적으 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국가의 간섭을 전제로 한 통화였다.

하지만 통상적으로 저화와 같은 지폐가 국가의 의도와 간섭에 따라 유통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北宋대에 사용되었던 지폐 交子는 먼 저 민간에서 사용하던 것을 官에서 채용한 방식으로 四川지역의 16 家 점포에서 철전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交子鋪를 만들고 일종의 약속어음이었던 交子를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 것이었다.92) 이에 비 해 조선초기의 저화는 유통범위와 수량 등 저화를 유통시키기 위한 제반 조건이 자유롭게 형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의도에 따라 만 들어 진 것이었다. 즉, 지폐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위해서는 한정 된 지역에서 소규모로 유통되는 경우와 달리 강력한 신용이 필요하 였고 전근대의 경우 국가의 역할은 강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조선 초기에 저화를 발행할 때에도 다수가 필요성 을 공감하고 저화유통을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다. 저화를 사용하자 는 쪽도 있었지만 당시 시중에서 유통되고 있었던 布貨를 그대로 유통시키자는 의견 등이 계속해서 대두하고 있었다.93) 실제 가치를

단위 가격 전거

저화 1장 쌀 2斗 태종실록 권3, 2년 1월 임진 저화 1장 쌀 1斗 이하 태종실록 권4, 2년 9월 갑진 저화 1장 쌀 3升 세종실록 권5 1년 8월 갑술 저화 1장 쌀 2升 세종실록 권11, 3년 4월 무술 저화 3장 쌀 1升 세종실록 권21, 5년 9월 갑오 91) 태종실록 태종 10년 10월 29일

92) 葉世唱, 2006, 北宋的貨幣理論 中國貨幣史理論, 廈門大學出版.

93) 태종실록 태종 1년 4월 19일

가지고 있는 布나 銅으로 만들어져서 어느 정도 자체가치가 있는 銅錢을 통해 자연스러운 통화유통을 유도하기 위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저화자체로는 원활한 유통이 힘들다는 우려를 뒤로하고, 저화를 유일한 화폐로 지정하였고 다른 통화나 현 물의 교환을 엄하게 금지시켰다. 이러한 금지책을 바탕으로 저화를 유일한 통화로 시중에 유통시키려는 조정의 의도와는 달리 민간에 서 저화는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원인으로 저화의 양을 충분하게 공급하지 못한 운영상의 문제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백성들이 저화를 사용하지 않아 시장에서 저화의 구매가치가 점점 하락하는 것이었다.94) 화폐의 가치가 일정해야 유통이 되는 것인데 사실상 저화의 가치가 액면가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조정에서는 저화의 가치를 시장의 원리에 맡기지 못하고 강제로 저화의 가치를 정하거나, 관리의 월급으로 저화를 지급하는 등 저화를 유통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저화를 유통시키기 위한 조정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기 위해 민간에서 회수한 포화를 세 쪽으로 끊어 더 이상 유통되지 못하도록 파기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95) 한시적 으로 저화를 쌀과 포로 교환할 수 있도록 교환가를 공포하기도 했 지만 궁극적으로는 한성과 지방에서 五升布의 유통을 금지시키고 이를 어기는 자는 가산을 몰수하고 有職者는 직위를 박탈하는 등 강력한 유통책으로 선회하였다.96) 그러나 저화는 조정의 강제에도 불구하고 한정된 영역에서만 유통이 되고 있었다. 실제 민간에서는 저화보다 실질적으로 가치가 있고 아직까지 호환성이 높았던 포나 쌀을 주로 사용하였다. 사용의 빈도수가 떨어지는 만큼 저화의 화폐 적 가치는 그에 비례해서 내려갈 수밖에 없었고, 조정에서는 현실적 으로 쌀이나 布의 유통을 부분적으로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97) 결국

94) 태종실록 태종 2년 4월 19일 95) 태종실록 태종 2년 6월 10일 96) 태종실록 태종 2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