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8년 이후, 常平通寶의 유통이 법제화되고 유통이 확대되면서 일상생활뿐만 아니라 고액의 토지거래, 군포와 전세 등의 일부가 동 전으로 수납되는 등 동전 유통은 특정한 부분으로 한정되지 않고 확대되었다. 상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지역에서도 물건의 시세를 동 전으로 표시하는 등 동전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유통수단으로 광 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었다.1)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유입되는 倭銅의 양이 줄어들면서 주전량이 감소했고, 지역과 관서간 유통도 원활하 게 나타나지 않으면서 백성들은 ‘錢荒’을 겪게 되었다. 이에 18세기 초반에 동전은 이득 보다는 폐단이 많다는 이유로 폐기해야 한다는
‘廢錢論’이 民과 官에서 등장하고 있다. 민간에서 일어난 폐전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학자로 星湖 李翼(1681~1763)을 들 수 있는데 이 익은 지금의 安山지역에서 당시의 세태에 대해 날카로운 시각을 그 의 저서에 많이 남기고 있다. 이에 본 절에서는 당대 동전에 대한 민간의 인식을 星湖 李翼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廢錢論이 등장하 게 된 배경에 대해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이익의 화폐관을 한마디로 집약하자면 ‘폐전론’으로 줄일 수 있다.
이익이 한 때는 고액환 유통안도 주장했는데 이 방안도 결국은 동 전을 폐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 결론적으로는 동전을 폐지하고 현물 을 사용할 것을 주장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폐단이 있다고 해서 동
1) 咫聞日記(古4254-20 )坤, 壬辰(1713) 2월 24일, 癸巳(1713) 4월 25일
전의 존재 자체를 원천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전의 편리한 기능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아래의 예문은 동전의 기능에 대한 성호의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다.
천하는 넓고 생산되는 재물은 각각 다르니 그 형세가 유통하기 어렵습 니다. 이러한 이유로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킨 것입니다.2)
성호 이익은 동전이 휴대하기가 편리하고 또 천하는 매우 넓기 때문에 동전을 통해 원거리 교환도 편리하게 매개할 수 있다고 동 전 자체의 편리성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원거리 거래 를 매개할 필요가 없으므로 동전이 사용될 여지는 적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 조선은 중국과 달리 지역이 협소하고 해로 및 수로교통이 편리하여 재화의 운반이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동전을 교환하기 보다는 직접 현물을 이동해도 큰 장애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3) 따라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동전은 크게 필요치 않았고 동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도적과 탐욕 많은 吏 胥輩 그리고 掊克者들로 간주하였다.4) 동전은 교환매개라는 순기능 보다는 실제 현실에서는 술에 취해 술값을 지불하는데 사용되고 사 치하는데 허비하여 역기능만 가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 다.
동전이 유통되면서 백성이 더욱 곤궁해졌다. 내가 장시를 돌아보니 마 을마다 사람들이 동전꿰미를 차고 나갔다가 술에 취해 서로 붙잡고 돌아 온다. 이로써 재화의 허비함이 지극히 심하다. 동전이 있는 자는 반드시 원근지방에서 물건을 사오고 동서에서 마음껏 받들되 오직 사치스럽지 2) 藿憂錄, 「錢論」 “天下之廣 而産財各異 其勢不能不轉移流通 此錢所以作”
3) 藿憂錄, 「錢論」
4)星湖塞說 人事門, 「米賤傷農」
못할까 두려워 하다가 마침내 재산을 탕진하게 된다. 이를 미루어 본다하 더라도 동전은 백가지가 해롭고 한 가지도 이로운 것이 없다.5)
위의 예문처럼 이익은 동전이 순기능 보다는 편리한 휴대성 때문 에 나타난 폐단을 극명하게 드러내었고 이러한 인식은 동전을 폐기 하여 폐단을 없애자는 폐전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익이 생각한 폐 전의 방법은 동전의 ‘輕便’기능을 없애 사용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동전은 저절로 유통에서 퇴장할 것으로 보 고 있다.6) 하지만 성호 이익은 다양한 폐단이 있으니 동전을 한시라 도 빨리 폐지하자는 주장은 하지 않았다. 동전의 사용을 갑자기 금 지하면 서울과 지방의 각 관서와 부호들의 집에 퇴장되어 있는 다 량의 동전이 무용화되고 그 타격과 파문이 클 것이기 때문에 일정 한 기간을 두고 동전 사용을 서서히 금지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7) 또한 이익은 동전뿐 만 아니라 조선 초기에도 유통되었던 저화와 같은 지폐의 유통에도 반대하고 있다. 鄭介夫의 예8)를 들면서 원나 라의 寶鈔와 같은 지폐는 실질적인 가치가 없고 위조가 쉬운 명목 상 돈에 불과하니 동전보다 더욱 유통시키지 말아야 할 통화로 간 주하고 있다.9) 즉, 인위적으로 만든 화폐를 폐지하고 무겁고 옮기기 힘든 현물을 사용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의 폐전론은 좀 더 근본적으로는 상업전반에 대한 부 정적 견해로도 확장되어 있는데 구체적으로는 정기시장의 개시일수
5) 星湖塞說 萬物門, 「錢鈔會子」
6) 동전 50문을 합주하여 當六十錢을 만들어 유통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藿憂錄, 「錢 論」)
7)藿憂錄, 「錢論」
8) 鄭介夫는 中統鈔는 실제 동전으로 2퍼밀 밖에 교환해주지 못할 정도로 과대 발행되어 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정개부는 중통초의 유통에 반대하고 대신 동전의 유통에는 찬 성하고 있다. 지폐유통에는 반대하고 현물가치가 있는 동전의 유통에는 찬성한다는 측면 에서 이익의 전면적인 폐전론과 차이가 있다.(叶世昌, 中國貨幣理論史, 廈門大學出版, 2002)
9) 星湖塞說 萬物門, 「錢鈔會子」
를 줄이자는 논의에 이르기도 했다. 정기시장의 기능을 억제하면 상 업에 종사하기 위해 離農했던 농민이 다시 농사에 專心하게 되고 소비 사치성향 사기풍조 및 도적행위가 줄어들게 되는 동시에 궁극 적으로는 재부를 축적하는 방법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도적 의 존재도 궁극적으로는 동전 때문에 생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이익의 폐전론은 궁극적으로 민생을 안정시키는 한에서만 재화가 가치를 가질 수 있다는 의견과 의미가 맞닿는다고 볼 수 있 다.
무릇 땅에서 생산되어 서민에게 유익하게 되는 것을 財貨라고 한다. 재 화는 衣食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그 다음이 여러 가지 용도의 器物이나 藥物 따위 인데 이 외에는 소용되는 것이 없다.10)
위의 예문처럼 星湖 李翼은 상업을 통해 과도한 이익을 만들어 내는 행위에 대하여 부정적이었고, 같은 맥락에서 廢錢을 주장한 것 으로 보인다. 하지만 교역을 매개하는 동전을 ‘保民’하기 위해 폐기 한다는 것은 조선후기의 상공업발달과 화폐 사이의 관련성을 염두 에 두면 실현가능성이 낮은 것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당시에는 1678년 이후 상평통보가 유통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이 확산되었고 동전의 유통은 토지매매문기의 분석을 통해 1720년대에 는 적어도 동전이 토지거래에의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었다고 밝혀져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頤齋亂藁에서 확인 되는 것처럼 지방에서 도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할 경우 동전으로 숙박과 식사 대금을 지 불할 정도였다.11) 또한 충청도에서 능참봉으로 宣陵을 오갔던 金斗 璧이 남긴 기록12)을 통해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아닌 지방에서도
10) 藿憂錄, 「錢論」 “凡産於地 益於民曰財 財莫大於衣食 其次器用藥物之類 外此無所用之 也”
11) 정수환, 앞의 논문, 2009 12) 咫文日記(古4254-20)
동전이 유통매개체 혹은 가치표시수단으로 명확하게 기능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기반으로 화폐 주전론자들은 錢貨가 일상생활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재정 차원에 서도 錢貨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는 상황이 었고13) 이를 바탕으로 동전의 편리함을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 을 반영하여 동전의 유통을 더 확대시켜야 한다는 논의가 당시 주 류를 이루었는데 이와 대비되어 이익과 같은 폐전론자들의 의견은 더욱 근시안적인 안정책으로 비춰지곤 했다.
磻溪 柳馨遠(1622~1673)도 ‘錢貨’는 나라의 財用을 돕고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는 所以’14)라고 언급하며 화폐 통용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주장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유형원과 같 은 화폐관은 비슷한 시기 혹은 이후 시기의 다른 학자들에게도 어 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燕巖 朴趾源(1737~1805)이나 茶山 丁若 鏞(1762~1836)의 저작에서도 화폐문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되고 있 지만 근본적으로 화폐는 교역을 하는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15)이 란 인식을 고수하고 있다. 더구나 상기한 학자들은 상업에 대해서도 호의적인 생각을 표현하며 당시 변화하는 시세에 능동적으로 변화 를 포용하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실학자’로 인식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전체적인 틀 속에서도 성호 이익을 비롯한 폐전론자들의 논 의는 반봉건적이라는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합당한 변명을 찾 아내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표면적으로 보자면 성호 이익은 장시를 통한 교역에도 반대하며 교역의 수단이었던 동전유통에도 반대하여 상업이라는 자체에 반대 하고 안정적인 농업사회를 유지하는데 더 큰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13) 대표적으로 禹禎圭가 正祖연간에 주장한「錢貨變通之議」가 있다. (承政院日記 정조 12 년 6월 12일)
14) 磻溪隧錄 권8, 田制後錄攷說 下, 「本國錢貨說」
15) 燕巖集권2, ,「賀金右相履素書」, 別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