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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광업생산량 변화와 倭銅 수입

국내의 재정을 확대할 만한 상황이 지속되었고 그 해결책 중 하 나로 주전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선에서는 구리가 대량으로 생산되지 않았고 필요한 수요만큼 동전을 주조하기 위한 구리를 국 내 생산량으로는 확보할 수 없었다. 이에 인조 대에는 일본으로부터 그리고 효종 대에는 淸으로부터 동전 완제품을 구입하고 있었다. 하 지만 일본에서 은의 생산이 줄어드는 대신 구리의 생산이 점차 확

11) 송양섭, 2001,『조선후기 軍衙門 屯田의 경영형태연구』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박사학 위논문; 조영준, 2008,『19세기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서울대학교 경제학과 박사학위논문)

12)『승정원일기』숙종 26년 12월 13일 “宮庄折受之規, 自有定限, 其不可違法冒占也決矣。

曾在乙亥, 因大臣陳達, 自地部, 量給銀貨, 令該宮每[買]取庄土, 定式外勿許折受之事, 明有 成命, 頒示中外, 此實出於聖上爲民除弊之至意。聽聞所及, 孰不欣忭, 而竊聞乙亥以後, 折受 如前, 宮家占庄, 漸至濫觴, 該曹之給價, 因爲常例, 小民呼冤之端, 不可勝算, 而朝家變通之 意, 竟歸虛套, 揆以法理, 豈容如是 矧當民産匱竭, 天災疊見之時, 凡有不便於民者, 所當一 切除去, 以紓燃眉之憂, 此等違法撓民之事, 其可苟然因存, 而莫之禁乎 請乙亥定式後諸宮家 冒濫折受之處, 一體革罷, 以除生民一分之弊’”

대되면서 구리가 일본의 수출품에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고, 조선 은 일본의 구리를 수입하여 국내 수요를 충당시키려고 하였다. 일본 의 구리 생산량 증가는 조선에도 영향을 주었는데 지속적으로 나타 났던 주전론의 전제조건이었던 원료확보가 이전보다 수월해지는 것 을 의미했다. 주전확대에 대한 필요성과 일본과 외교 재개 그리고 일본 내에서의 은과 銅생산의 증가가 맞물리며 조선의 화폐정책에 는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물론 은 그리고 銅의 수입과 관련해 서 조선이 일방적으로 일본의 영향권아래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은의 순도를 높일 수 있는 제련 방법을 조선에서 개발하여 일본에 전해주었는데, 일본에 전래된 灰吹法은 조선의 기술자였던 김검동 등이 대마도에 전래시켜 준 방법이었다. 회취법의 도입으로 일본은 銀의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13) 특 히 일본의 銅鑛과 銀鑛은 별도로 분리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은과 동이 원석에 섞여 있어 이를 제련과정 에서 분리하였기 때문인데 은과 동을 분리하는 작업은 당시 일본의 기술수준에서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조선의 기술 전래가 없었다면 일본은 은생산에 있어서 많은 지장이 있었을 것이다.14)

연대 1년 평균 생산량

1500-1600 50톤/1년

1600-1640 150-190톤/1년 표 6) 일본의 은 생산량 추계

* 典據: 甘粕健, 1983『講座・日本技術の社会史』5, 日本評論社, 180쪽 내용 재구성

13)『연산군일기』연산군 9년 5월 18일 “良人金甘佛、掌隷院奴金儉同以鉛鐵錬銀以進曰 鉛 一斤, 錬得銀二錢。 鉛是我國所産, 銀可足用。 其錬造之法, 於水鐵鑪鍋內, 用猛灰作圈, 片 截鉛鐵塡其中, 因以破陶器, 四圍覆之, 熾炭上下以鑠之。 傳曰 其試之”

14) 일본의 은 생산량은 새로운 제련방법과 수요의 확산 때문에 생산량이 급증하고 있다.

1603년에는 한 해 동안 200톤을 생산하기도 했다.

조선과 대마도의 교역증가는 대마도의 지리조건에 힘입은 바도 컸다. 대마도는 쌀이나 면포 등의 생산량이 적어 조선과 무역에 큰 의지를 할 수밖에 없었다.15) 특히 쌀의 공급은 대마도의 생존과 관 련된 문제로 조선과 교역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기 도 했다. 그 밖에 公木이라고 하여 면포가 일본에서 생산되기까지 조선에 상당부분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마도와 조선의 무역관 계는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강제적으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마도와 무역관계 속에서 대마도가 에도의 통제아래에 있 었는지 혹은 독자적인 무역행위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는지에 대 해서는 아직 논란이 있지만16) 대마도와 무역을 통해 동이 조선에 들어오고 조선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동으로 할 수 없는 다양한 정 책들 특히 화폐정책을 펴나갈 수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조선의 재정정책은 일본과 교역을 통해 많은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임란이후 단절되었던 일본과 외교관계 를 己酉約條를 체결하면서 막부와 외교를 재개하고 대마도와 실질 적인 교역도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외교와 대외교역은 막부 의 통제 아래에 크게 네 곳에서 이뤄지고 있었다.17) 그 중 대마도는 조선과 외교와 교역을 담당하는 주요한 창구로 기능하고 있었다. 특 히 조선은 대마도와 교역을 통해 일본에서 생산되는 은과 동을 수 입할 수 있었고 일본도 대마도를 통해 식량과 면포 외에 唐貨를 수 입할 수 있었다. 1661년부터 1683년까지 淸은 明의 부활을 기치로

15) 김동철, 1993「17·18世紀 對日 公貿易에서의 公作米 문제」『향도부산』10

16) 정성일의 견해에 따르면 조선과 대마도 무역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반론은 조선후기를 통하여 일본이 조선과 무역할 때 대마도가 직접 조선과의 무역을 관장했고 막부는 관 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하지만 대마도와 조선의 매매과정에서 작성한 매매문기에 에도에 그 내역을 보고하는 背面 내역이 있어 정성일은 대마도의 자율성을 그 동안 관 대하게 평가한 것으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정성일, 2000, 『조선후기 대일무역』, 신 서원)

17) 나가사키(長崎)는 幕府로부터 직접 통제를 받았고, 부산은 쓰시마번, 유구는 사쓰마(薩 摩)를 통해서 그리고 아이누 족인 마쓰메(松前)에게만 통교를 허락했다.

내건 鄭成功의 영향으로 바다를 통한 무역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게 호의적인 무역환경이 조성되었고 조선은 조선에서 생산되는 물품과 더불어 唐貨를 중계하는 대가로 일본으로부터 다양한 물종을 수입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량으 로 수입한 구리 때문에 조선에서는 주전을 대규모로 진행할 수 있 었다. 대량 주전작업을 통해 조선은 상당한 양의 동전을 예산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 다양한 재정정책을 시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하기도 했다. 이미 조선은 초기부터 주전을 통해 국지적이나마 재정 적 효과를 꾀하고 있었던 만큼 대규모 동이 조선으로 유입되어 주 전이 가능해진다면 국가로서는 새로운 재정수단을 갖게 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누릴 수가 있다. 물론 무역환경의 변화는 비단 조선에 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네덜란드의 VOC는 다양한 무역제한 조치와 그리고 해상에서 사고를 당할 위험이 높은 상황임에도 불구 하고18) 일본과 무역량을 증가시켜 나갔다.

당시 조선에사 동을 채굴할 수 있는 기술은 지표면에 얕게 묻힌 광물만 채굴할 수 있는 기초적인 수준이었다. 더구나 매장량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 당시 기록에 생산량이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조 선 내 구리 산출량은 매우 적었다. 물론 조선에서도 동을 비롯한 광 물이 전혀 생산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19) 청동기시대 이후 동과 주석을 합금한 청동제품과 민간에서 식기, 무기 등을 제조했으므로

18)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이 해상에서 사고를 당할 확율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낮 아지고 있었다. 히라도에 있었던 네덜란드 상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를 기준으로 해상 난파율은 2~4%정도로 항해 초반과 달리 낮아지고 있었다.(지명숙, 2003『보물섬은 어 디에』,연세대학교출판부) 하지만 1715년 이후-貞德신령 이후-네덜란드 상선이 1년에 2척으로 제한되면서 매년 두 척의 배가 나가사키에 입항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실제 매 년 두 척의 배가 동시에 들어온 해는 많지 않다. 敗船率이 높지 않다면 두 척의 배가 매번 長崎에 입항해야만 했다. 하지만 長崎에 입항하는 선박은 2척 모두 기록된 경우는 반을 넘지 않고 있다. 즉 패선율이 알려진 것보다 기후와 다른 요인에 따라 크게 변동 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승정원일기』영조 7년 10월 10일 “採銅, 是自古通行之事, 而我國銅鐵, 無産出處, 地部 經用, 遠貿倭館矣。今此産銅之地, 適出於我國境內, 則當此鑄錢之日, 豈可慮有奸僞之弊, 而捨我國所産, 不爲之採用, 乃反費重價, 遠貿他國, 恐無是理矣”

이를 통해 어느 정도 銅이 한반도에서 생산되고 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산출양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인조 대 시행된 가장 큰 주전 사업에서도 倭貢으로 제공받은 3만근으로만 주전을 시행할 정도였다.20) 물론 동의 사용처는 주전에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 군사력 강화조치에 따라 五軍營의 설치와 군영의 砲 兵을 양성하면서 포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銅의 수요도 상당량 존재하였다.21) 하지만 銅鑛의 경우 銀鑛과 달리 훨씬 더 깊은 곳에 매장되어 있어 조금 더 넓고 깊게 채굴을 위한 갱도가 마련되어야 했다.22) 따라서 동광은 은광보다 채굴을 위한 비용도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갱도를 깊게 파고들어간다고 해서 생산량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었다. 英祖 대에 확인할 수 있는 조선의 銅생산 량은 세 곳에서 채굴하는 양이 하루에 30斤 정도였다. 실제 가능한 지 여부는 차치하고 이를 300일 정도 연속적으로 채굴한다고 가정 하더라도 한 해 동안 약 9,000근23)정도 밖에 생산하지 못한다. 시기

20)『仁祖實錄』인조 12년 2월 20일 “京圻諸邑, 聞往年收米之未收者, 以錢代捧, 已有來納 者, 以其近京, 而貿錢易也。 立賦民之制, 而不鑄於外方, 秖令京中之錢, 流布於外方, 則持 錢而往外方者, 必刁蹬其價, 而外方不勝其弊矣。 宜以一年倭貢三萬斤之銅, 分鑄於安東、

全州、公州等處, 比京中稍高其價, 許民和買。 又就應納米中, 若干石, 與錢價相直, 而以錢 收於民, 則民無加賦之弊, 而官家之米, 固自在也”

21)『승정원일기』영조 6년 12월 16일 “李匡輔, 以訓鍊都監言啓曰, 軍器中最緊要者, 莫過於 火砲, 而我國産銅之道絶無, 故軍門造置之數, 甚爲零星, 其在陰雨之備, 實爲慨然矣。臣於 待罪御營廳時, 使折衝權和經, 司正李世佐, 閑良李潤基·崔壽泰等, 備給略干物力, 以爲料理 鑄砲, 則權和經等, 多般經紀, 貿得倭銅錫鑞正鐵等物五千餘斤, 許多工匠累朔料布, 亦自措 販, 鑄得中銅砲五十門, 龍頭砲二門, 及所載車子五十二輛, 別具, 故臣頃日本局習陣時試放, 則中銅砲行丸二千餘步, 龍頭砲行丸三千餘步, 而車子亦便於運用, 可謂戰具之良器, 中銅砲 五十門, 則臣旣自御營廳始造, 故使之移上御廳, 龍頭砲二門, 乃是新創之制, 御覽次封進, 而權和經等四人, 盡心國事, 如是完役, 合有論賞激勸之道, 而恩賞重典, 不敢擅便, 令該曹, 稟處, 何如 傳曰, 允”

22)『승정원일기』영조 5년 12월 20일 “安邊銅店異於銀店之有弊矣, 且軍門火砲, 有益於國 家, 而每每求銅於倭館, 路遠難繼。小臣自軍門, 欲爲給料布, 鑄銅其弊, 似減於倭館之取來 矣。上曰, 銅店採出, 有弊於民矣, 故先朝有立馬吳山第一峯之句, 大臣之意, 何如 洪致中 曰, 銅物皆貿於倭館, 而馱來有弊, 我國所産之物, 豈可求之於他國乎 若自軍門, 募民給料 布, 則似無民弊, 許之似可矣。上曰, 掘坎, 豈非民弊乎 鵬翼曰, 聞郞廳言, 則專是銅山也, 三處掘之, 則一日所得, 一百三十斤云矣。致中曰, 各軍門皆爲之, 則必將用之不竭矣。鵬翼 曰, 守城, 無過於火砲也。上曰, 卽今錢貨有弊, 私鑄之弊, 誠不可不慮也。鵬翼曰, 鑄銅, 異於鑄銀, 其竈甚廣, 其役甚鉅, 此非奸細之徒, 盜鑄之物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