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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구리 생산이 17세기 중반이후 급증하면서 조선에서도 일 본으로부터 구리를 대규모로 수입하고 있었다. 1697년에는 일본에서 수입한 구리의 양이 최대치를 기록하였는데 조선과 무역을 담당하 고 있었던 대마도로부터 수입한 구리는 1,436,000근을 기록하였다.

하지만 일본에서 생산되는 구리의 양도 점차 줄어들었고 1698년부 터 대마도에서 조선으로 수출하는 구리의 양도 급격하게 감소하였 다. 1699년에는 조선에서 수입하는 구리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약 1,000근 정도의 구리가 대마도를 통해 수입될 뿐이 었다. 동전과 무기의 원료가 되는 구리수입이 줄어들자 가장 큰 타 격을 입었던 것은 주전사업이었다. 당시의 무기제조를 위해 다량의 구리가 필요하기도 했다. 양란 이후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있었던 화

포도 상당량의 구리가 필요한 부분이었지만 화포의 경우 매년 일정 량을 제조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구리의 수입량이 줄어들 었다고 해서 무기제조에 큰 타격이 가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鑄錢사업은 구리의 양이 부족할 때에는 일시적으로 주전을 줄이거 나 멈추기도 했지만 매년 일정량을 주전하는 것을 정식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구리의 수입량 감소는 큰 타격이었다. 따라 서 일본으로부터 구리 수입이 줄어들게 되자 주전사업은 멈출 수밖 에 없었고 주전량이 부족했던 만큼 매년 동전이 부족한 ‘錢荒’이 해 결되지 못하고 지속되었다. 錢荒은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낳고 있었는데 일단 백성들은 세금으로 동전을 일정 부분 강제적으로 납 부해야 했으므로 동전이 부족한 상황에서 동전을 구하기 위해 家産 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했다. 전체적인 동전의 양이 줄어 들면서 세납을 하던 시기에 백성들과 관 모두 동전을 유통시켜 손 해를 최소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關西에서도 동전 을 이익이 극대화되는 시기에 동전과 현물로 교대로 거두면서 백성 들에게 고충을 안기고 있었다. 근거 관의 입장에서도 주전재료의 부 족은 주전정책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재정정책의 변화를 가지고 와 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주전에 대한 외적인 상황이 변하면서 관에서도 동전을 주조하는 것만으로 주조한 동전 만큼 재정의 확장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었다.

동전을 유통하면서 백성들로부터 표면적으로 이득을 취할 수 없었 기 때문에 항상 동전의 현물 교환가격은 시장 가격보다 후하게 치 러주고 있었다. 특히 동전으로 세금을 부과하고 대신 현물로 작미하 는 방식 때문에 정부에서는 세금을 거두면 거둘수록 재정적자가 나 타나고 있었다. 이렇게 민과 관에서 모두 동전을 관을 상대로 사용 할 경우 모두 손해가 나타나면서 관에서도 동전에 대해 호의적인 인식이 유지되지 못했다. 이에 표면적으로는 錢荒이 확산되면서 조

정에서는 廢錢논의가 확산되기 시작했다. 관에서 는 재정문제도 포 함됨)백성들에게 동전 사용이 부담되었던 것은 동전이 공적용도로 사용되면서 일정부분 백성들에게 강제되기 시작했고 백성들은 부족 한 동전을 세납 시기에 반드시 구해야 하는 폐단이 있었기 때문이 다. 특히 이익을 꾀하는 富商들이나 모리배들에게는 동전을 축장하 여 시세차익을 노리는 것이 구조적으로 가능해지면서 동전에 대한 반동적인 인식이 민간에서부터 증가하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백성들 의 돈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는 假傳體 소설의 하나이다. 돈을 의인화 하여 당시 백성들이 돈에 대해 생각하는 일단면을 확인 할 수 있다.37)

저 常氏의 도는 어떠한가? 한 번 나가 행해지면 그 공은 천하의 선비들 이 그 도를 잊도록 하며 백성들은 그 본업을 잊게 한다.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는 자로 하여금 어진 인재를 고하지 않고 오직 常氏를 먼저 하게 하고 사대부들은 여럿이 모여 仁義禮樂의 說을 강론하지 않고 오직 常氏 에 대해서만 묻게 만들고, 혹 한 技藝를 부지런히 하여 이름을 세우고자 하는 자 또한 정신이 피폐하고 생각이 고갈되도록 오직 상시와 사귀기만 을 기필하게 하는 비록 성인이 사람을 교화함도 이 같이 넓지는 않다.38)

위의 인용문은 상평통보가 유통되던 당시 상평통보를 의인화하여

‘傳’의 형태로 서술한 ‘常氏宗族傳’인데 동전을 의인화한 ‘常氏’는 선 비들도 도를 잊게 할 정도로 이익을 꾀하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수 단으로 등장하고 있다. 민간의 화폐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동전은 부를 가져다주는 존재로 굳어지면서 동전을 단순히 가치를 표시해

37) 假傳體 소설의 전승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했다.(이홍식, 2004, 「沆瀣 洪吉周 의『常氏宗族傳』연구 -孔方傳類 假傳의 전통과 연계하여-」 『어문연구』32권 3호) 38) 洪吉周, 『峴首甲藁』 (박무영 역, 2006, 태학사) 「常氏宗族傳」 “彼常氏之道, 何如哉.

一出而行, 其功使天下爲士, 忘其道, 爲民者, 忘其業, 治天下國家, 不求賢材, 而唯常氏是先, 士大夫羣居, 不講仁義禮之說, 而唯常氏是問, 其或勤一藝而立名, 亦敝神竭慮, 唯求交常氏是 期, 雖聖人之化人, 未如是之薄也”

주고 유통을 매개하는 수단이 아닌 謀利의 수단이란 부정적인 인식 이 자리하게 되었다. 따라서 동전이 없어지면 윤리가 바로서고 農本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나타나게 된다.

동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폐전론으로 이어졌는데 英祖는 폐 전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당시 국가에서는 세금을 쌀과 목면 그리고 동전으로 거두고 있었는데 동전으로 거두는 비중이 점차 증 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원료수급문제를 비롯하여 주전이 충분히 이 뤄지지 않았고 일부 축장하는 사람들마저 생겨나면서 동전유통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점차 민간에서는 동전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 고 동전을 세금으로 납부하기 위해서는 시가보다 훨씬 많은 현물로 동전과 교환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영조는 동전유통의 폐단을 제거 하자는 표면적인 원칙을 세워놓고 ‘不罷不鑄’의 원칙을 내세우고 있 었기 때문에 민간에 동전은 점차 더 귀해질 수밖에 없었다.39) 영조 가 꾀했던 결과는 동전을 더 이상 만들지 않고 사용을 금지시킨다 면 동전대신 현물이 사용되면서 동전이 귀한 폐단은 사라질 것이라 고 보았다. 순목령 이전까지 국가에서는 세금의 일부를 동전으로 강 제하였던 만큼 백성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내는 일정한 시기에40) 동 전을 구하는 일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동전을 구하기 위해 백성들은 심한 경우 재산을 탕진하기도 했다. 쌀의 작황이 좋지 못 한 경우에는 정부에서 정한 가격보다 훨씬 값이 올라 동전 1냥의 값이 米10斗에 이르기도 했다.41) 백성 재산이 없어지고 지탱하지 못 하는 이유를 동전이 귀해지기 때문이라고 보고 차라리 大同稅와 軍 布 그리고 노비의 貢木을 모두 동전이 아닌 면포로 통일하여 거두

39) 『승정원일기』 영조 5년 1월 5일 “今則聖意不在加鑄, 而不鑄, 又不罷, 則亦必有使錢賤 之道, 然後民可堪矣。今富民雖有錢, 不得給債, 則當以錢易米穀而給債, 錢必賤矣”

40) 세금의 납부시기는 지역과 세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田稅의 경우 호서지방의 경우 3 월 30일이 기한이었고 호남지방은 4월 30일, 영남 지방은 5월 10일이었다. (『受敎輯 錄』 戶典 (한국역사연구회, 2001, 청년사)

41) 『비변사등록』 영조 4년 9월 19일

는 것이 당시 나타난 폐단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보았다. 이에 영조 는 돈을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 문제를 해결학 위해서는 동전을 더 제조해야 하는데 동전을 필요한 만큼 주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동전을 더 만드는 것보다 차라리 폐지하는 것이 더 민간의 불편을 해소해 줄 것으로 보았다. 특히 선혜청과 호조에는 전문이 적고 군문에 전문이 많이 축장되어 있다는 보고는 당시 동 전유통이 재정기관이었던 宣惠廳이나 戶曹가 아닌 군문에만 큰 이 득을 안겨주고 있던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42) 따라서 영조의 입 장에서는 동전 사용으로 오히려 왜곡 되었던 재정구조를 바로잡으 려는 시도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한 논의 끝에 나온 정책이 바 로 純木令이었다.

순목령은 위와 같은 상황에서 나타난 대책으로 세금을 동전이 아닌 순전히 면포로만 거두려는 법령이었다. 순목령은 영조의 결단 에 따라 영조 3년, 5년 10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시행되었다. 첫 번 째 순목령은 4개월, 두 번째 순목령은 약 1년, 세 번째는 1년 4개월 에 걸쳐 유지되었다. 세 번째 순목령이 가장 오래 유지되었지만 1년 을 채우지 못하고 순목령을 철회하고 있다. 첫번째 순목령은 영조 3 년 5월 11일에 실시되어 약 4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던 순목령은 9월 21일에 영조가 스스론 순목령을 거두면서 폐지되었다. 순목령을 실 시하는 것이 오히려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기도 했기 때문인데 목 화의 작황이 좋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백성들은 순목령으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당연도의 세금을 이미 동전으 로 받은 곳도 있었고 순목령을 너무 급박하게 시행하여 오히려 불 편함이 생기게 되니 5월에 실시한 순목령을 거두고 목화나 곡식의 작황이 결정되는 가을부터 순목령을 시행하는 것이 백성들을 위한 길이라는 의견이 나타나게 되었다.43) 이에 영조는 호조판서의 건의

42) 『비변사등록』 영조 3년 5월 11일 43) 『비변사등록』 영조 3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