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연회의 실무자
몽골인들은 연회를 중시했다. 王惲은 「大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
에서 “몽골제국[國朝]에서 大事는 征伐·蒐狩(봄·가을 사냥)·宴饗의 세 가지뿐 이다. 비록 戰略[廟謨]을 결의하고 國論을 결정하더라도 이 또한 술[樽]과 음 식[俎]을 실컷 먹는 데 달려 있으므로 음식[玉食]을 담당하고 연향·犒饋를 공 급하는 職掌이 前世보다 중시되었다.”1)고 적었다. 몽골 황실에서 음식은 카 안의 일상뿐만 아니라 연향,2) 나아가 국가 정무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 래서 중앙정부에 宴饗을 관할하는 기관이 설치되었다.
燕饗[燕享]은 중앙의 6部 가운데 禮部(정3품)가 관할했다.3) 그 실무기관은 宣徽院이었다. 宣徽院(정3품)은 카안에게 玉食으로 벼, 기장, 제사용 가축[牲 牢], 주류[酒醴], 채소, 과일 등 각종 식품을 제공하는 일을 담당했다. 동시에 그것은 宗戚·賓客에게 燕享을 베풀고 대접했으며 諸王의 宿衛·怯憐口 (
ger-in k’e’ü
: 家僮4))에게 糧食을 공급했다. 몽골 萬戶·千戶에서 납부해야 하는 差發(差役·부세), 官用 소·말·양의 抽分(징수), 가축의 牧養, 매년 지급1) 秋澗先生大全文集57 「碑」 大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 “國朝大事曰征伐, 曰蒐狩, 曰宴饗, 三者而已. 雖矢廟謨, 定國論, 亦在於樽俎饜飫之際, 故典司玉食, 供億燕犒職掌, 視 前世爲重.”; 全元文177 「王惲」11 大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 p.497.
2) 일상의 한 끼 “식사(meal)”와 “연향(feast)”은 빈도와 규모 등으로 나뉠 뿐 둘 사이의 경계 는 환상에 불과하다. 식사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것인 반면, 연향은 자주 보지 못하는 사람 들과 특별한 경우에 벌이는 것이다. 식사가 옹호적이고 친사회적인 취지를 지닌 반면, 연 향은 경쟁적이면서 심지어 반사회적 취지를 지녔다. 특히 연향은 그 안에서 신분의 서열·
차이·경쟁적 변화를 부각시킨다(Martin Jones, Feast: Why Humans Share Food (Oxford·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pp.149~150).
3) 元史85 「百官志」1 禮部, p.2136, “禮部, 尙書三員, 正三品; (중략) 掌天下禮樂·祭祀·朝會·
燕享·貢擧之政令. 凡儀制損益之文, 符印簡冊之信, 神人封諡之法, 忠孝貞義之褒, 送迎聘好 之節, 文學僧道之事, 婚姻繼續之辨, 音藝膳供之物, 悉以任之.”
4) 怯憐口(ger-in k’e’ü)는 家僮(sons of yurt)을 뜻하는 몽골어 ger-in köbegüd에서 유래했 다. ger-in köbegüd는 元代 匠人 혹은 황실·諸王 등의 從人으로 활동한 婢僕·私屬人戶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Chi’ch’iang Hsiao, The Military Establishment of the Yuan Dynasty (Cambridge·London: Harvard University, 1978), p.199의 note no.312; 元 史辭典(邱樹森 主編, 北京: 山東敎育出版社, 2001) “怯憐口”, p.512; 吏學指南([元]徐元 瑞 著, 楊訥 點校, 浙江古籍出版社, 1988) 「戶計」, p.32, “怯憐戶, 謂自家人也.”).
하는 우마용 芻草·粟菽, 羊·馬의 가격, 유실물(闌遺 bulārğūī/buralgi5))의 收受 등의 사무를 맡아 했다. 尙食局·尙藥局·尙醞局의 3개 局이 모두 宣徽 院에 배속되어 있었다.6) 황실 음식 主務 기관에서 황실 연회를 주관한 사실 이 주목된다.
宣徽院 산하 기관에는 光祿寺, 尙飮局, 尙醞局, 尙食局(후에 尙藥局 병합) 등 20개 관청이 있었다. 光祿寺(정3품)는 쌀[米]과 누룩[麴] 운송 관련 제반 사무를 담당했다. 그것은 尙飮局과 尙醞局, 沿路 酒坊을 관할하고 각 路에 씨앗을 배포하는 사무를 처리했다.7) 光祿寺는 술 생산·공급을 위해 원재료인 쌀의 파종과 운송을 비롯해 제1차 가공원료인 누룩의 운반, 중앙·지방의 술 생산시설을 제어했다. 光祿寺는 술의 원료 생산과 운송, 황실용 술의 생산과 공급을 총괄하는 중앙 주무관청이었다.
尙飮局은 大都와 上都에 모두 설치돼 있었다. 大都尙飮局(종6품)은 1263 년에 설립되었으며 大使와 副使(각 1員)가 모두 金符를 패용했다. 그곳에서 카안용 細酒(고급술)를 주조했다.8) 上都尙飮局(정5품)은 大都보다 높은 품급 으로 50년 늦게 皇慶 연간(1312-13)에 설치되었다. 그 업무와 운영방식은 동일했다.9) 大都尙醞局(종6품)은 諸王·百官用 酒類[酒醴]를 제조했다. 이는 1263년에 설치된 御酒庫를 1279년에 개편한 것이었다.10) 上都尙醞局(종5품)
5) 부랄기(buralgi)는 투르크어 bulargi(“발견된, 찾아진”)에서 유래했으며 “유실물”을 뜻했다 (Paul D. Buell & Eugene N. Anderson, A Soup for the Qan: Chinese Dietary Medicine of the Mongol Era As Seen in Hu Sihui's Yinshan Zhengyao (Leiden·Boston: Brill, 2010), pp.24~25의 각주 36).
6)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 p.2200, “宣徽院, 秩正三品. 掌供玉食. 凡稻粱牲牢酒醴蔬果庶 品之物, 燕享宗戚賓客之事, 及諸王宿衛·怯憐口糧食, 蒙古萬戶·千戶合納差發, 係官抽分, 牧 養孶畜, 歲支芻草粟菽, 羊馬價直, 收受闌遺等事, 與尙食·尙藥·尙醞三局, 皆隷焉.”
7)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光祿寺, p.2201, “光祿寺, 秩正三品. 掌起運米麴諸事, 領尙飮·
尙醞局, 沿路酒坊, 各路布種事.”
8)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尙飮局, p.2201, “大都尙飮局, 秩從六品. 中統四年始置.
設大使·副使各一員, 俱帶金符. 掌醞造上用細酒.”
9)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上都尙飮局, p.2201, “上都尙飮局, 秩正五品. 皇慶中始置. 提 點一員, 大使·副使各一員, 品秩同上.”
10)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尙醞局, p.2201, “大都尙醞局, 秩從六品. 掌醞造諸王百 官酒醴. 中統四年, 立御酒庫, 設金符宣差.” 酒槽坊 문 위에는 春申君·孟嘗君·平原君·信陵 君의 4公子를 여럿 그려놓았다. 붉은 칠(紅漆)을 한 闌干으로 酒槽를 보호하고 위에 정교 하고 섬세한 升斗(계량기)로 덮어 두었다. 升斗는 宮室 모양이었다. 양 측면 大壁에는 車 馬·騶從(시종)·傘仗을 그려놓았다. 그 중간에 漢 鍾離(도교 仙人)와 唐 呂洞賓(곧 도교 시 조)을 門額에 그려놓았다. 正門 앞에 山子(옛 良馬) 모양의 金字牌가 3層으로 서 있었으며 黃公罏라 불렸다. 여름철에는 큰 덩이의 얼음을 많이 실어와 크고 긴 石梘(돌 홈통) 안에 넣어두었다. 이 눈 녹은 물로 술을 빚을 경우 술통(槽) 안에 水泥가 많이 생겼다(析津志輯 佚 風俗, p.202, “酒槽坊, 門首多畫四公子: 春申君·孟嘗君·平原君·信陵君. 以紅漆闌干護
은 1292년에 처음 설치되었다.11) 1351년에 楊瑀(1285-1361)는 50여 년 전 인 至元·大德 연간에 진상한 蒲萄酒가 尚醞局에 여전히 보존돼 있다고 적었 다.12)
醴源倉은 大都·上都에 각기 1285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大都醴源倉(종6 품)은 香莎(향부자)·蘇門 등 술의 재료로 쓰이는 찹쌀(糯米)과 鄕貢麴藥을 수 령해 황상용 술[上醞]과 諸王·百官의 歲賜用으로 공급했다.13) 上都醴源倉(종 9품)은 大都로부터 쌀과 누룩을 수령한 후 카안의 車駕가 순행하며 행차한 곳으로 공급하는 술을 제조했다.14) 1276년에 설치된 尙珍署(종5품)는 濟寧 (현 산동 濟寧) 등지의 곡식을 받아 술 재료를 공급하는 기관이었다.15) 安豐 (현 안휘 壽縣)·懷遠(안휘성)等處稻田提領(종9품)은 稻田에서 파종을 담당하 면서 그 알곡을 보관했다가 醴源倉으로 납부했다.16) 尙舍寺(정4품)는 카안의 行在에서 帷幙·帳房을 진설하는 사무를 맡았으며 낙타를 기르고 아이락[愛 蘭]과 요구르트[乳酪]를 진헌했다.17) 諸物庫(종7품)는 1300년 이래 宣徽院의 물품 출납을 관장했다.18) 闌遺監(정4품)은 不闌奚(buralgi), 곧 유실 人口·頭 匹·諸物을 관리했다. 闌遺監은 1283년에 개설된 闌遺所가 그 5년 뒤에 개편 된 것이었다.19)
尙食局(종5품)은 御膳을 공급하고 기름[油]·밀가루[麵]·액상버터[酥 liquid
之, 上仍蓋巧細升斗, 若宮室之狀. 兩旁大壁, 並畫車馬·騶從·傘仗俱全. 又間畫漢鍾離·唐呂洞 賓爲門額. 正門前起立金字牌, 如山子樣, 三層, 云黃公罏. 夏月多載大塊冰, 入於大長石梘 中, 用此消冰之水醞酒, 槽中水泥尺深.”).
11)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上都尙醞局, p.2201, “上都尙醞局, 秩從五品. 至元二十九年 始置.”
12) 山居新語3([元]楊瑀 撰, 余大鈞 點校, 元明史料筆記叢刊(玉堂嘉話·山居新語), 北京: 中華 書局, 2006), p.219, “尚醞蒲萄酒, 有至元·大德間所進者尚存, 聞者疑之. 余觀西漢《大宛傳》, 富人藏蒲萄酒萬石, 數十年不敗, 自古有之矣.”; 陳高華, 「元代大都的飮食生活」, 陳高華文 集, 上海: 上海辭書出版社, 2005, p.328.
13)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醴源倉, p.2202, “大都醴源倉, 秩從六品. 掌受香莎蘇門 等酒材糯米, 鄕貢麴藥, 以供上醞及歲賜諸王百官者. 至元二十五年始置.”
14)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醴源倉, p.2202, “上都醴源倉, 秩從九品. 掌受大都轉輸 米麴, 幷醞造車駕臨幸次舍供給之酒. 至元二十五年始置.”
15)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尙珍署, p.2202, “尙珍署, 秩從五品. 掌收濟寧等處田土子粒, 以供酒材. 至元十三年始立.”
16)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安豐懷遠等處稻田提領所, p.2202, “安豐懷遠等處稻田提領所, 秩從九品. 掌稻田布種, 歲收子粒, 轉輸醴源倉. 定置提領二員.”
17)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尙舍寺, p.2202, “尙舍寺, 秩正四品. 掌行在帷幙帳房陳設之 事, 牧養駱駝, 供進愛蘭乳酪. 至元三十一年始置監.”
18)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諸物庫, p.2202, “諸物庫, 秩從七品. 掌出納. 大德四年置.”
19)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闌遺監, p.2202, “闌遺監, 秩正四品. 掌不闌奚人口·頭匹諸物.
至元二十年, 初立闌遺所, 秩九品. 二十五年, 改爲監, 正四品.”
butter]·꿀[蜜] 등의 諸物을 출납했다. 1265년 이래 提點이 각종 식자재[生 料]를 尙食局에 바쳤다. 1283년에 尙藥局을 尙食局으로 통합하고 별도로 生 料庫를 설치했다.20) 식자재 저장고인 生料庫는 兩都에 설치되었다. 大都生 料庫(종5품)는 1274년에 生料野物庫의 이름으로 설치돼 尙食局에 예속되었 다. 1283년에 生料庫로 개편되었다.21) 上都生料庫(종5품)는 弘州·大同虎賁·
司農司 등에서 생산되는 기름과 밀가루를 수령했다. 또 大都에서 諸物을 운 송해 內府(황실 창고)로 공급하는 한편, 宮人·宦者들에게 飮膳을 제공했다.22) 大都太倉·上都太倉(정6품)은 內府의 쌀과 콩, 酒材로 쓰이는 쌀과 누룩과 藥 物을 보관·지출했다.23) 大都柴炭局과 上都柴炭局(종6품)은 1275년 이래로 황실에 요리·난방용 柴炭을 관리, 공급했다.24) 1311년에 설립된 尙牧所(종5 품)는 太官의 羊을 관리했다.25) 太官은 주로 제사 관련 사무를 도맡았지 만26) 內膳의 임무도 담당했던 점에서27) 尙牧所는 황실용 羊을 목축, 공급했 다. 沙糖局(종5품)은 沙糖28)·蜂蜜을 끓여 만드는 일을 주관했고 지방에서 바
20)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尙食局, p.2203, “尙食局, 秩從五品. 掌供御膳, 及出納油麵酥 蜜諸物. 至元二年置提點, 領進納百色生料. 二十年, 省倂尙藥局爲尙食局, 別置生料庫.”
21)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生料庫, p.2203, “大都生料庫, 秩從五品. 至元十一年, 置 生料野物庫, 隷尙食局. 二十年, 別置庫, 擬內藏庫例, 置提點二員, 從五品.”
22)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上都生料庫, p.2203, “上都生料庫, 秩從五品. 掌受弘州·大同 虎賁·司農等歲辦油麵, 大都起運諸物, 供奉內府, 放支宮人宦者飮膳.”
23)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太倉·上都太倉, p.2203, “大都太倉·上都太倉, 秩正六品.
掌內府支持米豆, 及酒材米麴藥物. 至元五年初立, 設官三員, 俱受制國用使司箚付. 十二年, 改立提擧太倉, 設官三員, 隷宣徽.”
24)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大都·上都柴炭局, p.2203, “大都·上都柴炭局各一, 至元十二年 置, 秩從六品.”; 설배환(2013a), p.16.
25) 元史87 「百官志」3 宣徽院·尙牧所, p.2204, “尙牧所, 秩從五品. 至大四年始置.”; 元史
24 「仁宗本紀」1 至大四年十二月辛未, p.548, “十二月辛未, 增置經正監官爲八員. 置尙牧 所, 秩五品, 掌太官羊.”
26) 元史75 「祭祀志」4 宗廟下·攝行告謝儀, p.1873, “禮直官引監祭禮按視壇之上下, 退復位.
奉禮贊再拜. 禮直官承傳, 監祭禮以下皆再拜訖, 又贊各就位. 太官令率齋郎出詣饌殿, 俟于門 外.” 太官은 秦代 太官令·太官丞이 있었고 少府에 속했다. 兩漢에서 그것을 계승했다. 太 官은 황제의 膳食과 宴享 사무를 담당했다. 北魏의 太官은 百官의 음식을 관할했고 光祿 卿에 속했다. 北齊·隋·唐에서 이를 계승했다. 宋 이후 황제 御膳은 尙食局으로 귀속되었고 太官은 오로지 祭物만을 관장했다(漢語大詞典(전자판) “太官”).
27) 元史119 「列傳」6 玉昔帖木兒, p.2947, “玉昔帖木兒, (중략) 世祖聞其賢, 驛召赴闕, (중 략) 時重太官內膳之選, 特命領其事.”
28) 사탕은 매우 수익성 높은 상품이었다. 左丞 李朵儿只(Li Dorji)가 至元 연간에 處州路總管 이 되었다. 處州路(현 浙江 麗水市)에서 생산되는 사탕수수[荻蔗]는 매년 杭州砂糖局에 煎 熬用으로 공급되었다. 糖官은 모두 主鶻(Johūd: 유태인)과 回回(무슬림) 富商이었다. 그들 이 요구·강탈하는 것은 한결같지 않아 피해가 극심했다. 李 도르지는 어느 날 사람을 보내 杭州 果木鋪에서 砂糖 10斤을 사고 그 鋪單(영수증)을 받았다. 그 값을 계산해보니 官價에 비해 수십 배나 많았다. 그는 마침내 省에 呈을 올려 그것을 혁파했다(山居新語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