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쿠릴타이와 賦稅 체계

쿠릴타이는 개최 經費와 음식(가축·곡물 등), 사여품(지순宴服, 쿠릴타이 金·銀·鈔·金段 등) 등을 위해 많은 경비를 요구했다. 當代의 한 論者는 國家 의 재정지출의 8대 항목(宮禁·宴會·賞賜·俸祿·軍糧·工役·凶荒·芻秣)에 연회를 포함시키고 있다.426) 일례로 前述한 1310년에 上都에서 여름 朝會의 물자 공급을 위해 鈔 100만 錠―1307년 常賦歲鈔 400만 錠(【별첨】 [표 1])의 25%―이 쓰였다.427) 쿠릴타이에서 사여는 帝室·중앙관청 경비와 百官·軍人 의 급여와 함께 元代 歲出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으로 평가된다.428)

쿠릴타이의 각종 비용과 물품은 徵稅와 상거래429) 등을 통해 획득되었다.

賦稅는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었다. 쿠릴타이의 주요 물품 가운데 가축·銀·

직물은 쿱추르(

qūbchūr

科差), 곡물은 칼란(

qalan

稅糧), 金·銀·鈔는 탐가 (

tamgha

商稅·課程)를 통해 수취되었다.430) 쿱추르(

qūbchūr

科差)·칼란

425) Shane McCausland(2014), p.13.

426) 元代奏議集錄(上冊)(陳得芝 輯點, 杭州: 浙江古籍出版社, 1998) 「趙天麟」 樹八事以豐 天下之食貨‧薄差稅, p.362 “夫國家之用有八: 一曰宮禁之資, 二曰宴好之將, 三曰賞賜之頒, 四曰俸祿之給, 五曰軍旅之糧, 六曰工役之費, 七曰凶荒之用, 八曰芻秣之具.”

427) 元史23 「武宗本紀」2 至大三年二月丁卯條, p.523.

428) 奧山憲夫(2007), p.51.

429) 유목국가의 군주가 항상 교역을 중시한 사실은 이미 잘 究明되었다(林俊雄, 「遊牧民族の 王權―突厥·ウイグルを例に」, 岩波講座天皇と王權を考える3―生産と流通, 東京: 岩波書 店, 2002, pp.118~120). 몽골 황실의 상거래는 특히 中買寶貨―곧 몽골 황실·官府의 사치 품 교역―로 알려져 있다(四日市康博, 「元朝宮廷における交易と廷臣集団」, 早稻田大學大 學院文學硏究紀要45-4, 2000; 四日市康博(2002), pp.130~131; 김찬영, 「元代 中賣寶貨의 意味와 그 特性」, 중앙아시아연구12, 2007, pp.25~32).

(

qalan

稅糧)·탐가(

tamgha

商稅·課程)의 체계를 검토한다.

(1) 쿱추르( qūbchūr ): 科差

몽골 稅制는 칭기스칸 집권기부터 시작되었다.431) 그 원형은 제국 출현 이 전에 보였다. 케레이트 옹칸이 나이만에 쫓겨 카라 키타이(1124-1218)의 구 르 칸(Gür Qan: 곧 耶律直魯古 재위 1178-1211)에 투항했다. 옹칸은 그와 반목해 1198년에서 1201년 사이에 다시 몽골 구세우르 호수(Güse’ür na’ur)로 돌아왔다. 이때 테무진은 굶주리고 야윈 부친의 盟友(

anda

)432) 옹 칸을 위해 “

qubčiri

(科斂: 곧 세금)를 거두어(

qubči=ǰu

) 주었다.”433) 쿱추르 (

qubčiri

)는 한문 史料에서 科斂·差發·科差로 번역되었다.434) 쿱추르는 본래

430) 필자가 이해한 바, 몽골제국의 稅目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세목

qubchur 賦稅·差發 tamgha 課程·引

qubchur 差發·科差 qalan (sang) 稅糧 商稅·工

歲課 금은 外

鈔法 chāo

額外課 'awāriḍāt 32항목

qubchur 站ǰam 絲料 āğār-tamār 包銀 화북 강남

草地 草地등 화북(漢地) 강남

包銀 俸鈔 丁稅 地稅 秋稅 夏稅*

가축 süsi 二戶絲 五戶絲 江南戶鈔

기본 세율

태조 ? × × × × × × × × × × × ×

태종 1% (2%?) 0.7斤/戶 × × × 粟 2石 → 4石 × × 3.3% × × ×

헌종 1% 0.7斤/戶 × 6兩/戶 × 粟 4石 × × 3.3% × × ×

세조 1斤/戶 0.4斤/戶 2兩/戶 4兩/戶 1량/戶 粟 4石 3.3%

최종목적지 카안·빈민 역참 카안 諸王(投下) 諸王 카안 관원 카안·諸王·관원 카안

* 강남 夏稅는 稅糧으로 편성되어 있으나 실은 江東·浙西 이외 지역은 綿·絹으로 대체, 납부했으므로 絲料나 마찬가지였다.

** 세율은 주요 추세만 대략적으로 보인 것이다. 定宗(구육 카안) 시기 가축세는 10%로 일시 증가했다.

[註表] 몽골제국 카안울루스 세목

431) John Masson Smith, Jr., “Mongol and Nomadic Taxation,”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Vol.30(1970), p.83. 17세기 蒙文 연대기들 가운데 가장 이른 Altan tobči(黃金史)는 칭기스칸이 “五色(이른바 푸른 몽골, 붉은 중국, 검은 티벳[탕구트], 하 얀 솔롱고스[고려], 노란 사르타골[위구르]) 四夷(몽골의 지배를 받은 아시아 소국과 먼 나 라들)의 백성을 비롯하여 이 세상의 361개 종족과 720개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나라 백 성에게서 alba ɤubčiɤur(공납)를 받았다”고 적었다(역주 몽골황금사(저자 미상, 김장구 역주, 동북아역사재단, 2014), p.52).

432) anda는 맹세와 선물의 교환을 통해 맺어진 盟約 관계를 일컬으며 “盟友”로 번역된다.

안다(anda)를 擬似的 혈연관계를 뜻하는 義兄弟로 옮기는 것은 적확한 이해가 아니다(宇 野伸浩, 「モンゴル帝國時代の贈與と再分配」, 松原正毅·小長谷有紀·楊海英 編輯 ユーラシ ア草原からのメッセージ―遊牧硏究の最前線, 東京: 平凡社, 2015, p.141).

433)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151, 152, 177절, p.119, 120, 149; ≪元朝秘史≫モンゴル 語全單語·語尾索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218~221, 284~285.

434) 安部健夫, 「元時代の包銀制の考究」, 元代史の硏究, 東京: 創文社, 1972, pp.79~78; 岩 村忍(1968), pp.116~119. qubčiri(현대 몽골어 govchuur)―페르시아어 사료의 qūbchūr― 는 “거두어들이다”를 뜻하는 qubči-(ǰu)에서 나왔다. “差發”은 金史 食貨志·通檢推排條 의 “差定調發”―物力(재산)을 差定(선별)해서 調發(징발)한다―의 줄임말이었다(安部健夫 (1972), p.83).

유목적 가축세였다.435)

칭기스칸의 쿱추르 과세는 역참 설치와 함께 시행되었다. 그는 敵情의 보 고와 물자 운송을 진작시키고자 도시들의 길이와 폭에 맞게 站(

yām

. 몽골어

ǰam

)들을 설치했다. 역참의 人丁과 가축·음식·음료·기타 장비들은 萬戶의 관 리하에 戶口 數(

shomār-i bakhsh

436))를 기준으로 民(

ra’iyyat

)에 부과되었 다.437) 사신들은 鋪馬 보호의 의무를, 얌과 농민은 역참 운영의 책무를 지었 다. 농민의 부담은 쿱추르(

qūbchūr

)에 준거해 부과되었다.438) 쿱추르와 역 참이 구별되면서도 긴밀하게 연계된 사실은 黑韃事略에서도 확인된다.439)

칭기스칸은 1206년 즉위 후 子弟 분봉을 실시하는 한편, 시기 쿠투쿠에게 모든 백성을 몫(

qubi

)으로 나눈 것―소위 分民(

qubi irgen

)―과 斷事 (

ǰarqu

/

ǰarɤu

)를 처결한 것을 靑冊文書(

kökö debter bičik

)에 적어 책을 만 들도록 지시했다. 그는 그것을 자신과 상의해 흰 종이에 푸른 글씨(

kökö bičik

)로 쓰고 후손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바꾸지 말라고 명령했다.440) 靑冊 文書는 제국 초기 租稅簿이자 재판 기록이었다.441) 칭기스칸이 1204년 위구 르문자를 도입했으므로 그것이 위구르문자 몽골어로 쓰였을 가능성이 크다.

靑冊文書에 分民 數—소위 인구 조사442)—를 적었고 몽골 사회가 말의 징발 435) John Masson Smith, Jr.(1970), p.60, 70~76, 83; 松井太, 「モンゴル時代ウイグリスタ ン税役制度とその淵源―ウイグル文供出命令文書にみえるkäzigの解釋を通じて」, 東洋學報

79, 1998, p.413.

436) 페르시아어 bakhsh는 “分封”의 뜻으로 쓰일 수 있다(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405). 이 경우 shomār-i bakhsh는 戶口 數 외에 分民 數로도 해석될 수 있다.

437) Juvaini/Qazvini, pp.133~134; Juvaini/Boyle, p.33; 김호동, 「몽골支配期 西아시아의 驛站制와 가잔칸의 改革」, 역사문화연구35, 2010a, p.6.

438) Juvaini/Qazvini, pp.133~134, p.134; Juvaini/Boyle, p.34.

439) 黑韃事略(中華書局本), p.8, “其賦斂差發 (중략) 又有一項, 各出差發, 爲各地分蘸中之 需, 上下亦一體, 此乃草地差發也.”; 安部健夫(1972), pp.81~82; 岩村忍(1968), p.128.

440)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203절, pp.200~201;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尾索 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390~393; Igor de Rachewiltz,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p.135~136.

441) 田村實造, 中國征服王朝の硏究(中), 京都: 同朋舍, 1971, p.137. 몽골제국에서 靑冊文 書 등 戶口籍冊은 법령의 집행과 裁決을 담당하는 斷事官, 곧 자르구치(몽골어 ǰarɤuči, 페 르시아어 yarghūchī)에 의해 주로 작성·관리되었다(四日市康博, 「ジャルグチ考―モンゴル帝 國の重層的國家構造および分配システムとの關わりから」, 史學雜誌114(4), 2005, pp.1~5).

촉트(Chogt)는 戶口冊으로서 靑冊文書의 법적 구속력을 강조하며 그것이 ‘자삭’(ǰasaq/

yāsā)의 속성을 지녔다고 밝혔다. 또한 靑冊은 칭기스칸 시대에 제작된 후 후예 카안들이 새로운 호적을 계속 덧붙인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チョクト(朝克圖), 「靑冊(köke debter)

の性質に關する一考察」, 早稻田大學モンゴル硏究所紀要3, 2006(03), pp.4~8).

442) 인구조사는 사회적으로 재화(resources)를 제어하고 동원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몽골제 국에서 인구조사는 잠재적 재원으로서 제국 신민들로부터 이익을 뽑아내는 주요 수단이었 다(Denise Aigle(2008), p.69).

이나 계약에서 숫자를 새겼던 전통으로 볼 때443) 몽골 고유숫자가 靑冊文書 의 주요 표기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다. 靑冊文書와 몽골文·숫자는 역 참용 물자와 쿱추르의 과세 기준으로 戶口 數(

shomār-i bakhsh

)가 쓰이는 사회적·행정적 배경이라 하겠다.

우구데이는 쿱추르 세율을 확정하고 지역별 변화를 주었다. 그는 1229년 에 즉위 직후 모든 사람들이 각지 千戶로부터 카안의 국(湯

šülen

)에 쓰도록 해마다 [양 100마리] 무리(

sürüg

) 가운데 두 살 난 거세양(羯羊

irge

)을 1마 리씩 내는 한편, 100마리 양에서 두 살 난 양 1마리를 내서 궁핍한 자 (

üge’ün duta’un

)에게 주도록 했다. 그것은 카안의 명령이자 동시에 차가타 이·바투 등 우익 諸王, 옷치긴 노얀, 예구(Yegü) 등 좌익 諸王, 중앙의 딸 (공주)과 부마들, 만호·천호·백호·십호의 관인들(

noyat

)이 모두 찬성한 것이었 다. 카안은 특히 형 차가타이와 그것을 상의하고 그의 동의를 얻어 稅額을 확정했다. 새로운 稅制에 따라 징수된 羊은 카안의 음식과 빈민을 위한 몫이 있었다. 그것은 또 카안의 형제들과 수많은 병사와 친위대(

kešikten

)가 [모임 과 연회에] 모였을 때를 위한 것이었다.444)

몽골 쿱추르(賦斂·差發)는 말·양 등 民戶에서 보유한 가축의 多寡에 따라 징수되었다.445) 1234년에 몽골리아를 방문한 徐霆도 民戶에서 모두 差發의 명목으로 牛馬·車仗·人夫·羊肉·마유주(馬奶

airag

)를 납부했다고 적었다. 몽 골 군주는 草地를 皇后·太子·公主·親族에게 나눠주고 각기 差發을 내놓도록 했고 貴賤에 관계없이 누구도 면제받지 못했다.446) 빈민용 쿱추르는 양 100 마리당 1마리였으므로 세율이 1%였다. 군주용·모임용 쿱추르 稅率은 다소 모호하지만 어쩌면 1% 정도―최대 2%를 넘지 않는 범위―였을 것이다. 우 구데이는 1235년에도 가축들에 대한 쿱추르를 정하여 100마리에 1마리(1%) 씩 바치도록 재천명했다.447) 우구데이 카안의 가축세율(1%)은 몽골제국 등장

443) 설배환, 「몽골제국에서 詔令의 對民 전달―粉壁과 口頭 사례 분석」, 古文書硏究43, 2013b, pp.52~54. 현존 몽골 最古 호적(1791)은 위구르문자 몽골어 인명 아래 인구와 가 축이 몽골숫자로 기록되어 있다.

444)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279~280절, pp.298~300;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 尾索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602~605, 608~611; Igor de Rachewiltz,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p.214~216.

445) 黑韃事略(中華書局本), pp.7~8, “其賦斂差發, 數馬而乳, 宰羊而食, 皆視民戶畜牧之多 寡而征之, 猶漢法之上供也.”

446) 黑韃事略(中華書局本), p.8, “霆所過沙漠, 其地自韃主·僞后·太子·公主·親族而下, 各有疆 界, 其民戶皆出牛馬·車仗·人夫·羊肉·馬奶爲差發. 蓋韃人分草地各出差發, 貴賤無有一人得免.”

447)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87. 몽골 牧民과 달리, 말·소·양을 보유한 무슬림 상인 등 은 1233년에 암말·암소·암양 100마리당 1마리(1%) 혹은 10마리당 1마리(10%)를 官에 납 부했다. 우구데이 카안 시대에 가축세율은 차이가 컸다. 이후 가축세율은 구육 시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