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1) 쿠릴타이의 시공간과 그 改變

절, pp.157~158; Igor de Rachewiltz,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35, 38, 410, 417~418;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尾索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108~

109, 114~117, 304~305; Ш. Бира, etc.,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pp.184~185, 186~187, 223; 元朝秘史(上)(小澤重男 譯), p.122; 《華夷譯語》(甲種本)モンゴル語全單 語·語尾索引(栗林均 編) 「人物門」, pp.42~43). 쿠빌라이 시대 이후로 중앙의 百官集議나 지방 官府의 圓議 제도(通制條格校注7(方齡貴 校注, 北京: 中華書局, 2001) 「軍防」 禁治 擾害·至元二十九年三月初十日, “御史臺奏節該: (중략) 一· 每年放軍還家置備鞍馬軍需氣力, 其所差千戶百戶頭目中間放富差貧, 科歛錢物, 諸般搔擾, 以致軍戶生受. 令各翼圓議立法鈐 束, 不致生受.”; 秋澗先生大全文集81 「中堂事記」中 中統二年五月廿二日癸未, p.15b,

“其三曰, 圓議定時, 首領官先擬定其事, 自下而上, 相次剖决, 議定題押批判. 若事關利害, 情見不同者, 各具奏禀.”; 屈文軍(2000), pp.127~129)는 몽골의 쿠림(qurim 會·宴會)과 쿠 릴타이(quriltai 大會) 혹은 볼잘(bolǰal 約會)에서 발전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約會를 소송 혹은 범죄를 처결하기 위한 하나의 법적 절차(a legal procedure)로 단정하는 견해 (Wonhee Cho, “The Joint Court System: Managing a Religiously Diverse Society,”

Beyond Tolerance: the Mongols’ Religious Policies in Yuan-Dynasty China and Il-Khanate Iran, 1200-1368 (Doctoral Dissertation of Yale University, 2015), pp.111~116)는 그 일면만을 부각한 것으로 자칫 約會의 실체에서 벗어날 수 있다.

109)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57절, p.38;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尾索引(栗林 均·确精扎布 編), pp.44~45. Rachewiltz, Igor de,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p.12~13, 317;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p.170; 周良霄(1986), p.36.

계절별로 일정한 이동 궤도를 따라 유목하는 몽골인110)과 유목민의 생활 방식에 준하여 四季 巡幸하는 몽골 카안111)에게 시공간은 특별했다. 지리적 장소와 모임(정치적 공간, 곧 쿠릴타이)112)은 시간과 동반될 때 의미가 배가 된다. 따라서 쿠릴타이의 시공간의 탐구는 칭기스칸과 그 후예들의 권력을 밝히는 데 요구되는 우선과제라 하겠다.

만날 장소와 시일은 쿠릴타이가 열리기 위한 기본 전제였다. 元史 「禮 樂志」는 쿠릴타이의 개최 시점을 명시하고 있다.

元나라(곧 예케몽골울루스)는 朔漠에서 흥기하여 朝會燕饗(쿠릴타이)의 儀禮는 대부분 몽골 고유의 전통을 답습했다. 1206년에 [칭기스칸이]

諸侯王과 오난(阿難) 河에서 大會를 열고 皇帝의 자리에 올랐으며 아홉 가닥의 다리를 가진 흰 旗[九斿白旗]를 세웠다. [그 후] 1271년에 [쿠빌 라이 카안은] 劉秉忠(1216-74)과 許衡(1209-81)에게 명령해 비로소 朝 儀를 제정했다. 이때부터 ①皇帝 즉위 ②元正(음력 정월 일일 설날) ③ 天壽節(황제 생일) ④諸王·外國 사절의 來朝 ⑤皇后·皇太子의 冊立 ⑥ 羣臣의 尊號 헌상 ⑦太皇太后·皇太后의 冊寶 진헌 ⑧郊祀·宗廟 祭禮 완 료 후 ⑨羣臣朝賀에서 朝會의 의례가 같았다.113) (번호는 필자의 加添)

110) Douglas L. Johnson, The Nature of Nomadism: A Comparative Study of Pastoral Migrations in Southwestern Asia and Northern Africa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1969), p.4

111) 葉新民(1992), pp.148~153; 宇野伸浩(1986), pp.47~60; 杉山正明, 「クビライと大都─モ ンゴル型“首都圈”と世界帝都」, モンゴル帝國と大元ウルス, 京都: 京都大學出版社, 2004, pp.134~136; 김호동, 「몽골帝國 君主들의 兩都巡幸과 遊牧的 習俗」, 中央아시아硏究7, 2002, pp.1~23. 巡歷하는 군주는 중세 유럽 전역에 존재했다. 국왕의 여행 혹은 순행은 아프리카·이란·인도네시아·남양 諸島 등 유럽의 지리적·문화적 경계를 넘어선 지역에서도 존재했다. 국왕이 자신의 영토를 주기적·지속적으로 여행함으로써 통치의 모든 실질적 기 능과 상징적 표현을 완수하는 통치 방법은 순행 군주권(itinerant kingship)으로 정의된다.

순행 군주권은 많은 사회에서 발견되며 다양한 경제·사회·정치·종교·문화 요소들에 의해 결 정되는 통치 방법이다. 군주의 순행은 물리적으로 왕국을 통합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 징·전례 방식을 이용해 왕국 전역에 국왕의 신성성을 창출하는 수단이었다(John W.

Bernhardt, ““On The Road Again”: Kings, Roads and Accommodation in High Medieval Germany,” Lynette Mitchell and Charles Melville, ed., Every Inch a King: Comparative Studies on Kings and Kingship in the Ancient and Medieval Worlds (Leiden·Boston: Brill, 2013), pp.304~305).

112) Igor de Rachewiltz,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410. 정치학자 슈미트 (Carl Schmitt)는 모든 것을 자기에게 결집시키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것, 이른바 “場所 化”가 질서라고 말한다. 철학자 틸리히(Paul Tillich)는 “권력이 공간에 의존한다”고 역설 한다. 장소는 자기중심적 구조를 가지며 자기중심적 공간은 권력을 産出한다(한병철 지음, 김남시 옮김, 권력이란 무엇인가, 서울: 문학과지성사, 2011, pp.152~159).

113) 元史67 「禮樂志」1 序言, p.1664, “元之有國, 肇興朔漠, 朝會燕饗之禮, 多從本俗. 太祖

朝儀는 “朝會之儀”의 약칭으로 엄밀하게는 朝會의 일부에 속하는 儀禮·儀式 이었다. 그것은 1271년에 劉秉忠과 許衡에 의해 제정되었으나, 사실 그에 앞서 2년 전에 大司農 승상 볼라드(孛羅)와 太保 劉秉忠이 카안의 聖旨를 받고 수행한 것이었다.114) 朝儀는 아홉 갈래의 국면에서 채택되었다. 朝儀 가운데 ②元正과 ③天壽節, ⑧郊祀·宗廟 祭禮는 정기적 의례였던 반면, ①皇 帝 즉위와 ⑤, ⑥, ⑦의 冊封·上尊號 의례는 부정기적인 것이었다. ④諸王·外 國 사절의 來朝와 ⑨羣臣朝賀는 양쪽에 속할 수 있었다.

朝儀는 朝會에서 거행되었고 통상 大饗·宴會가 가미되었다. 특히 后妃·宗 王·親戚·大臣·將帥·百官과 四方의 사신들이 모두 참석하는 朝會는 “大朝會”

―페르시아어

qūrīltāī-i buzurg

(大쿠릴타이/大會)―였다.115) 카안과 몽골인 들은 大朝會(大會)를 각별히 중시했다. 朝儀의 방식은 大會(쿠릴타이) 혹은 朝會-燕饗(쿠릴타이-토이)에서 기본적으로 동일했다. 元史 「禮樂志」에서 元正受朝儀나 皇帝即位受朝儀 등의 朝儀는 中華의 색채를 농후하게 띠고 있 다. 이는 볼라드·劉秉忠·許衡 등이 가미한 ‘漢法’116)의 요소였다. 이 변화는 쿠빌라이에 의해 몽골 제도의 ‘漢化’가 추진된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117)

그런데 朝會-燕饗에서 大饗·宴會는 주로 몽골 전통[本俗之禮]을 따랐다.

王惲(1227-1304)이 「大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에서 “國朝에서 大事

元年, 大會諸侯王于阿難河, 即皇帝位, 始建九斿白旗. 世祖至元八年, 命劉秉忠·許衡始制朝 儀. 自是, 皇帝即位·元正·天壽節, 及諸王·外國來朝, 冊立皇后·皇太子, 羣臣上尊號, 進太皇 太后·皇太后冊寶, 暨郊廟禮成·羣臣朝賀, 皆如朝會之儀.”

114) 元史67 「禮樂志」1 制朝儀始末條, p.1665, “至元六年春正月甲寅, 太保劉秉忠·大司農孛 羅奉旨, 命趙秉溫·史杠訪前代知禮儀者肄習朝儀.” 쿠빌라이 카안 시대 초창기까지 조정의 公卿이 대부분 武力에 功이 있는 臣이었고 文治를 시행할 겨를이 없었다. 四方에서 朝貢 해 오는 자의 禮는 더욱 簡易했다(滋溪文稿22([元]蘇天爵, 陳高華·孟繁淸 點校, 北京: 中 華書局, 1997) 「行狀」 故昭文館大學士中奉大夫知太史院侍儀事趙文昭公行狀, p.366, “於時 國家以干戈平定海內五十餘年矣, 而公卿多武力有功之臣, 未遑文治, 四方來朝貢者禮尤簡易.

太保奏起朝儀, 詔公及史公杠等十人共討論之, 又選近侍二百人肄習之.”). 이에 朝儀가 몽골 本俗을 바탕으로 볼라드(孛羅)와 劉秉忠·許衡에 의해 1271년부터 세 해에 걸쳐 입안, 가결 되었다(元史7 「世祖本紀」4 至元七年二月丙子條, p.128, “丙子, 帝御行宮, 觀劉秉忠·孛 羅·許衡及太常卿徐世隆所起朝儀, 大悅, 擧酒賜之.”; 元史67 「禮樂志」1 制朝儀始末條, p.1665, “世祖至元八年秋八月己未, 初起朝儀. 先是, 至元六年春正月甲寅, 太保劉秉忠·大司 農孛羅奉旨, 命趙秉溫·史杠訪前代知禮儀者肄習朝儀.”). 朝儀와 侍儀司 설치에서 승상 볼라 드(孛羅)의 공로에 대해서는 Thomas T. Allsen(2001a), p.65를 참조.

115) 國朝文類41 「雜著」 禮典緫序·朝會, p.426上, “國朝凡大朝會, 后妃·宗王·親戚·大臣·將 帥·百執事及四方朝附者咸在.”

116) “漢法”은 ‘중국’ 전통문화·유교를 지칭했으며 유학자들의 주요 정치적 선택지로 평가되었 다(Ma Juan(2013), p.60).

117) 白石典之, モンゴル帝國史の考古學的硏究, 東京: 同成社, 2002, p.78.

는 征伐·蒐狩(사냥)·宴饗의 세 가지뿐”118)이라고 적시했을 만큼 몽골 황실은 宴饗을 매우 중시했다. 몽골 황실에서는 朝會慶典이나 宗王·大臣의 來朝, 歲 時의 行幸에 모두 燕饗之禮를 실시했다.119) 반면 中華의 朝會는 皇帝가 신 하를 만나 政事를 듣는 것이었다.120) 즉 카안·諸王·高官의 “모임·會議·宴會”

인 몽골 카안의 쿠릴타이(大會)는 목표와 행위에서 中華 皇帝의 朝會와 확연 히 다른 것이었다. 따라서 “元代 朝會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121)는 張帆 의 견해는 정곡을 찌른 것이다. 劉秉忠·許衡 등 漢人 儒者들은 쿠릴타이를

“朝會·燕饗”으로 分割해 이해하고 몽골 大會에 中華의 朝儀를 가미했다.

쿠릴타이의 국면은 元史 「禮樂志」의 아홉 갈래와 꼭 일치하지는 않았 다. 그것은 1271년에 朝儀가 확정되기 이전부터 존속했었고 몽골 전통과 깊 게 연관돼 있었다. 몽골제국의 대표 史書―몽골비사, 元史, 集史―에서 카안울루스의 쿠릴타이(大會)로 명시했거나 특정할 수 있는 사례는 [표 1-1]

과 같다(지리적 위치는 【별첨】 [그림 1]을 참조).

개최 시기: 음력(양력)

주관 목적 개최지 현위치 주요

참석자 주요

불참자 출처

군주 연도 계절·날짜

카불/암

바가이 카단 전투 논의 카단과 그의

아미르들 집사 카불칸紀

쿠툴

라 즉위식 오난 강의 코르코낙

(Qorqonaq) 숲 헨티산맥 동쪽의 河原 비사57절

칭기 스칸

1200 봄 옹칸·테무

진 옹칸·테무진 회합

타이치우트 공격 사리 케헤르(Sārī Keher)

(夏營地/칭기스칸 葬禮地) 투브 아이막 Erdene 솜

Bööröljüüt 유적 옹칸·테무진 集史 칭기스칸紀;  元史1 (“薩里川”) 1203 [초봄?] 제1차 즉위, 법령

선포 龍庭(곧 曲雕阿闌 Köde’e

Aral) (大오르두) 헨티 아이막 Avargyn

Balgas 유적 집사 칭기스칸紀; 

聖武親征錄

1204 봄 2~3월 나이만 정벌 논의

(대쿠릴타이)

帖麥該川( Temegī hī n Tūlkūnchūt)

동몽골 칼카 (Khalkha) 강 남쪽

옷치긴 등

皇族과 群臣 元史1; 비사193절;

집사 칭기스칸紀

1206 초봄 텝텡그리

칭기스칸 제2차 즉위 부르칸 칼둔山 오난 강 발

원지 헨티산맥 동쪽 계곡 皇族· 諸부족 元史1; 비사202절;

집사; 정복자사

1219 봄 1~2월 칭기스칸 법령(yāsāq) 반포

호레즘 출정 칭기스칸의 오르두들

[쿠데에 아랄] (大쿠릴타이) 아들들·만호장·천호장·백호장 집사 칭기스칸紀

1224 겨울 칭기스칸 타직 원정 귀환 도

중에 개최 파나카트(Fanākat) 강 시르다리아 강 右岸 칭기스칸·아

들들 주치 집사 우구데이카안紀

칭기스칸 집회·대연회 부카 수지쿠(Būqā Sūjīqū) 집사 칭기스칸紀

톨루 이 監國 1228

초봄[1월] 카안 선출회의

(3일간) 케룰렌 강변 Köde’e Aral

(칭기스칸 大오르두) 헨티 아이막 Avargyn

Balgas 유적 皇族·群臣 전

비사269절; 집사

우구데이카안紀

가을 7월 예케쿠릴타이

(비사 집필)

케룰렌 강변의 쿠데에 아

랄(칭기스칸 大오르두) 上同 비사282절

[표 1-1] 카안울루스 쿠릴타이의 개최 시기·장소

118) 秋澗先生大全文集57 「碑」 大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 “國朝大事曰征伐, 曰蒐 狩, 曰宴饗, 三者而已.”; 全元文177(李修生 主編, 南京: 鳳凰出版社, 2004) 「王惲」11 大 元故關西軍儲大使呂公神道碑銘, p.497.

119) 國朝文類41 「雜著」 禮典緫序·燕饗, p.426上下.

120) 張帆(1997), p.107; 漢語大詞典(전자판) “朝會”.

121) 張帆(1997), p.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