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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릴타이의 진행 절차

(1) 帝選 쿠릴타이의 式順

모임의 시공간과 儀衛와 연향의 좌석 배치가 마련된 가운데 쿠릴타이는 엄숙함과 즐거움을 동반하면서 진행되었다. 몽골 황실의 쿠릴타이를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지만 단편 기록을 이용해 개략적 흐름을 검토한다. 그 순서는 카안의 선출·즉위 쿠릴타이에서 관찰된다. 선행연구는 그것을 크게 3단계, 즉 ①후보자 선정, ②소집령의 布告 ③選帝 및 前後 행사(곧 연회)로 나누어 이해했다.409)

후계 君主의 후보자는 재임 중에 있는 군주의 指名으로 선정되었다. 칭기 스칸은 자신의 선조들과 달리 몽골초원에서 종족들의 紛亂으로 인해 즉위 전에 前任 군주의 지명을 받은 적이 없었다.410) 1219년에 호레즘 출정에 앞 서 칭기스칸은 제3 皇后 이수이(Yisüi) 카툰411)의 제안을 받아들여 셋째 아 들 우구데이를 온후하다는 이유로 후계자로 지명했다.412) 이때 우구데이는

“莎草 풀(

öleng

: 靑草)로 싸놓아도 소에게 아니 먹힐 자가 고기 기름으로 싸 놓아도 개에게 아니 먹힐 [형편없는] 자가 태어나더라도, 뿔 사슴이 가로지 르고 쥐가 기어 나오는 것을 놓칠 만큼이야 [무능]하겠습니까?”라며 부친의 제안을 수락했다. 유력 帝位 경쟁자 톨루이 또한 칭기스칸이 지명한 우구데 이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口頭로 맹세했다.413)

주베이니에 따르면 칭기스칸은 1227년에 탕구트 정벌을 거의 완료했을 무 렵 “자신이 죽은 뒤에 우구데이에게 칸(

khān

)[의 권력]을 주겠으며 그의 명 령을 살아 있는 몸의 영혼처럼 여기겠다”고 아들들에게 “확고한 문서 (

khaṭṭi-i mo’akkad

)”로써 확약시켰다. 우구데이의 모든 형제들은 칸의 명

409) 箭內亘(1930a), p.371. 쿠릴타이 개최 순서는 선행연구(箭內亘(1930a), pp.371~386; 周 良霄(1986), pp.31~46)에 의해 정리되었다. 필자는 그들 성과를 검증해 일부 내용을 추가 하고 특히 토이의 단계를 보다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즉위 쿠릴타이의 장면과 儀式은 야나 이 와타리가 지적한 것처럼 우구데이와 구육의 선출 및 즉위 과정을 둘러싼 기록이 가장 잘 남아 있다. 본고는 그들의 일화, 특히 우구데이 카안의 즉위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410) 箭內亘(1930a), pp.371~372.

411) 元史106 「表」1 后妃表, p.2695.

412)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254~255절, pp.258~268. 칭기스칸이나 우구데이 카안 등과 달 리, 구육 카안과 뭉케 카안이 후계자를 지명했는지 여부는 不明하다(箭內亘(1930a), p.373).

413)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255절, pp.266~268. 몽골어로 盟誓·盟約은 aman(阿蠻)이다 (周良霄(1986), p.37;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尾索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148~149). aman은 특히 口頭에 의한 맹약을 뜻했다(本田實信, 「モンゴルの誓詞」, モ ンゴル時代史硏究, 東京: 東京大學出版社, 1991, p.61).

령(

farmān

)에 복종해 문서(

khaṭṭ

)로 서약했다.414) 이 문서(

khaṭṭ

)는 혼다 미 노부(本田實信)가 밝힌 것처럼 1204년 칭기스칸의 위구르 문자 채택의 유산 이었고 몽골어로 문서화된 최초의 誓詞로 간주된다.415)

그 같은 확고한 口頭·자필 誓詞에도 불구하고 前任 군주의 지명은 카안 位를 확정해 주지 못했다. 대칸 位의 최종 결정은 쿠릴타이에서 皇家·高官들 의 의결을 통해 가능한 것이었다.416) 구육 카안의 모친 투르게네 카툰의 사 례처럼 카안의 未亡人은 前任 군주의 후계자가 아닌 새로운 후보자를 지명 할 수 있었다. 몽골 관습법에 통상 皇后가 대칸 死後의 조정을 장악했다.417) 드물게 예외도 존재했다. 칭기스칸이 사망한 후 막내아들 톨루이는 후계자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를 주관했다. 이는 칭기스칸의 제1 황후 부르테와 여타 왕후들이 故人이 되었기 때문이었다.418)

攝政者는 제국 각지에 使臣들(īlchīyān)을 파견해 쿠릴타이 召集令을 알렸 다.419) 1246년에 투르게네 카툰의 使臣들이 멀든 가깝든 왕자들과 노얀들·

술탄들·왕들·서기들을 초청하자, 바투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명령에 복종해 집과 왕국을 떠났다.420) 이때 諸王들은 屬僚들과 마부·從者·군대·侍從들을 대동할 수 있었다.421) 러시아 서부 코스트로마(Kostroma)의 성 히파티우스 수도원(Monastery of St. Hypatius)의 연대기에서 쿠릴타이의 소식을 접한 諸王의 행동을 엿볼 수 있다. 우구데이 카안이 사망하던 1241년 무렵 러시 아에서 군사작전을 수행하던 몽골군 수장들―예컨대 Urdju(오르다: 주치의 장자), Bajdar(바이다르: 차가타이의 여섯째아들), Birjui(부리: 차가타이의 손 자), Kajdan(카단: 우구데이의 여섯째아들), Bečak(부첵: 톨루이의 일곱째아 들), Mengu(뭉케: 톨루이의 장자), Kjujuk(구육: 우구데이의 장자), Sebedjaj(수베테이: 우량카이 종족), Burundaj와 무수한 諸王들(voyevoda s)422)―이 몽골리아로 귀환했다. 그들은 “[구육 외에 스스로] 칸이 되는 것과

414) Juvaini/Qazwini, p.232; Juvaini/Boyle, pp.182~183; 本田實信(1991), p.60.

415) 周良霄(1986), p.40; 本田實信(1991), p.61.

416) 箭內亘(1930a), pp.372~378. 周良霄는 절대적 대칸의 권위를 수립한 칭기스칸이 “氏族 민주주의”의 잔존물인 쿠릴타이를 완전히 버리지 못한 까닭을 “전통의 속박”에서 찾는다 (周良霄(1986), p.37).

417) 胡務, 「蒙元皇后與元朝政治」, 求索(湖南省社會科學院), 1990(03), p.121.

418) 箭內亘(1930a), p.382, 434, 436.

419) Rashīd/Rawshan, p.634;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48.

420) Juvaini/Qazvini, p.282; Juvaini/Boyle, p.248;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286.

421) Juvaini/Boyle, p.249;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286.

422) 라시드 앗 딘은 킵착 원정에 톨루이家의 뭉케·부첵, 우구데이家의 구육·카단·쿨겐, 차가 타이家의 부리·바이다르, 주치家의 바투·오르다·시반·탕구트, 중요한 아미르들로서 수베테이 와 바하두르 등이 참전했다고 밝힌다(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p.88~89).

관계없었지만 諸王(chief voyevoda)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러시아인에게 체포된 몽골인 Tovrul’(토오룰)이 확인해 준 내용이었다.423) 당시 諸王 등은 쿠릴타이 참석을 위해 군사작전마저 일시 중단했다.

쿠릴타이 장소는 관례적으로 몽골 본토로 한정되었다.424) 카르피니의 견문 에 따르면, 몽골인들은 불로써 모든 것이 정화된다고 믿었다. “사절들이든 왕공들이든 몽골인들을 찾아온 사람은 누구나 그들이 가져온 선물과 함께 두 개의 불 사이를 통과해야만 했던 점”425)으로 볼 때 쿠릴타이 참석자들이 불의 淨化 儀式을 거쳤을 개연성이 높다. 실제 1246년에 카르피니는 수도 카라코룸으로 가는 도중에 바투의 오르두로 안내되기 전에 불의 淨化 의례 를 수행하도록 경고받았다.426) 이 의식은 1254년에 뭉케 카안의 오르두를 방문한 루브룩의 기행문에서도 확인된다. 다만 그는 불의 淨化 의례를 거치 지 않았고 단지 카안의 게르에 들어가기 전에 몸수색만이 있었다. 루브룩은 그것을 자신이 아무런 선물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427) 하 지만 카르피니도 행로 중에 모든 물품을 다 써서 구육 카안에게 바칠 선물 이 없었던 사실428)로 유추할 때 불의 淨化 의례는 때로 생략될 수 있었다.

왕자들과 노얀들·아미르들·관료들·지방관들이 쿠릴타이 현장에 도착하면 환영 행사가 열렸다. 예컨대 우구데이 카안은 1235년 쿠릴타이에서 자신의 형제들·아들들·숙부 등 친척들을 명예와 친절로써 환영했다. 그는 그들과 새 벽부터 저녁까지 음식과 술과 음료를 먹고 마시면서 며칠을 보냈다.429) 1229년 쿠데에 아랄(大오르두)의 즉위 쿠릴타이는 케룰렌의 牧地에 머물던 톨루이430)에 의해 소집·주최되었으므로 톨루이가 참석자들을 맞이했음에 틀 림없다.431) 당시 참석자들은 먼저 3일 밤낮 동안 기쁨과 열락으로 宴會

423) George A. Perfecky, (an annotated translation) The Hypatian Codex Part Two:

The Galician-Volynian Chronicle (München: Wilhelm Fink Verlag, 1973), p.48.

424) 箭內亘(1930a), p.382.

425)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12;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59. 다 른 한편 루브룩의 동료의 일화처럼 문지방을 밟을 경우에도 궁전으로 입장이 금지되었다 (Peter Jackson, The Mission of Friar William of Rubruck, p.212; 몽골제국 기행

(김호동 역주), p.329).

426)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56;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139.

427) Peter Jackson, The Mission of Friar William of Rubruck, p.177, 241;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286, 361~362.

428)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64;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150.

429) Juvaini/Boyle, p.197. 보일(J. A. Boyle)은 “제2차 쿠릴타이”의 개최연도를 集史의 기 록에 따라 양해(乙未年)인 1235년으로 추정한다.

430) Rashīd/Rawshan, p.635;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p.48~49.

431) 箭內亘(1930a), p.384.

(

jashn

)와 酒筵(

sūr

)을 열었다. 쿠릴타이는 참석자들의 정치·경제적 利權이 조율되는 자리였던 만큼 종종 432) 연회와 함께 “비밀과 딴마음에서 오는 증 오·시기의 불결함이 사라졌다.”433)

며칠 후에 그들은 왕국의 사무와 칭기스칸의 유언(waṣīyat)을 의논하고 우 구데이에게 칸 位(

khānīyāt

)를 주겠다고 칭기스칸의 아들들이 [써]줬던 誓詞 들(

khaṭṭ-hā

)을 반복해서 낭독했다.434) “誓詞”는 몽골어로

möčelge

―페르시 아어

mūjalkā

―라 일컬었으며

aman

(口頭 맹약)과 구별되었다.435) 선행연구 에서 밝힌 것처럼 군주를 추대할 때 諸王·諸將이 제출한 친필 誓詞는 중앙 의 대칸뿐만 아니라, 훌레구울루스의 칸들의 즉위에서도 시행된 몽골의 독특 한 제도였다. 그것은 “一子相續制”(칭기스칸의 후손 1인을 皇帝 후계자로 지 명·계승시키는 것)를 확립하려는 칭기스칸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었으며 황제 와 계약·약속을 보증하는 기능을 했다. 그 결과 誓詞는 皇位 계승권을 칭기 스칸의 후예들에게 한정시켰다.436)

1229년의 쿠릴타이에서 모든 왕자들이 誓詞에 따라 우구데이의 推戴에 동 의했으나 우구데이는 이를 사양했다. 그들은 다시 꼬박 40일 동안 매일 다 른 색깔로 새 옷을 입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王國의 사무를 함께 논의했다.

41일째 아침에 왕자들과 高官들 등이 대칸을 우구데이로 가결했다. 그날은 사실 점성술사들(

monajjimān

)과 무당들(

qamān

)이 결정한 상서로운 날짜와 시각이었다.437) 諸王들의 끈질긴 간청과 우구데이의 사양이 다시 오고 간 끝 에 우구데이가 칭기스칸의 명령과 형제·숙부들의 권유를 승낙했다.438)

참석자들은 그들의 옛 관습(‘ādat)에 따라 모두 모자를 벗고 혁대를 어깨

432) 무당 텝 텡그리(Teb-Tengri)가 칭기스칸의 권위에 도전하다 죽임을 당한 사건 (Juvaini/Boyle, p.39)처럼 쿠릴타이에서 언쟁과 대립은 종종 보복과 죽음을 몰고 왔다.

433) 元史2 「太宗本紀」 太宗元年秋八月己未條, p.29; Juvaini/Qazvini, p.234; Juvaini/

Boyle, p.185.

434) Juvaini/Qazvini, p.234; Juvaini/Boyle, p.185.

435) 本田實信(1991), p.61.

436) 本田實信(1991), pp.54~66. 몽골비사 제254~255절에서 우구데이의 자손 가운데 자격 없는 자가 나오면 칭기스칸의 다른 후손이 군주의 자리에 올라도 좋다는 서약 내용은 뭉케 의 大權 탈취를 정당화하고자 톨루이家에서 조작한 것이었다(Thomas T. Allsen(1987), pp.40~42).

437) 점성술사·무당 등에 의한 즉위 쿠릴타이의 擇日은 훌레구울루스에서도 계승되었다. 예컨 대 일칸국의 아바카칸(재위 1265-81)이 1265년 6월 19일(이슬람력 663년 라마단월 3일/

음력 윤오월 오일)에 즉위할 때 나시르 앗 딘 투시(Nasīr al-Dīn Tūsī: 1201-74)가 “상서 로운 시각”을 선정했다(Rashīd/Rawshan, p.1059; Rashīd/Thackston, p.517).

438) Juvaini/Qazvini, pp.234~235; Juvaini/Boyle, pp.186~188. 참고로 쿠빌라이는 카안 位 勸進을 세 차례 사양했다(元史4 「世祖本紀」1 中統元年春三月戊辰朔條, p.63, “中統元年 春三月戊辰朔, 車駕至開平. (중략) 皆來會, 與諸大臣勸進. 帝三讓, 諸王大臣固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