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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릴타이의 비용과 재화의 賜與

몽골 황실의 쿠릴타이는 그 자체로 방대한 물자와 비용을 요구했고 朝貢·

선물 헌상, 카안의 賜與, 경제정책의 결정 등 황실·국가 차원의 경제행위와 의사결정을 동반했다. 우선 쿠릴타이 참석자는 선물 혹은 모종의 참가비를 준비해야 했다. [토곤 테무르 카안 시대에] 기독교 수도승들의 사제장들은 대칸 앞에서 십자가를 들고 기도를 올리고 가장 경건한 자세로 은총의 인사 를 올렸다. 그는 은 쟁반 위에 배든 사과든 다른 과일이든 아홉 개의 과일을 그에게 바쳤다. 대칸은 그 가운데 한 개를 취하고 나머지를 자기 주변의 諸 王(lords)에게 주었다. 이는 “내 앞에 올 때는 누구나 빈손으로 나타나서는 안 된다”(

Non accedat in conspectus meo vacuum

)는 [몽골] 옛 율법 (law)에 따라 어떠한 외국인도 대칸에게 어떠한 것을 바치지 않고서는 그의 면전으로 다가가지 못한다는 몽골 관습 때문이었다.329)

선물을 열망하는 몽골인의 관습은 카르피니의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카르 피니 일행이 1246년 2월에 코렌자(Corenza: 주치의 아들 오르다의 셋째 아 들 쿠룸시[Qurumshi])에게 도착했을 때 그의 집사들이 그에게 어떤 인사를 하려는지 카르피니 일행에게 물었다. 그것은 곧 “어떤 선물을 우리(카르피니 일행)가 그(쿠룸시)에게 주려고 하는지” 묻는 말이었다. 카르피니에 따르면 교황은 자신의 사절들이 몽골인에게 도착할지 확신하지 못해 선물을 준비하 지 못했다. 하지만 카르피니는 몽골인들의 요구대로 선물을 주고서야 쿠룸시 의 오르두에 들어갈 수 있었다.330)

카르피니가 경험한 바 선물 授受는 몽골 수장의 알현뿐만 아니라, 行路 위의 안전과 길 안내를 위해서도 필요했다.331) 결국 그는 행로 중에 모든 물 329) Iain Macleod Higgins, ed. and tr., The Book of John Mandeville with Related Te xts (Indianapolis/Cambridge: Hackett Publishing Company, 2011), pp.145~146(Cha pter 25). The Book of John Mandeville(이하 “만드빌의 여행기”)은 학자들에 의해 표 절·창작 논란이 있어 왔다. 한편 최신 연구는 만드빌의 여행기가 비록 여러 단편 기록들 을 모아 편집한 것일지라도 그것은 전형적인 中世의 방식(medieval way)이었다고 해명한 다. 만드빌의 여행기는 저자의 부분적인 오류와 혼동과 끼워 넣기가 가미되었을지라도 당대 기록과 정보들을 적극적으로 재결합해―이른바 “조각모음 또는 편집”의 방식― 새로 운 판본으로 변형한 것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 제작 연대는 1360~1370년 무렵이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Iain Macleod Higgins(2011), pp.x~xvi).

330)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54;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136.

품을 다 써서 즉위 쿠릴타이에서 구육 카안을 알현하면서도 정작 카안에게 바칠 선물이 없었다.332) 루브룩도 이 같은 상황을 마주했다. [몽골인] 안내인 은 루브룩이 매번 몽골 지휘관을 방문할 때마다 선물을 가지고 갈 것을 종 용했다. 그 때문에 루브룩 일행에게 물품이 남아 있지 않았고 뭉케 카안에게 아무런 선물을 헌상하지 못했다.333) 선물을 휴대하지 않은 까닭에 그들은 대 칸에게 큰 환대를 받지 못했다.

쿠릴타이에서 조공과 선물이 카안에게 바쳐진 사례를 여러 문헌에서 만날 수 있다. 예컨대 1236년 봄 정월에 諸王이 모여 연회를 열고 萬安宮을 낙성 식을 했을 때 그들은 술과 음식을 준비해 왔다.334) 카르피니는 교황의 선물 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구육 카안의 즉위식에는 朝貢(tribute)을 가져온 사람, 선물(gifts)을 가져온 사람, 그들에게 복속하려고 온 술탄들과 다른 수령들, 타타르인들이 소환한 사람들 및 여러 영역의 총독 등 4000명 이상의 사신들 이 있었다. 그들이 가져온 선물로는 비단, 金絲 견직물(samite), 벨벳, 브로 케이드, 금으로 장식된 비단 허리띠, 고급 모피와 다른 선물들이 있었다.335)

1253년에 아르메니아 왕 헤툼 1세(Hethoum I)는 몽골인들이 자신의 왕국 주변을 점령하자 막대한 선물과 함께 자신의 동생 기니발도(Ginibaldo)를 뭉 케 카안에게 보냈다. 그는 당시 카안에게 일곱 가지 사안을 청원했다. 이때 카안은 회의(council)를 소집하고 諸王들(chiefs)과 그 문제를 논의했다.336) 베네치아의 地理家 마리노 사누도(Marino Sanudo: c.1270-c.1334)에 따르 면 14세기 초에 적정 선물을 휴대하고 몽골인들이나 다른 종족들에게 가는 기독교 사절들은 각기 매번 5000플로린(florins)(=17.5kg)을 준비했다. 그것 은 한번에 19만 gold florins(=665kg), 아니면 연간 22회에 18만 플로린 (=630kg)이었다.337)

趙天麟은 太平金鏡策에서 몽골 황실로 공물이 들어오는 광경을 특필했 다. 몽골제국에서 하늘이 온갖 상서를 내렸고 하늘이 밝은 기운을 열었다.

331)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p.53~54, 69;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p.134~136, 157.

332)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64;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150.

333) Willem van Ruysbroeck, The Mission of Friar William of Rubruck, p.108, 117, 241.

334) 元史2 「太宗本紀」 太宗八年丙申春正月, p.34, “八年丙申春正月, 諸王各治具來會宴.

萬安宮落成.”

335) Christopher Dawson, Mission to Asia, p.62, 64; 몽골제국 기행(김호동 역주), p.147, 150.

336) Marino Sanudo, Marino Sanudo Torsello, pp.376~377.

337) Marino Sanudo, Marino Sanudo Torsello, p.151. 1 플로린(florin)은 금 3.5g이다.

그에 따르면 멀리 異域의 기이한 완구용품[玩異]이 끊이지 않았으며 다른 지 역의 진기한 물품이 줄지어 도착했다. 산 넘고 바다 건너 공물과 금이 수레 에 실려 왔다. 혹자는 重譯을 거쳐 문서[呈]를 올렸고 혹자는 소문을 듣고서 찾아왔다. 府庫에 물건이 비는 달이 없었고 서리[史]가 목록을 적느라 멈출 줄 몰랐다.338)

쿠릴타이 주최자는 貢物·선물의 헌상에 상응하여 연향을 위한 물자를 준비 했다. 1203년 제1차 즉위 쿠릴타이를 열기 직전에 칭기스칸이 테메엔 케헤 르에서 사냥하고 승전을 올리며 얻은 “크나큰 富(na’mat-i buzurg)”339)는 즉위 쿠릴타이를 위한 물적 자원으로 쓰였을 것이다.

1248년 이래 바투를 중심으로 주치·톨루이 후손들이 뭉케를 카안으로 추 대하려는 움직임을 전개하자, 구육 카안과 오굴카이미시 카툰의 두 아들 호 자(Khwāja)와 나쿠(Nāqū)는 그 문제에 대응할 뜻을 품었다. 그들에게는 모 든 땅과 나라의 상당량의 돈을 일시적으로 상인들에게 할당하고 무례한 사 신들과 징세인들을 파견하는 수밖에 달리 방안이 없었다.340) 이 사건은 신임 군주를 추대하는 쿠릴타이가 대단히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 사안이었음을 방 증한다. 또 그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인들이 동원될 수 있었고341) 그것은 세액의 거래(곧 징세청부)를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었다.

1229년에 諸王·百官 大會(쿠릴타이)에서 우구데이 카안이 帝位에 올랐 다.342) 카안은 그 자리에서 칭기스칸이 東西의 왕국들로부터 여러 해 동안 모은 財庫의 재물(mūda’ān-i khazā’inī)들과 그 총액(faẓalik)을 “[회계] 장 부들(dafātar) 안에 가두어 두지 말고 개방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비판자들 의 조언을 물리쳐 그 입을 막고 모든 친족들(aqāreb)과 군인들(‘asākir)과 기병들(maqānab)과 종족들(‘ashāīr)에게 귀족(sharīf)부터 평민(waẓī’)까지, 우두머리(ra’is)부터 하급자(marū’s)까지, 호자(khwāja)부터 노예(ghulām)까 지 “그 자신이 소망하는 관심과 분량만큼 온전한 몫̇ ̇ ̇ ̇ 을 주라(ba-nisbat wa andāza-i ammat-i khīsh naṣība-i tamāṁ ̇ ̇ ̇ ̇ ̇ ̇ ̇ ̇ ̇ ̇ ̇ ̇ dādand)”343)고 하면서 다음 338) 太平金鏡策6 「宣八令以達天下之恩威」 47卻貢獻, “今國家天降百祥, 天開景運. 臣竊見

遠方玩異, 繈屬不絕, 殊域奇珍, 駢羅而至, 梯山航海, 輦贐輿金, 或重譯而來呈, 或望風而並 湊, 府無虛月, 史不絕書.”

339) Rashīd/Rawshan, p.398; 칭기스칸기(김호동 역주), p.226.

340) Juvaini/Boyle, pp.264~265.

341) 商人은 한편 州·縣의 연회나 전별 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元史176 「趙師魯列傳」, p.4114, “天曆中 (중략) 久之, 出爲河間路轉運鹽使, 除害興利, 法度修飭, 絕巡察之奸, 省州 縣厨傳贈遺之費, 竈戶商人, 無不便之, 歲課遂大增.”).

342) 元史2 「太宗本紀」 太宗元年秋八月己未條, p.29.

343) 라시드 앗 딘이 集史에서 말한 ba andāza-i hammat-i khīsh는 “그가 내키는/소망

날까지 적든 많든 조금이라도 그 어느 것도 財庫들(khazān-hā)에 남기지 말라고 명령했다.344) “연회(jashn)와 열망하는 대상으로서 선물들(mawāhib -i raghā’īb)”의 사무를 마친 후 우구데이 카안은 그들의 관례(rasm)와 제 도(āẕīn)에 따라 그다음 사흘 동안 칭기스칸의 영혼을 향해 음식들 (ṭa’ām-hā)을 마련해 바쳤다.345)

우구데이 카안은 1235년의 “제2차 쿠릴타이”에서도 잘 알려진 관례 (‘ādat)와 익숙한 습관(shīmat)에 따라 늘 닫혀 있던 財庫들을 개방해 일족 들과 이방인들에게 물품들(amwālī)을 분배했다.346) 곧 쿠릴타이는 財貨 사 여의 場이었다. 우구데이 카안은 쿠릴타이 참석자들에게 財庫를 거의 비울 만큼 신분·직위에 맞는 최대량의 재화를 사여했다. 그의 일화는 적극적 재정 지출과 황실소비를 지향하는 몽골 군주의 경제관을 보여준다. 카안의 분배에 는 어떠한 기준이 있었고 카안과 親疏―예컨대 칭기스칸 일족 여부―, 신분 과 지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카안이 나눠준 재화는 참석자들 “그 자신이 소망하는 분량의 전체 몫”이자 그가 “열망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이른바 카 안의 재화 사여·분배에 카안의 의사뿐만 아니라, 참석자의 요구, 곧 몫이 반 영돼 있었다. 몽골 카안은 帝國 재화를 적절히 분배함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유지·강화할 수 있었다.347)

쿠릴타이에서 재화 賜與를 위해 재무회계와 징세 대상 지역, 특히 大都―

쿠빌라이 카안 이래 帝國 재화의 1차 집결지―와 경제적 연락은 매우 중요 한 사안이었다. 1261년 오월 이십오일(06.24.)에 僕散禧는 燕京의 帑藏을 운 반해 上都에 도착했다. 辰刻(오전 7~9시)에 쿠빌라이 카안이 內藏에서 그것 들을 보고 “祖宗 이래로 이렇게 많은 적이 없었도다”라며 크게 기뻐했다.348) 당시 江南을 병합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제국 황실은 부유한 상태에 도달해 있었다. 上都로 들어온 물자는 燕京 帑藏의 것이 그대로 옮겨 온 것이었다.

하는 분량만큼”의 뜻으로 우구데이 카안이 무작위로 재물을 사여한 인상을 준다 (Rashīd/Rawshan, p.636; Rashīd/Thackston, p.312;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5).

그러나 이보다 주베이니의 기록이 엄밀하다고 생각된다. 본고의 제1장 각주 281 참조.

344) Juvaini/Qazvini, p.236; Juvaini/Boyle, pp.188~189; Rashīd/Rawshan, p.636;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51; Ernest A. Wallis Budge, The Chronography of Gregory Abû'l Faraj, p.393.

345) Juvaini/Qazvini, p.237; Juvaini/Boyle, p.189.

346) Juvaini/Qazvini, p.243; Juvaini/Boyle, p.198.

347) 김호동(1993), p.152.

348) 秋澗先生大全文集81 「中堂事記」中 中統二年五月廿五日丙戌, p.16ab, “僕散禧起燕京 帑藏, 至上都. 辰刻, 上觀於內藏, 喜甚, 曰: 「自祖宗已來, 未有如是之多也.」”; 中堂事記

下(金元日記叢編本), 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