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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순宴( ǰisün )과 皇室의 번영 共有

飲宴—몽골어

qurim

(莚會·莚席),211) 투르크어 토이(

ṭōi

)—은 몽골인들에게 즐거움이었다.212) 칭기스칸의 2대 祖 가운데 쿠툴라(Qutula)가 오난 강 코르 코낙 계곡에서 “카한”으로 추대됐을 때 몽골인들은 기쁨을 춤(debse)과 연 회(qurim)로 표현했다.213) 이후 몽골제국의 황실 儀禮와 慶典에서 대부분

207) 元史87 「百官志」3 宣政院, p.2193, “宣政院, 秩從一品. 掌釋教僧徒及吐蕃之境而隸治 之.”

208) 元典章新集 「兵部」 鋪馬·僧俗人每亂騎鋪馬拘收條, pp.2177~2178, “延祐七年八月 日, 江浙行省, 准中書省咨該: 准中書省咨: 宣政院呈: 「延祐七年五月初一日奏: 站赤爲國家軍情 大勾當的上頭, 設立來也者. 繁亂交騎, 麼道, 設立來的不是有. 如今多寺院裏, 比及寺了, 騎 鋪馬者. 麼道, 各處與來的鋪馬聖旨多有. 又把淨水與來的鋪馬聖旨也多有. 這般亂騎鋪馬呵, 站赤怎生不消乏了? 似這般亂騎鋪馬的, 交住罷了呵, 怎生? 奏呵, 奉聖旨: 你說的是有.

那般体例那裏有? 似那般與來的鋪馬聖旨, 都拘收者. 省官每根底說者: 無您的文書, 那裏索 鋪馬去呵, 省家拘收者. 通政院官人每根底說者: 無您文書索鋪馬去呵, 他每拘收者. 今後西番 地面裏并這裏僧俗人每根底, 合與的聖旨檢子, 我根底聽者.麼道, 聖旨了也. 欽此. 具呈照 詳.」 咨請欽依施行.”; 薛培煥(2014), p.167.

209) 元詩選(初集·庚集) 楊□□允孚·灤京雜咏一百首, p.1960, “汲井佳人意若何, 轆轤渾似挽 天河. 我來濯足分餘滴, 不及新豐酒較多. 【此地慳水故也.】”

210) Thomas T. Allsen(2001a), p.151.

211)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67절, p.43/ 제275절, p.290;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 語·語尾索引(栗林均·确精扎布 編), pp.52~53, 586~587.

212) 蒙韃備錄校注 「風俗」, pp.527下~528上, “韃人, (중략) 正月一日, 必拜天, 重午亦然, (중략) 飲宴爲樂也.”

213) 몽골비사(유원수 역주) 제57절, p.38; ≪元朝秘史≫モンゴル語全單語·語尾索引(栗林 均·确精扎布 編), pp.44~45. Rachewiltz, Igor de, The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 pp.12~13, 317; Монголын Нууц Товчоо, p.170; 周良霄(1986), p.36.

宴饗이 동반되었다. 제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쿠릴타이는 ①皇帝 즉위 ②元 正(음력 일월 일일 설날) ③天壽節(황제 생일) ④諸王·外國 사절의 來朝 ⑤ 皇后·皇太子의 冊立 ⑥羣臣의 尊號 헌상 ⑦太皇太后·皇太后의 冊寶 진헌 ⑧ 郊祀·宗廟 祭禮 완료 후 ⑨羣臣朝賀 등의 국면에서 열렸다. 이들 慶典에서 朝儀가 끝난 후 대칸은 宗親 혹은 大臣과 大饗·宴會를 열었다. 쿠릴타이는 대부분 몽골 풍속을 따랐다. 宴會는 漢人들의 눈에도 몽골 전통에 의거한 것214)으로 비쳤다.

이들 아홉 국면의 慶典 외에도 카안 선출이나 중대사를 논의하는 쿠릴타 이(大會), 봄철·가을철 사냥할 때,215) 사냥에서 돌아왔을 때, 上都로 巡幸을 떠나기 전, 上都 체류 기간, 上都를 떠나 大都로 돌아오기 전, 상사절·端午 節·冬至 등 12節氣216)에 宮中 大宴이 거의 정례적으로 거행되었다.217) 宴會 는 宮城 완공218)이나 군사 활동 중,219) 軍務의 포상220) 등 국가의 重大 사 무가 끝난 이후에도 열렸다.221)

다른 어떠한 쿠릴타이보다 카안의 즉위에서 연회의 기쁨과 축복은 몽골 황실과 臣民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예컨대 뭉케 카안은 즉위 후 야사를 명 하여 “帝王의 날에 어떤 피조물도 분쟁과 반대의 길을 밟지 말고 오락과 연 회를 만끽하라고 했다. 그는 인간이 세상에서 즐거움과 열락을 추구하는 것 처럼 각종의 동물과 광물도 그것을 누리도록 했다. 기승용이건 예인용이건 가축에게 올라타거나 짐을 싣거나 사슬을 채우거나 밧줄로 매어서 괴롭히지 말고 공정한 율법(shar’-i ‘adl)에 의거해 먹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그들 의 피를 흘리지 말도록 했다. 땅과 물에 사는 날짐승이나 들짐승을 사냥꾼들 의 활과 덫으로부터 안전하고 평안의 정원에서 마음대로 깃과 날개를 펼 수

214) 元史67 「禮樂志」1 序言, p.1664, “元之有國, 肇興朔漠, 朝會燕饗之禮, 多從本俗. 太祖 元年, 大會諸侯王于阿難河, 即皇帝位, 始建九斿白旗. 世祖至元八年, 命劉秉忠·許衡始制朝 儀. 自是, 皇帝即位·元正·天壽節, 及諸王·外國來朝, 冊立皇后·皇太子, 羣臣上尊號, 進太皇 太后·皇太后冊寶, 暨郊廟禮成·羣臣朝賀, 皆如朝會之儀. 而大饗宗親·錫宴大臣, 猶用本俗之 禮爲多.”

215) 元史2 「太宗·定宗本紀」 太宗六年條, p.33, “是春, 會諸王, 宴射于斡兒寒河.”

216) 大都에서 세시풍속의 상세 내용에 대해서는 析津志輯佚 「歲紀」, pp.211~224를 참조.

217) 袁冀(2005), p.116.

218) 元史2 「太宗·定宗本紀」 太宗八年丙申春正月條, p.34, “八年丙申春正月, 諸王各治具來 會宴. 萬安宮落成.”; 元史153 「劉敏傳」, p.3610, “乙未, 城和林, 建萬安宮, 設宮闈司局, 立驛傳, 以便貢輸. 既成, 宴賜甚渥.”

219) 元史3 「憲宗本紀」 憲宗七年, p.50, “冬, 帝度漠南, 至於玉龍棧. 忽必烈及諸王阿里不 哥·八里土·出木哈兒·玉龍塔失·昔烈吉·公主脫滅干等來迎, 大燕.”

220) 元朝名臣事略6 「元帥張憲武王」, p.107, “[至元十六年]十月, 入朝, 賜宴內殿, 慰勞良厚.”

221) 周良霄(1986), p.31.

있도록 했다. 또한 땅의 표면도 말뚝이 주는 고통과 말발굽이 주는 두통으로 고통받지 않도록 하고 흐르는 물은 더럽고 불결한 것들로 인해 오염되지 않 도록 했다.”222) 동물·식물·광물 등의 피조물이 즉위 연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것은 반드시 실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몽골 카안은 연향의 시점에 서 자신의 은총이 황실과 신민과 삼라만상에까지 미칠 수 있기를 기대했다.

大都 宴會는 元正이 특별했다. 그것은 통상 大明殿에서 거행되었다.223) 매년 정월 초하루에 百官은 崇天門(皇宮 정남문) 아래에서 카안에게 하례할 때를 기다렸다. 이틀 후 內外百官이 朝賀를 올리고 飲宴을 연 뒤에 수시로 관료 선발 문제를 거론했다. 1357년의 경우 정월 일일에 外國에서 큰 코끼 리[大象]를 진상했고 納粟補官의 선발에 대해 말했다. 그 후에 항상 오르두 (斡耳朶)에 모여 길일을 택해 中書署事에 들어가 大燕을 벌이는 것이 典禮 가 되었다. 六部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歲時 慶賀의 禮는 서로 오가며 迎送 을 중시했는데 酒醴를 가장 먼저 주고받았다. 음식[殽饌]은 모두 案卓에 벌 여 놓았다. 이런 일을 며칠 동안 진행했다.224)

張德輝는 제국 초기 元日에 몽골인들이 大牙帳의 앞에 마련한 大宴을 소 개했다. 이날 구육 카안으로부터 그 이하가 모두 “純白裘”를 입었다. 3일 후 屬僚들이 大牙帳으로 가 카안에게 賀禮를 올렸다.225) 마르코 폴로는 신년 元旦 연향을 “흰색의 축제(white feast)”라고 특기했다. 그는 “관습에 따라 대카안과 그의 속민들은 남자든 여자든 그럴 능력만 있으면 모두 흰 옷을 입는다”고 적었다. 흰 옷이 행운과 축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기 때문에 몽골 인들은 그렇게 입었다. 이날 “매우 아름답고 훌륭한 백마가 10만 마리 이상 대칸에게 바쳐졌다.”226) 흰색은 마니교의 영향으로 유목민 사이에서 가장 상 서로운 색으로 간주되었다.227) 몽골인에게도 흰색은 길조(good fortune)의

222) 칸의 후예들(김호동 역주), p.318.

223) 南村輟耕錄21 「宮闕制度」, p.251, “大明殿, 乃登極·正旦·壽節·會朝之正衙也.” 大明殿 은 新正受朝賀, 皇帝 즉위, 天壽節, 群臣의 황제 尊號 헌상, 황후·上皇太后 등 尊號 헌상 등에서 大宴을 거행하는 장소였다(袁冀(2005), pp.116~117).

224) 析津志輯佚 「歲紀」, pp.212~213, “正月一日, 百官待漏於崇天門下.【詳見朝儀元會聖節 同.】二日後, 內外百辟朝賀飲宴. 後隨時說選. 丁酉年正月一日, 內八府宰相領禮部中書省相 國, 以外國大象進上, 並說納粟補官選. 自此後常於斡耳朶聚, 涓日入中書署事, 設大燕, 成典 也, 六部如之. 京官雖已聚會公府, 仍以歲時慶賀之禮, 相尚往還迎送, 以酒醴爲先, 若殽饌, 俱以排辦於案卓矣. 如是者數日.”

225) 嶺北紀行(全元文694 「張德輝」 嶺北紀行·戊申·定宗三年六月, pp.291-292) “比歲除 日, 輒遷帳易地, 以爲賀正之所, 元日大宴所部於帳前, 自王以下皆衣純白裘, 三日後方詣大牙 帳, 致賀禮也.”

226)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김호동 역주), pp.254~255; 箭內亘(1930b), pp.950~951.

227) Thomas T. Allsen, “The Rise of the Mongolian Empire and Mongolian Rule in

상징이자 군주의 카리스마의 표상이었다.228) 다만 폴로의 기록에서 10만 마 리 이상의 백마가 카안에게 설날 獻物로 바쳐졌다는 주장은 매우 과장된 것 이다. 事林廣記의 「元日進賀禮物」(표 1-3)에 따르면 설날에 각 官署에서 대칸에게 헌상한 말의 수효는 기껏 64마리였다.

몽골 황실에서 가장 성대한 연회는 자마筵[詐馬筵]이었다. 자마筵에서 諸 王公·貴戚·子弟는 경쟁적으로 말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서로 자랑했다.229) 王 禕는 「上京大宴詩序」에서 上京大宴, 곧 자마宴의 장관을 묘사했다.

1349년 여름 오월에 天子(토곤 테무르 카안)께서 때맞춰 上京(곧 上 都)을 순행하셨다. 이에 유월 이십팔일(1349.7.13.)에 시라 오르두[失 剌斡爾朶]에서 大宴을 열었으며 3일을 지나 일을 마치니 舊典[彛典]을 따른 것이다. 무릇 쿠빌라이 카안[世祖皇帝]께서 區夏(곧 中原)를 통일 한 후로부터 燕(즉 大都)에 도읍을 정하고 과거의 兩京 제도를 채택하 셨으니 [居庸]關의 이북, 즉 灤陽을 上都로 삼고 매년 大駕가 巡幸했 으며 后宮諸闈·宗藩戚畹·宰執從寮·百司庶府가 모두 扈從해 간다. 이미 [대칸이] 駐蹕하셔서 大宴을 벌이는 까닭은 그로써 等威(등급과 위엄) 를 밝히시고 福慶을 균등히 하며 君臣의 기쁨을 합치고 上·下의 情을 통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朝廷의 禮는 嚴肅함을 주로 하는데, 엄격하 지 않고 숙연하지 않으면 원근[遐邇]에서의 관람[瞻視]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그러므로 무릇 宴에 참여하는 자는 반드시 冠服을 같은 것으 로 하고 鞍馬를 다르게 하면서 궁극의 화려함을 도모하고 儀采(기품과 풍채)를 뽐냈으며 이후에 [자신의] 자리[列]로 갔다. 세간에서는 이 때 문에 “奓馬宴”(자마宴

jāma

)이라 칭하고 또 “只孫宴”(지순宴

ǰisün

)이 라고 말한다. “奓馬”(자마)란 속칭 그 말 장식[馬飾]을 과시하는 것[矜 衒]을 말하고, “只孫”(지순)이란 그 服色이 통일된 것[齊一]을 번역한 것이다. 오호라, 성대하구나! 어찌 國家의 훌륭한 憲章과 성세[昭代]의 장관이 아니겠는가. 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이 법식을 따르고 지켰 다.230)

North China,”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6: Alien Regimes and Border States, 907-1368 (New Yor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p.343.

228) Allsen, Thomas T.(1997), pp.58~59.

229) 草木子3下 「雜制篇」, p.68, “北方有詐馬筵席最具筵之盛也, 諸王公貴戚子弟, 競以衣馬 華侈相高.”

230) 全元文1685 「王禕」4 上京大宴詩序, pp.292~293(王忠文公文集6), “至正九年夏五月, 天子時巡上京. 乃六月二十有八日, 大宴失剌斡爾朶, 越三日而竣事, 遵彛典也. 蓋自世祖皇帝 統一區夏, 定都於燕, 復采古者兩京之制度, 關而北卽灤陽爲上都, 每歲大駕巡幸, 后宮諸闈·

宗藩戚畹·宰執從寮·百司庶府, 皆扈從以行. 旣駐蹕, 則張大宴, 所以昭等威·均福慶, 合君臣之 歡, 通上下之情者也. 然而朝廷之禮, 主乎嚴肅, 不嚴不肅, 則無以聳遐邇之瞻視. 故凡預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