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臺諫의 허위 인식과 風聞擧劾

III. 허위 인식의 정도

2. 臺諫의 허위 인식과 風聞擧劾

추측이나 다른 사람의 말에만 의존하여 사실 여부를 제대로 살피지 아니한 채 객관적 진실과 일치하지 아니한 내용을 신고하게 된 경우 허위의 인식이 있다고 보아 무고죄의 성립을 인정함은 앞서 살펴본 것과 같다. 사실관계를 제대로 살 피지 아니한 채 신고하는 대표적인 경우가 風聞擧劾, 즉 風聞에 의한 탄핵이다.

조선시대에는 風憲官의 탄핵행위도 무고죄의 구성요건으로서 ‘告’에 해당하는 것 으로 인정되었는데(제3장 참조), 구체적인 증거에 의거한 탄핵이 아닌 풍문에 의거한 탄핵은 그 근거가 진위를 확신하기 어려운 풍문에 불과하므로 탄핵사실 이 객관적 진실과 불일치하기만 하면 무고죄의 '誣' 요건에 해당하게 되는 것이 다. 風聞擧劾된 피탄핵자는 이에 대항하여 억울함을 주장하며 사실관계를 끝까 지 밝혀 탄핵사실이 진실이면 자신을 처벌하되 허위라면 諫官을 무고죄로 반좌 하여 엄벌하여 달라는 상소를 하였다.53) 그러면 風聞擧劾이 허위로 밝혀졌을 때 피탄핵자의 주장에 따라 탄핵한 諫官을 무고죄로 처벌하였는가? 무고죄의 法理 가 엄격히 적용되어 風聞擧劾이 제재되었는가? 風聞擧劾 금지와 허용의 역사54) 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관리 또는 일반인이 범죄행위를 범하였다는 소문만 가지고 그 사람을 탄핵하 는 風聞擧劾은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으로 허용되었다. 그러나 고려말 위화도회군 이후 이성계 일파와 그 반대파가 서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정적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도구로써 風聞擧劾이 무분별하게 이용되었다.55)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도평의사사에 전교를 내려 대간의 風聞擧劾 뿐 아니라 풍문으로 타인의 죄를 고 발하는 風聞告訐을 일체 금하는 법을 세웠다.56) 이러한 風聞告訐 금지의 법은

53) 예컨대 ≪成宗實錄≫ 85卷, 성종 8년(1477) 10월 12일(丙午)의 기사에 나타난 양성 지의 상소 참조.

54) 風聞擧劾의 전개 양상과 정치적 의의에 관하여는 정두희, 조선시대의 대간연구 (일조 각, 1994), 94-123쪽; 이성무, 조선의 부정부패 어떻게 막았을까 (청아출판사, 2000), 101-112쪽 참조; 風聞擧劾 금지와 허용의 법률 변경에 관하여는 田中俊光, 「朝鮮初期 斷獄에 관한 硏究-刑事節次의 整備過程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위논문, 2011, 83-84쪽, 109-115쪽, 177-180쪽 참조.

55) 田中俊光, 앞의 논문, 83쪽.

56) ≪太祖實錄≫ 2卷, 태조 1년(1392) 10월 11일(己未) : … 內而都堂臺省, 外而節制按

≪經濟六典≫ 元典에도 수록되었다.57)

대간들은 風聞擧劾을 금지하는 법을 강하게 반대하여 태종대 이후 그 재개를 빈번히 건의하였으나 태종의 강경한 태도로 인하여 그 뜻은 좌절되었다. 세종대 에 이르러서 계속된 논란 끝에 風聞擧劾은 제한적으로 허용되는 양상을 보였는 데, 세종은 사헌부에서 지방관의 貪墨과 虐民 두 가지 사유에 한해서만 풍문으 로 탄핵할 수 있도록 명하였다.58) 이는 탐오하고 횡포한 수령으로부터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제하고자 고소‧고발의 제한 범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으로 세종 의 愛民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風聞擧劾을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법은 ≪經濟六典≫ 續典에 수록되었고,59) 세조대 이후에도 계승되어 ≪經國大典

≫에도 같은 내용으로 수록되었다.60)

그러나 이러한 법에도 불구하고 대간의 탄핵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성종초 부터는 風聞擧劾이 점차 증가하였다. 특히 성종대에는 대간들이 지방관이 아닌 중앙 조정의 주요 인물을 대상으로 風聞擧劾을 감행함으로써 이를 둘러싼 정치 적인 논쟁이 격화되었다.61) 그러나 성종은 風聞擧劾을 대처함에 있어 피탄핵자 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항의를 억제하면서 風聞擧劾을 사실상 허용하였 으며 성종의 親政體制가 갖추어져 갈수록 피탄핵자들의 변명과 항의는 오히려 죄악시되기까지 하면서 風聞擧劾은 더욱 성행하였다.62)

廉, 至於州縣官, 一以慈愛撫民爲務, 卽仁政也. 當草創法制未備之時, 豈可遽以末務, 能正 風俗哉? 又當舊染自新之日, 安可追咎旣往之事? 孔子曰: “不念舊惡, 怨是用希.” 又曰:

“浸潤之譖, 膚受之訴, 不行焉, 可謂明也已矣.” 自今見身告狀, 而有明證及謀叛大逆, 卽當 受理. 風聞告訐, 乃敗俗亂化之源, 不宜受理, 違者懲戒. 內而宗室子弟, 外而大小臣僚至於 士庶人, 如有所犯, 自當痛懲, 斷不原宥.…

57) 태종은 風聞擧劾 문제를 논하면서 元典에 이를 금하는 법이 실려 있다고 언급하였다.

≪太宗實錄≫ 31卷, 태종 16년(1416) 3월 20일(壬子) : … 予以謂, 風聞公事, 不可行 也. 禁而不行, 已載於太祖元典. 若風聞之事, 許令行之, 則更相撥摘, 互相陰中, 民風俗習, 必不美也, 予必堅守此法矣.…

58) ≪世宗實錄≫ 125卷, 세종 31년(1449) 7월 21일(己亥). 세종대 風聞擧劾 제한적 허용 의 법이 정착하게 된 과정에 대하여는 田中俊光, 앞의 논문, 110-115쪽.

59) ≪世宗實錄≫ 110卷, 세종 27년(1445) 12월 5일(甲辰) : …凡監司不法事, 憲府風聞糾 理, 載在《續典》…

60) ≪經國大典≫ 刑典【禁制】外官所犯, 貪汚虐民外, 勿許風聞擧劾.

61) 당시 風聞擧劾을 당한 대신들은 양성지, 한명회, 오백창 등 조정의 주요 대신 내지 공 신들이었다. 이들이 탄핵당한 구체적인 사례에 관하여는 정두희, 앞의 책, 99-112쪽 참 조.

62) 정두희, 앞의 책, 111-112쪽.

風聞擧劾의 허용은 허위 인식에 관한 무고죄의 法理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 다.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아니하고 소문만 듣고서 탄핵한다는 것은 ‘허위 (誣)’의 인식이 충분히 있는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風聞擧劾 을 감행한 대간이 무고죄로 처벌받은 사례는 전혀 없었는가?

風聞告訐을 법으로 엄금한 태조조차도 風聞擧劾한 간관을 형사처벌하지는 아 니하였다. 1395년(태조 4년) 李皐의 風聞擧劾 사건(부록1-1)에서 이를 알 수 있다. 諫官 李皐는 전 開城尹 金云貴에 대하여 과전을 한도 외에 더 받은 죄와 그 어버이에게 불효한 죄를 탄핵하였는데 태조는 과전을 더 받은 죄로써만 김운 귀를 외방에 유배시키면서 이고를 불러 風聞擧劾한 이유를 추궁하였다. 김운귀 가 어버이에게 불효한 죄는 사실이 아니어서 인정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諫 官은 이를 풍문에 의거하여 탄핵했던 것이다. 이고는 김운귀의 불효한 죄는 ‘온 나라 사람들이 다 안다’면서 風聞擧劾을 정당화하였는데 이에 대해 태조는 단지 이고가 더 이상 일을 못보게 하는데 그쳤다.63)

風聞擧劾 금지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이던 태종조차도 풍문으로 탄핵한 대 간에 대해 강력한 처벌을 시행하지는 아니하였다. 그 예로 1412년(태종 12년) 사간원의 탄핵 사건(부록1-17)을 들 수 있다. 당시 사간원의 司諫 尹會宗, 獻納 李士澄, 李安柔는 世子左使衛로 근무하면서 세자에게 아첨하여 邪僻한 행동을 한 이유로 파직되어 쫓겨난 沈泟이 근신하지 아니하고 동궁전에 들었다며 그를 변방에 내칠 것을 청하였다. 敬承府少尹 柳章이 사간원의 관원인 이안유에게 고 하여 사간원에서는 이를 근거로 심정을 탄핵한 것이다.64) 그러나 이 사건은 세 자가 정월초에 새해인사를 하러 온 사람을 탄핵하느냐며 크게 반발하면서 문제 가 되었는데, 태종은 최초 발설한 유장을 비롯하여 유장의 말만 듣고 탄핵한 사 간원의 윤회종, 이사증, 이안유를 모두 귀양보냈다. 사헌부에서는 이에 대해 간 관을 귀양보내는 것은 언로를 막는다는 취지로 상소하였는데, 태종은 사간원의 탄핵은 오고가는 뜬 말을 가지고 風聞으로 糾彈한 風聞擧劾이라는 취지로 반박 하면서 族親이 아니면 대소 신료가 대간의 관원과 사사로이 의논을 하는 행위까 지도 금하였다.65) 그러나 정부와 헌사에서 계속하여 처벌이 부당하다는 취지로 63) ≪太祖實錄≫ 8卷, 태조 4년(1395) 7월 1일(壬辰).

64) ≪太宗實錄≫ 23卷, 태종 12년(1412) 1월 12일(丁酉).

65) ≪太宗實錄≫ 23卷, 태종 12년(1412) 1월 12일(丁酉) : “臺諫凡上疏糾彈之事, 當以實 事陳之可也. 近來臺諫, 以往來浮浪之言, 風聞彈糾, 風俗不美. 自今大小臣僚, 族親外, 毋

論究하자 윤회종 등을 귀양에서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태종의 이러한 처 사는 風聞擧劾한 대간을 벌할 수 있다는 강한 의지를 보인 점에서는 특기할만하 나 실질적인 처벌에는 이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허위 인식에 관한 무고죄의 法理 가 風聞擧劾에 있어서는 여전히 제대로 기능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66)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대간의 風聞擧劾에 관하여 피탄핵자들의 항의가 받아들 여졌다 하더라도 그를 탄핵한 대간은 형사처벌되지 아니하고 기껏해야 좌천되는 정도의 것 이상은 아니었다.67) 오히려 風聞擧劾을 한 대간이 아무런 제재를 받 지 아니한 반면 風聞擧劾을 당한 대신이 불이익을 입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대 표적인 사례가 사헌부 장령 김제신이 직속상관인 大司憲에 새로이 임명된 양성 지를 탄핵한 것이었다. 1477년(성종 8년) 김제신은 양성지가 이조판서로 있을 때 뇌물을 받은 적이 있다며 받은 뇌물이 다섯 마바리라는 의미로 ‘五馬判書’라 는 원색적인 비난까지 아끼지 않으면서 그를 대사헌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 고 탄핵하였고, 사간원의 司諫 경준도 이에 참여하였다.68) 성종은 세조실록 修 撰에 참여한 閔粹가 양성지의 일을 썼다가 원망을 살까봐 두려워하여 史草를 고 친 일69)이 발각되어 죄를 입었다는 데 착안하여 탄핵사실의 허위 여부를 밝히

得與臺諫官相過, 交私議論, 違者罪之. 如有所訴, 聽於官門進告.”

66) 그나마 대간의 탄핵을 무고로 처벌한 것은 태종대에 2건(부록1-10, 11) 발견된다. 태 종의 부마 조대림을 역모에 끌어들여 모반하게 하고 이를 진고하여 부귀를 얻으려 하 였던 역적 睦仁海 사건은 태종대 조정에 파란을 일으킨 큰 사건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司憲執義 卓愼은 조대림이 역적 목인해의 말을 믿고 임금의 명을 무시하였다고 탄핵하 였다가 장 60대와 더불어 나주에 부처되었다. 그러나 탁신의 탄핵사실이 완전히 허위라 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성격상 태종의 진노를 야기하여 처벌에 국왕의 의중이 강력하게 반영된 사건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무고탄핵을 벌한 예로 분 류하기는 어렵다. 또한 태종은 사헌부, 사간원의 대간들이 完原府院君 李良祐를 탄핵한 사건에서 대간들을 자원안치한 예가 있다. 대간들은 이양우가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 킨 회안군 이방간과 사통하였다고 탄핵하였다가 추국 과정에서 사헌부의 고문을 받은 이양우의 根隨 洪義가 무고한 것이 밝혀져 이례적으로 대간 대부분이 외방에 부처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초기를 통틀어 대간의 탄핵을 무고로 처벌한 예는 태종대를 제외하 고는 성종대 1건 정도가 발견될 뿐 거의 없다. 탁신 사건은 ≪太宗實錄≫ 16卷, 태종 8 년(1408) 12월 25일(戊戌); ≪太宗實錄≫ 17卷, 태종 9년(1409) 1월 2일(乙巳); 이양 우에 대한 탄핵 사건은 ≪太宗實錄≫ 27卷, 태종 14년(1414) 4월 7일(庚戌); ≪太宗實 錄≫ 27卷, 태종 14년(1414) 4월 24일(丁卯); ≪太宗實錄≫ 27卷, 태종 14년(1414) 6 월 23일(甲子); ≪太宗實錄≫ 28卷, 태종 14년(1414) 7월 8일(己卯).

67) 정두희, 앞의 책, 111쪽.

68) ≪成宗實錄≫ 85卷, 성종 8년(1477) 10월 4일(戊戌).

69) 이 사건은 이른바 ‘閔粹史獄’으로 불리는 유명한 筆禍이다. 민수는 양성지, 신숙주 등 공신들을 비판한 사초를 썼으나, 한명회가 실록청의 당상관이 되자 화를 입을 것이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