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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무고죄의 '告' 요건의 확장

1. 무고죄의 ‘告’

(1) 告의 방식

조선왕조는 무고를 제재하기 위해 일정 영역의 고소를 제한하는 법을 시행하 였으나, 고소가 허용되는 그 밖의 영역에서는 각종의 신고행위의 진실 여부를 살펴 무고죄로 제재하여야 하였는데, 무고죄로 걸러내는 범위를 어떻게 설정하 47) ≪成宗實錄≫ 33卷, 성종 4년(1473) 8월 4일(癸亥) : … 國家有部民告訴之禁, 自己冤 抑, 乃許聽理. 今之告訴者, 條陳守令不法, 間以一二自己冤抑, 法司聽理, 若告訴不實, 則 例皆逃亡. 夫守令民之父母, 民者守令之子, 安有子訴其父, 避逃苟免乎? 且今之部民告訴者, 相繼不絶, 而守令受罪者, 百無一二, 豈守令盡出於正, 而部民皆誣告乎? 但於推鞫之際, 告 者實, 而守令犯多, 則品官鄕吏, 與守令符同, 厚賂告者, 誘令逃亡. 雖曰逃亡, 而妻子之生 業自若, 守令撫之益篤, 待之益厚, 其告者旣辱守令, 又得厚利, 自以爲得計, 按罪者因曰:

“告者逃亡, 無證可驗.” 置而不問, 訴者被訴者, 皆以巧計, 得逃邦憲. 臣等願, 部民訴守令 者, 在逃者以誣告論, 妻子屬他道殘驛, 守令誘令逃避者, 以其所告抵罪. 然則訴者, 雖賞之 不逃, 守令被訴者, 亦不得苟免矣.…上議諸院相, 採用八條, 用箚子, 勿使中官傳奏, 宦官從 二品而止, 部民訴守令在逃者, 以誣告論, 守令誘令逃避者, 以所告抵罪,…

였는지가 문제된다. 무고죄는 단순히 모의만 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허위를 고 (告)함으로써 완결된다고 할 것이다. 무고죄에서 정하는 구성요건으로서의 ‘告’

는 어떤 방식에 의하여야 하며 형식적으로 어느 정도까지의 告하는 행위가 무고 죄의 ‘告’에 해당하는가?

조선시대에는 현행법에서 말하는 민사와 형사가 아닌 사안의 중대성‧긴급성에 따라 재판 유형이 구분되었다.48) 따라서 지금과 같이 형사처벌을 구하는 고소‧

고발장과 민사재판을 구하는 소장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수 령이 사건을 수리하여 처결할 때 사안이 중하면 형벌을 정하는 형사재판이 될 수도 있고, 사안이 경미하면 처벌없이 손해배상이나 원상회복을 정하는 민사재 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 백성이 타인의 행위로 인하여 신체나 재산에 대한 침해를 입게 되면, 일단 해당 관아에 처벌을 구하는 告를 하고, 이 에 따라 해당 관아에서 범죄 수사에 착수, 심리하여 형벌의 부과 여부, 지금으로 말하자면 민‧형사 해당 여부를 결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범죄의 발생을 관아에 통보하는 것을 告言이라고 하는데, 고언할 경우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을 구체적으로 적시하여야 한다. 京中에서의 상해사건의 경우 피해자 집에서 피해사실을 적은 글을 형조에 제출하고, 살인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친속이 범인의 거처, 범행 月日時, 사건 발생 원인, 범행에 사용한 흉 기, 피해자의 사망일시, 처벌의사를 적은 글을 소속 고을 또는 한성부 내 部에 고언하도록 함으로써 고언의 구체적인 요건을 정해두었다.49) 이와 같은 고언의 형식을 취하여 무고를 하였다면 당연히 무고죄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나 무고죄의 구성요건으로서의 ‘告’의 해석에 있어 고언의 요건을 엄격히

48) 역모사건이나 강상범죄 등 국가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범죄에 관하여 국왕의 전교를 받은 의금부를 중심으로 수사와 심리를 진행한 詔獄, 역모나 강상 사건을 제외 한 奸盜, 人命 등 杖罪이상 死罪까지의 범죄안건을 다루는 刑獄, 타인의 노비나 전택의 據執 등 대부분 장 100, 도 3년까지의 형벌을 수반하는 안건을 다루는 詞訟, 笞罪에 해 당하는 경미한 안건 혹은 아예 가벌성이 없는 雜訟으로 구분할 수 있다. 田中俊光, 「朝 鮮初期 斷獄에 관한 硏究-刑事節次의 整備過程을 中心으로-」, 서울대학교 법학박사학 위논문, 2011, 26-31쪽.

49) 告言은 言告, 告訴, 訴告, 發告, 發狀, 狀告라고도 한다. 고언에 관하여는 田中俊光, 앞 의 논문, 31-32쪽 참조; 1419년(세종 1년)부터 인명에 관계되는 중대사의 공‧사 문안 에 반드시 연월일을 명시하도록 한 법을 세움으로써 인명에 관련된 사건을 관아에 고 언할 경우에도 반드시 연월일을 명시하도록 되었다. ≪世宗實錄≫ 3卷, 세종 1년(1419) 2월 23일(戊戌).

갖추지 않은 경우에도 무고죄의 ‘告’의 구성요건에 해당하였다. 조선초기에는 무고 죄의 범위 설정에 있어서 이러한 고언의 형식적 요건에 엄격히 기속되지 않은 것 으로 보인다.50) 고언의 형식을 통해 범죄의 발생을 직접적으로 고하지 아니하더 라도 무고죄의 ‘告’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아 무고죄로 의율한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1416년(태종 16년)에는 전 知錦山郡事 宋希璟이 수령으로 근무하는 동안 아전 2명에 대하여 장을 때려 죽게 한 일이 있어 감사가 이를 立案하여 파 직하고 贖을 거두었더니 송희경은 아전이 病死한 것이라며 上書하여 변명하였다.

그러나 조사결과 사실이 밝혀져 송희경은 무고죄로 반좌되었다(부록1-23).51) 변 명 차원에서 국왕에게 상서한 행위를 무고죄의 告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같은 해 사건 중에는 직접 고하지 아니하더라도 다른 사람에 대하여 허위의 정보를 제공한 경우 무고죄로 처벌한 사례가 있었다. 學生 李實이 鄭允壽에게 전 知熙川郡事 姜完의 처제가 고려 왕족으로 중이 되었는데 그를 숨겨주었다는 정보를 제공하자 정윤수는 신문고를 쳐서 이실이 말한 바를 신고하였다. 이에 태종은 의금부에 발설자인 이실과 피고발인인 강완을 조사하도록 지시하여 신고 사실이 허위로 밝혀지자 이실을 무고죄로 처벌하였다(부록1-26).52) 정윤수는 이실의 말을 전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믿고 신고한 듯하다. 따라서 정윤수는 무 고죄의 고의가 없어 처벌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나, 이실은 직접 신고하지도 아 니하고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였을 뿐인데 무고죄로 처벌받은 것으로 보아 무고 죄의 ‘告’의 범위는 상당히 포괄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종대에 발생한 權軫과 趙璞의 무고 사건(부록1-6)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발 견할 수 있다. 1400년(정종 2년) 慶尙道監司 조박은 知陜州事 권진에게 平壤伯 趙浚과 雞林府尹 李居易가 나라의 사병 혁파 정책을 비판하는 취지로 대화를 나 눈 것처럼 정보를 제공하였다. 권진은 조박이 제공한 정보를 좀더 허위로 부풀 려 감찰관원에게 전하였고 이에 憲臣 權近과 諫臣 朴訔 등이 조준과 이거이의 죄를 상언하였다. 그 결과 조준과 이거이는 하옥되어 추국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50) 현행 형법의 해석론에 있어서도 무고죄에서 정하는 ‘신고’의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무고죄에 있어서 허위사실의 신고방식은 구두에 의하건 서면에 의하건 관계가 없을 뿐 아니라, 서면에 의하는 경우 타인으로 하여금 형사처분 또는 징계처분을 받게 할 목적 으로 허위사실을 신고하면 족하지 신고하는 서류의 명칭을 반드시 고소장이라고 하여 야만 무고죄가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 1985.12.10. 선고 84도2380 판결.

51) ≪太宗實錄≫ 31卷, 태종 16년(1416) 1월 17일(庚戌).

52) ≪太宗實錄≫ 32卷, 태종 16년(1416) 12월 19일(丙子).

사실무근인 것으로 밝혀져 조박과 권진은 무고 혐의로 유배되었다.53) 권진은 엄 격한 요건은 갖추지 아니하였다 하더라도 수사에 착수할 권한이 있는 관원들에 게 고하였으니 무고죄의 ‘告’에 해당한다고 볼 수도 있겠으나, 조박은 단지 권진 에게 정보를 제공하였을 뿐인데 함께 처벌받게 되었다.

세종대에 일어난 洪州 사람 李成의 무고(부록1-35)는 더욱 복잡한 다단계의 정보제공임에도 무고죄의 ‘告’로 인정되었다. 이성은 懷安君의 아들 李孟宗의 家 奴에게 마치 같은 고을사람 李才가 謀叛을 꾀한 것처럼 허위의 말을 전하였다.

종으로부터 보고받은 이맹종은 목사 趙琓에게 고하였고, 조완이 이성을 데리고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고하여, 임금이 의금부에 명해 국문하게 되었는데 허위임이 밝혀져 이성은 무고죄로 처벌되었다. 이성의 허위 정보 발설이 이맹종 의 종, 이맹종, 조완을 통해 순차적으로 조정에 전달되었음에도 이성이 정보를 제공한 행위는 무고죄의 '告' 요건에 해당한 것이다.

더 나아가 피무고자를 구체적으로 특정하지 아니한 채 단체를 포괄적으로 비 방하여 무고하는 행위까지 무고죄의 범위에 포함시켜 反坐律로 처벌하였다.

1419년(세종 1년) 전 甲山郡事 張蘊은 동정(東征)할 때에 먼저 서울로 돌아와

“장수의 上功을 실상으로써 하지 않고, 싸움할 때 中軍이 배에서 내리지 않았다”

라면서 동정군의 비리를 고하였는데,54) 국문한 결과 그것이 허위임이 밝혀져 장 온은 무고죄로 처벌받게 되었다(부록1-29).55) 1429년(세종 11년) 경기감사 李 明德과 經歷 李繼長은 處女의 명단을 傳報할 때에 잘못 보고한 일로 사헌부의 추문을 받게 되자 “사헌부가 밝지도 못하고 곧지도 못하며, 성상의 총명을 흐려 놓는다”라는 취지로 글을 올렸다가 誣告에 좌죄되었다(부록1-52).56) 대개의 무 고 사건이 피무고자를 특정하여 지칭하면서 신고하는데 비해, 위 사건들에서는 동정군이나 사헌부의 책임을 포괄적으로 묻는 취지로 신고하였음에도 무고죄의

‘告’에 해당한다고 본 것이다.

이처럼 범죄의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형식을 갖추어 행하는 告言과 달리 무고 죄의 ‘告’는 국왕에게 변명하여 上書하는 행위, 다른 사람에게 허위사실을 발설 53) ≪定宗實錄≫ 5卷, 정종 2년(1400) 8월 1일(癸巳).

54) ≪世宗實錄≫ 4卷, 세종 1년(1419) 7월 17일(庚申).

55) ≪世宗實錄≫ 5卷, 세종 1년(1419) 8월 8일(庚辰).

56) ≪世宗實錄≫ 46卷, 세종 11년(1429) 12월 14일(丙戌); ≪世宗實錄≫ 46卷, 세종 11 년(1429) 12월 25일(丁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