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코리아 패싱 방지의 기하학
최근 헨리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 이후의 처리 방안에 대해 합의한다면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 바 있다.
키신저는 북한 정권 붕괴 후에 주한미군을 철수한다는 미국의 약속이 미·중 합의 내용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북한이라는 완충 지대가 사라지면 미군이 중국 국경선에 배치될까 하는 중국의 우려를 가 라앉힐 것이라고 했다.30) 이런 언급들은 중국의 우려를 없앨 수 있는지 몰라도 한국 내에서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 한국 배제) 우 려를 증폭시켰다.31) 키신저는 1970년대 미국-중국 수교와 미군의 베트 남 철수 등으로 미국의 국익을 나름대로 증진시켰다고 평가되면서 동시 에 대만이나 남베트남의 국익에는 치명타를 날린 것으로 평가되는 인물 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약소국은 주요 결정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처지일까? 동등한 국력을 갖고도 영향력 크기가 다른 경우는 허다하다. 대체로 자신이 주도하여 승리를 가져올 수 없는 약소국은 승리연합에 속해야 나름 국익을 챙길 수 있다. 양극단의 대결 구도에서는 중간 입장에 있어야 승리연합에 들기
29) 여기서는 구체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답인 해(解) 대신에, 해를 계산하는 방법인 해법(解 法)을 제시한다.
30) Sang-Hun Choe and David Sanger, “After North Korea Test, South Korea Pushed to Build Up Its Own Missiles,” New York Times, July 29, 2017.
31) 코리아 패싱은 주변국들이 한국을 배제하고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현상을 말한다.
1998년 클린턴(Bill Clinton) 미국 대통령이 일본을 빼고 중국을 방문했을 때 일본 언 론에서 이를 재팬 패싱(Japan Passing)으로 불렀는데, 코리아 패싱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코리아 패싱’ 용어 자체는 남남갈등을 내포한다. 정부 여당의 실 책을 주장하는 측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정부 여당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용어 사용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코리아 패싱이라는 영어 용어는 처음 등장했을 때 영어 원어민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이해 하는 것 같고 또 국내에서 다른 용어로 대체되지 않는 일반 용어가 이미 되어 여기에서 도 사용하기로 한다.
쉽다.32) 왜냐하면 중간에 위치한 자의 선택에 따라 승리연합이 결정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즉, 해당 정책 스펙트럼의 중간에 위치하여 자국이 배제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 코리아 패싱 방지의 기하학의 이론적 출발 점인 중간투표자 정리(median voter’s theorem)를 먼저 소개하면 다 음과 같다.33)
각 가능한 대안들을 일직선 위에 배열할 수 있고 또 각 행위자는 자신이 가장 선호하는 점(대안)에서 멀리 떨어진 대안일수록 덜 선호한다고 할 때, 최종적으로 합의되기 쉬운 대안은 중간 입장이다. 여러 대안이 있어 도 결국 협상은 일대일의 대안 비교로 진행되기 때문에 다른 모든 대안과 일대일로 경쟁하여 더 큰 지지를 받는 대안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진다 는 것이다. 예컨대 A, B, C의 세 가지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A안을 지지하는 비율이 40%, B안과 C안은 각각 20%와 40%
를 얻고 있다고 하자. 만일 A안 지지자가 B안을 차선으로, C안을 최악의 대안으로 여기고, 또 C안 지지자는 B안을 차선으로, A안을 최악의 대안 으로 여긴다면, 최종적으로 채택될 대안은 B안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 면 B안은 A안과 일대일로 경쟁하면 B안 지지자(20%)와 C안 지지자 (40%)의 도움으로 60 : 40으로 승리하고, 또 B안이 C안과 일대일로 대결 하게 되면 B안 지지자(20%)와 A안 지지자(40%)의 지원으로 B안이 60 : 40 으로 승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델로 1991년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할 것이라고 예측한 연구도 남북한 동시 가입이 현상 유지를 포함한 어떤 대안과 경쟁해도 더 큰 지지를 얻기 때문에 남북한 동시 가입이 실현될 것으로 주장한 바 있다.34) 이에 따르면 1991년 당시 남북한 유엔 가입을 둘러싼 관련 6개국
32) median을 중간, 중앙, 중위 등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3국의 위치가 각각 0, 1, 10일 때 median 위치는 1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중위 또는 중앙 위치를 5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래서 median을 중간으로 번역하고자 한다.
33)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51) 남북 유엔 동시 가입,” 중앙선데이, 2016.09.18., p. 22.
의 입장을 <그림 Ⅲ-1>과 같이 이슈 스펙트럼 위에 표시하였다. 남한은
‘남한만 가입’을 가장 선호하며, 이것이 불가능하면 ‘남북한 동시가입’을 희망하고, ‘북한만 가입’이 성사되기보다는 차라리 남북한이 모두 가입 하지 못한 ‘현상 유지’가 낫다고 여긴다고 전제했다. 북한도 유엔에 자국 만 가입하는 것을 가장 선호하고, 그러지 못할 바에야 아무도 가입하지 않기를 원하며, 남한이 단독으로 가입하는 것을 최악으로 여긴다고 가정 했다.
그림 Ⅲ-1 남북한 유엔 가입에 대한 동북아 6개국의 입장
남한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북한 --- 남한만 가입 남북한 동시가입 현상 유지 북한만 가입
유엔 가입 이슈에서 각국이 행사할 영향력은 군사력 및 경제력에 바탕 을 둔 국력뿐 아니라 그 이슈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냐에 따라서도 결정 된다. 국력과 중요도는 가장 높은 점수를 100으로 두었다. 남한,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북한의 국력은 각각 15, 100, 40, 70, 60, 10으로 조사 되었고, 또 중요도(힘을 사용할 의지)는 각각 100%, 50%, 30%, 40%, 40%, 100%로 입력되었다. 즉 남북한 유엔 가입 관련 남한, 미국, 일본, 소련, 중국, 북한의 영향력은 국력과 중요도를 곱하여 각각 15, 50, 12, 28, 24, 10으로 계산되었다.
이제 대안 간 우열 관계를 살펴보자. ‘남북한 동시가입’의 대안은 ‘남한 만 가입’의 대안과 경쟁했을 때 일본+소련+중국+북한(12+28+24+10=74) 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남한+미국(15+50=65)의 지원을 받는 ‘남한만 가입’ 대안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렇게 계산해 보면, 영향력 분포에서 중
34) Bruce Bueno de Mesquita and Chae-Han Kim, “Prospects for a New Regional Order in Northeast Asia,” Korean Journal of Defense Analysis, vol. 3, no. 2 (1991), pp. 65~83.
간 입장인 ‘동시가입’ 대안이 어떤 다른 대안과 일대일로 경쟁해도 승리 하기 때문에 최종적인 협상 결과가 된다는 예측이었다.
남북한의 유엔 가입 시도가 있었던 1970년대에는 1990년대와 달리
‘남북한 동시가입’이 중간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시 가입이 성사되 지 못했다. 소련의 국력이 더 강했고, 또 소련과 중국의 입장이 ‘북한만 가입’ 쪽으로 더 기울었다. ‘현상 유지’ 즉 남북한 모두 정식 회원국이 되 지 못하고 옵서버 자격만 갖는 상황이 1970년대 영향력을 감안한 선호 분포의 중간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이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으로 바뀌게 된 것은 남북한의 새로운 합의보다 이해 관련국의 선호 변화에서 온 것이다.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Bruce Bueno de Mesquita)는 이 공간 모델로 북한 핵문제의 타결안을 검토했다.35) <그림 Ⅲ-2>는 북한 핵문제 에 대해 관련 입장을 일직선 위에 드러낸 것이다. 북한 정권은 다른 국가 에 비해 뚜렷한 선호를 갖고 있다. 북한 핵프로그램은 협상될 성질의 사 안이 아니고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인데, <그림 Ⅲ-2>에서 맨 오 른쪽(1.00)의 위치이다. 이와 가장 대비되는 극단적 입장(0)은 북한의 핵 시설을 파괴하고 비(非)군사 목적의 핵에너지 개발도 중단시키며 이를 검증한다는 조건에서 북한을 원조하자는 안이다. 두 극단적 입장 사이에 북한 핵무기 시설 파괴 및 민간 핵에너지 수용(0.16), 북한 핵무기 프로그 램 불능화 및 민간 핵에너지 수용(0.51),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 불능화 미성사(0.73), 현상태(0.89) 등의 다양한 결과들이 존재한다.
35)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세계정치론, pp. 123~128; 김재한, “부에노 데 메스키타의 북한문제 분석,” 통일문제연구, 제27권 제1호 (2015), pp. 301~303.
그림 Ⅲ-2 북한 핵 이슈에 대한 다양한 옵션
자료: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세계정치론, p. 117.
그림 Ⅲ-3 북한 핵 이슈 관련자들의 선호(2012년 기준)
자료: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세계정치론, p. 119.
<그림 Ⅲ-3>은 2012년 기준으로 미국의 공화당(0)과 대통령(0.20), 일본의 자민당(0.05)과 민주당(0.17), 한국 대통령(0.18), 러시아 대통 령(0.49), 중국(0.55), 북한 지도자(1.00) 등 주요 행위자들의 대북정책 선호를 일직선 위에 나타낸 것이다.
그림 Ⅲ-4 북한 핵 이슈에 대한 중간 입장의 추론
자료: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세계정치론, p. 125.
<그림 Ⅲ-4>는 북한 핵문제에 관한 각 행위자의 입장과 힘을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 중간 위치는 0.4이다. 그 왼편인 0.0, 0.1, 0.2이라는 입 장들의 힘 합계와 오른편인 0.5, 0.9, 1.0이라는 입장들의 힘 합계가 각 각 약 45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 0.4의 입장은 어떤 입장과 경쟁해도 패 배하지 않는 유리한 위치이다. 이 중간 위치는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을 불능화하고, 민간 핵에너지는 유엔의 완전한 감시 하에 수용하며, 한반 도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북한에게 경제 원조를 제공하는 내용이었다.
이 2012년 기준의 중간 위치는 북한의 버티기와 여타 국가의 방치로 현 재에는 그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오늘날 기준으로 다시 계산되어야 한다.
현 상황을 엄격히 반영하는 공간 모델은 어떻게 최종 결과를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중간 입장에 있는 국가나 집단을 움직일 수 있다면 중간 위치 역시 이동하기 때문에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그들이 바로 압력을 가하거나 설득할 대상이다. 그런 설득은 상대방 국익과 부합 한다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지, 그냥 애원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 위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