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강온 대외정책의 국내정치 동기
대북강경정책이 국내정치적 동기로 추진되면 속죄양가설(scapegoat hypothesis) 또는 전환이론(diversionary theory)으로 설명되고, 대 북유화정책이 국내정치적 동기로 추진되면 구조균형이론(theory of structural balance)으로 설명되기도 한다.14)
예로부터 위협적인 외부 세력을 강조함으로써 내부를 통솔하려는 정 치적 동기는 있어 왔다.15) 국내정치에서 어려움을 겪는 국가 지도자는 국내정치적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전쟁 위기나 도발이라는 희 생양을 조성할 동기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전환전쟁 또는 희생양/속죄 양 가설 등으로 불린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영국명 포클랜드(Falkland), 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Malvinas) 섬을 두고 소유권 분쟁을 겪었다. 영 국이 지배하고 있던 포클랜드를 1982년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이 탈환하 자 영국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는 전쟁을 선택했다. 1981년 말 25%에 불과했던 대처의 영국 내 지지율은 전쟁 이후 50%를 넘겼고, 대처는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정권 연장에 성공하여 1990년까지 총리직 을 유지했다.16)
북한의 대외정책도 대내적 위기에 따라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17) 또 남한의 국내정치나 선거에서도 북한의 도발이 정부 여당의 지지율을 올릴
14) 김재한, “남남갈등과 대북 강온정책,” pp. 121~128.
15) 김재한, “통일‧안보 정책의 정치화와 사드 배치 논란,” pp. 20~21.
16) 브루스 부에노 데 메스키타, 세계정치론(서울: 카오스북, 2015), pp. 230~231.
17) 김재한, “북한체제의 대내적 위기와 대외적 대응,” 통일연구논총, 제6권 제2호 (1997), pp. 61~80.
수 있기 때문에 정부 여당은 긴장을 부추긴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제13대 대선을 앞둔 1987년 11월의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제14대 대선을 앞둔 1992년 10월의 간첩단 사건 발표, 제15대 대선을 앞둔 1997년 10월 북한에게 무력시위를 요청했다는 이른바 총풍(銃風) 사건 등이 특히 진 보 진영에서 거론하는 대표적 사례이다.
부활(resurrection) 가설은 정권이 거의 와해 단계에 이르렀을 때 핵 무기 사용이나 그 사용 위협으로 정권이 부활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 으면 그렇게 실천한다는 것이다.18) 독재 정권일수록 권력을 잃게 되면 생존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부활을 위한 도박 가능성은 더욱 크다. 이는 국내정치적으로 불안정 요소를 지닌 북한 정권이 핵무기를 갖고 있으면 위험하다는 주장의 근거이기도 하다. 부활 가설에 따르면 이미 패망의 길로 들어선 정권의 입장에선 상대가 핵무기가 있든 없든 최후의 모험을 걸기는 마찬가지이다.
외부와의 경쟁은 권력을 공고히 할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을 와해시킬 수도 있다.19) 여기서는 외부 위협이 국내 안정을 가져다주는 측면을 살펴 보자. 그런 뜻을 담고 있는 동서고금의 문구는 많다. 손자병법 구지(九地) 편에 나오는 “서로 미워하는 오나라 사람과 월나라 사람이 같은 배를 타 서 풍랑을 만나게 되면 왼손과 오른손처럼 서로 구한다.”(夫吳人與越人 相惡也 當其同舟而濟過風 其相救也如左右手), 즉 오월동주(吳越同舟)는 그런 옛 문구의 예라 할 수 있다. 현대의 문구로는 국기집결(rally- round-the-flag) 현상이 있다. 미국 국민들이 대외 위기 시에 정부를 중심으로 뭉친다는 뜻이다.20)
18) George Downs and David Rocke, Optimal Imperfection?: Domestic Uncertainty and Institutions in International Relation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5), pp. 56~75.
19) 김재한, 정치마케팅의 전략(춘천: 한림대학교출판부, 2012), pp. 103~107;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4) 양날의 칼 ‘외부 위협’,” 중앙선데이, 2014.11.09., p. 28;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36계(서울: 아마존의 나비, 2016), pp. 267~274.
같은 우리 안에서 다른 개체와 서로 앙숙으로 싸우는 개나 곰은 더 강한 동물이 등장하면 서로 협력한다. 이는 인간사회에서도 관찰되는 보편적 인 현상이다. 여러 사회 실험에서 어려움 없이 함께 지냈던 집단보다, 어 려움을 함께 겪었던 집단이 서로 잘 협력했다.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정 치 싸움도 자의든 타의든 완화된다. 심지어 내부 이견으로 잘 나가지 못 하던 시위가 경찰의 출동·진압으로 일사분란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외부와의 전쟁은 설사 패배하더라도 그 책임을 경쟁자에게 돌릴 수 있 다면 권력 유지에 도움이 된다. 6․25 전쟁 후 김일성은 승리하지 못한 책 임을 박헌영과 남로당에 전가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렇지만 외부 와의 긴장관계로만 내부를 지배하는 전략은 영구적으로 사용하기 어렵 다. 한국 선거에서 북한 위협을 강조하여 정치적 이익을 얻는, 이른바 ‘북 풍 효과’도 과거처럼 크지는 않다.
국내정치적 이유로 대외강경책뿐 아니라 대외유화책도 나올 수 있다.
국내의 경쟁 정파가 특정 국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때 정부 여당 은 ‘적의 적은 친구’라는 관점에서 그 특정국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추 진하는 경향이 있다. 마찬가지 이유로, 정부 여당이 특정 국가에 대해 강 경 일변도의 적대적 태도를 보일 때 야권은 유화적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는 구조균형이론으로 불린다.21)
“‘적의 적은 친구’라는 경구는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말이다. 현대 심리 학에서는 인지(認知)가 부조화(不調和)될 때 바꾸기 쉬운 것을 바꿔 인지 가 조화되게 하는 경향으로 설명된다. 서로 친한 A와 B가 있을 때 I는 A와
20) John Mueller, War, Presidents, and Public Opinion (New York: John Wiley, 1973), pp. 208~213, pp. 245~247.
21) Dorwin Cartwright and Frank Harary, “Structural Balance: a Generalization of Heider’s Theory,” Psychological Review, vol. 63, no. 5 (1956), pp. 277~293;
Frank Harary, “A Structural Analysis of the Situation in the Middle East in 1956,”
Journal of Conflict Resolution, vol. 5, no. 2 (1961), pp. 167~178; Chae-Han Kim,
“Explaining Interstate Trust/Distrust in Triadic Relations,” International Interactions, vol. 33, no. 4 (2007), pp. 423~439.
B 모두를 친구로 여기거나 아니면 반대로 모두를 적으로 여겨야 I의 인지 는 조화된다. 만일 한쪽을 친구로, 나머지 다른 쪽을 적으로 여긴다면 이 는 ‘친구의 친구’를 적으로, 또 ‘적의 친구’를 친구로 여기는 꼴이다. 이런 인지 부조화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둘 다를 친구로 받아들이거나 아니 면 둘 다를 적대시한다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인 C와 D에 대해서는 어떨 까? C와 D 모두를 친구로 받아들이면 ‘친구의 적’이 친구가 되고, 그리고 모두를 적대시하면 ‘적의 적’ 또한 적이 된다. 이런 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C와 D 가운데 한쪽만 친구로, 다른 한쪽을 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이다. 그렇게 해야 ‘친구의 적’은 적, ‘적의 적’은 친구가 되기 때문이다.
친구가 될 가능성은 ‘적의 적’이 ‘친구의 적’ 혹은 ‘적의 친구’보다 더 높 다. 즉 위협적인 공동의 적을 둔 상대끼리는 자연스럽게 우호 관계가 형 성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적의 적’이 친구 될 가능성은 ‘친구의 친구’보 다 더 낮다.”22) 다만 어떤 분열기준이 더 강하느냐에 따라 주적이 정해진 다. 만일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이 더 밉다면 그 체제는 붕괴되기 쉽다.
실제 북한, 미국, 중국에 대한 정책에서 한국 내 경쟁 계층의 태도는 서로 반대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어 왔다. ‘적의 적은 친구’라는 무조건 정반대의 관계까지는 관찰되지 않더라도, 경쟁 정파가 비판하는 특정 대 북정책일수록 오히려 지지하는 태도를 보여 왔던 것이다.
나. 강온 대외정책의 위기관리 효과
유화 대응만으로 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화정책을 추진 하다 전쟁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로 알려진 대표적 인물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이다. 1938년 나치 독일이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거주 지역을 병합
22) 김재한, 정치마케팅의 전략, pp. 107~108;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36) 적의 적은 친구,” 중앙선데이, 2016.02.21., p. 28;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36계, pp. 91~92.
하려 하면서 전쟁 위기가 발생하자, 체임벌린은 협상을 주도하여23) 히틀러 (Adolf Hitler)의 요구를 뮌헨협정으로 수용했다. 뮌헨협정 체결 직후 체 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조금 양보하여 유럽을 전쟁의 위기에서 구한 영웅 으로 칭송되었다. 뮌헨협정으로 일부 영토를 잃게 된 체코슬로바키아와 영국 내 일부만이 체임벌린을 비판했을 뿐이다. 체임벌린은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선정되지는 못했다. 뮌헨협정의 서명자로는 체임 벌린뿐 아니라 프랑스 달라디에(Édouard Daladier), 이탈리아 무솔리 니(Benito Mussolini), 독일 히틀러도 있어서 공동 수상을 해야 했는데, 당시 독일은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법률로 금지하고 있었다. 독일의 군축 위반 사실을 폭로하여 정치범으로 수감 중인 오시에츠키(Carl von Ossietzky)가 1935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그의 노벨상 수상 은 독일인 전체에 대한 모독이라면서 히틀러가 내린 조치였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체임벌린의 유화적 리더십은 전쟁의 발발 원인 가운데 하나로 비판받기 시작했다. 사실 체임벌린이 전쟁을 무조건 피한 것은 아니었다. 1939년 독일에게 선전포고한 지도자는 다 름 아닌 체임벌린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먼저 선전포고를 했지만, 공격 보다는 독일을 봉쇄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실제 군사적 침공은 독일이 먼저 감행하였으며 프랑스는 한 달 반도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였다. 독일 을 응징하려면 일찍 했어야 하였는데, 독일에게 재무장 시간을 충분히 준 후에야 제재 국면에 들어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영국과 세계를 심각한 전쟁터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는 역설적으로 체임벌린이 너무 민주적이 어서 발생한 상황이다. 독일에게 양보, 선전포고, 비(非)전투적 봉쇄 등 을 결정했을 때 모두 국민 다수의 의견을 따른 것뿐이었다.
평화는 양보, 헌신, 봉사, 희생 등의 평화적 심성만으로 유지할 수 있는
23) 유화정책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따왔다. 김재한, “세상을 바꾼 전략 (53) 키신저와 체임벌린,” 중앙선데이, 2016.10.16., p.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