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집은 엄밀히 말해 사적 공간이지만 소유를 지향하지 않는다. 이 공간은 단체의 소유도, 심지어 매월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들의 소유도 아니다. 오히려 민중의 집은 자신만의 공간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공간을 이용할 기회를 제공해준다. 이는 다음 기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율과 협동의 원리로 모두가 함께 소유하는 ‘제2의 집’ 만들기 공간 나눔, 함께 소유하고 함께 쓰는 의미를 잘 살리기
(민중의 집 정기총회 자료집, 2012, 강조는 인용자)
즉, 이들에게 공간은 배타적인 독점과 배제, 그에 따른 경제적 이윤 추 구의 대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토지 시장에 편입되어 있지만, 공간이 생 산되고 소비되는 지배 구조를 자발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많은 단체와 개인이 민중의 집을 이용하지만 이들이 물리적 측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생산하는 경우는 드물다. 민중의 집의 내부 구조와 인테 리어는 대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의 집을 이용하는 동 안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충분하고 완전히’ 그리고 마치 ‘내 것처럼 편하게’ 공간을 향유한다. 공간을 이용하는 데에 있어 물리적 제 약은 있을 수 있지만44), 그 외에는 어떠한 인위적 제약도 가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술하였듯이 민중의 집은 특정한 공간 실천을 배제하거나 규 제하지 않는다. 연구자가 민중의 집에서의 수많은 공간 이용 사례들을
‘전유’, 특히 공간 공유를 강조하여 ‘공유적 전유’라고 해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는 공간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관되는데 이용자들 이 공통적으로 꼽은 민중의 집의 가장 큰 장점은 ‘편안함’이었다.
44) 마포 지역만 하더라도 최근 민중의 집보다 넓고 편의 시설이 잘 갖춰진 대 안 공간들이 곳곳에 생겨나고 있다. 실제로 민중의 집은 이용자들에게 종종 인근의 다른 공간을 소개하기도 한다.
규모는 작지만 다양한 단체와 여러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하여 실제로 는 큰 공간의 역할을 해내고 있어요. 이건 공간의 규칙 같은 것을 잘 정 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분위기와 문화를 잘 조성해 놓아서 가능해진 일이라고 생각해요. (공간 이용자 D)
일반인도 쉽게 빌려 쓸 수 있는 공간이고, 사무실이면서도 가정집 같은 분위기에요. (공간 이용자 E)
단순한 공간의 개방을 넘어 ‘거기에 누가 와서 무엇을 하는지’가 해명되 어야 한다는 김동완(2014)의 지적에 따라 아래에서는 민중의 집이 전유 되는 다양한 양상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림 17. 초창기 다정한 시장 (외부)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그림 18. 초창기 다정한 시장 (내부)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일례로 <그림 17>, <그림 18>45)은 초창기에 열렸던 ‘다정한 시장’을 보여준다. 다정한 시장은 공유 경제의 활성화와 친목 도모를 위해 기획 된 일종의 중고 장터인데 민중의 집 내부와 외부 마당에서 열렸다.46) 그
45) 모임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하여 민중의 집에서는 가급적 사진 촬영을 하 지 않았다. 구체적인 활동 모습은 민중의 집 홈페이지에 있는 자료들을 활용 하였다.
46) 다정한 시장은 점차 시들해져서 중단되었다가 현재는 망원동 주민센터 옆
러나 여기서의 ‘기획’은 권력의 매개(김동완, 2014)에 따른 동질화를 의도 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집에서 시장을 열고 사람들을 만나게 하 면 어떨까’라는 상상에서 구체적인 일정을 기획한 것은 민중의 집이지만, 실제로 다정한 시장은 자발적으로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채워졌기 때문이다. 다정한 시장에 참여한 사람들은 기존의 정형화된 공간 활용을 변형하는 창발적인 실천으로 새로운 공간성을 창출했다. 대부분의 벼룩 시장이 야외 넓은 곳에서 진행되는 것과 비교해볼 때 이는 매우 독특한 사례라 할 수 있다.
민중의 집은 또한 공부방 아이들이 전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방과 후 에 민중의 집을 찾은 아이들은 주로 큰방에서 활동을 하지만, 프로그램 에 따라 부엌, 거실, 심지어 옥상 등 다양한 공간을 이용한다. 연구자가 인터뷰를 위해 찾아갔던 날은 초등학교 3〜6학년 아이들 여섯 명이 놀이 를 하고 있었다. 공부방 아이들 역시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민중 의 집의 장점으로 꼽았다. 아이들은 연구자가 인터뷰한 사람들 중에서 공간에 대한 친밀도가 가장 높았는데, 이는 아이들이 민중의 집에 ‘다양 한 놀이 공간’이란 의미를 부여한 것과 관련 깊다.
그림 19. 토끼똥 공부방 발표회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그림 20. 토끼똥 공부방 수업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야외 공터에서 열리고 있다.
공부방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공간의 변화를 가장 민감하 게 느끼는 주체 역시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공간을 자주 사용하 는 데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공간에 대한 아이들의 애착이 크다 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저는 이곳의 변화를 다 알고 있어요. 3학년 때(2011년 3월, 즉 공간 이 전 직후)부터 다녔거든요. 지금 큰 방에 있는 이 짐들은 원래 작은 방에 있었어요. 그런데 올해 초에 작은 방을 이용할 수 없게 되면서, 짐들을 모두 큰 방으로 옮기게 됐죠. 그러면서 제약이 많아졌어요. 뛰지도 못하 고, 자리도 부족해지고, 공놀이도 어렵고요.
(공부방 학생 F)
민중의 집은 연간 60〜70여 개 단체가 이용하는 만큼 다양한 공간 실천 으로 가득하다. 2014년만 하더라도 외부 단체에서 주관한 각종 학습 프 로그램과 아직 거점을 마련하지 못한 단체들의 정기적인 모임 외에도 어 린 아이를 동반한 엄마들과 함께하는 육아 강좌, 기타 모임, 율동패 모 임, 글쓰기와 사진 모임, 각종 생활용품 만들기 모임, 건강과 다이어트를 위한 모임, 학부모 영어동화 모임, 반려견 행동 교육 강좌, 고양이 장난 감 만들기 모임, 양심적 병역 거부자 후원파티, 예배와 법회, 회원의 출 판기념회와 생일파티, 결혼식 피로연 등 공간을 필요로 하는 다양한 정 체성의 사람들이 이 공간을 전유했다(<그림 21> 참고).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을 이용하는 목적에 따라 이용자들이 민중의 집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새로운 공간성을 생산한다는 점이다.
즉, 민중의 집이란 공간은 고정되고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같은 ‘큰 방’
을 이용하더라도 공부방 아이들과 조각보를 만드는 아주머니들, 기타를 연주하는 청년들, 총파업을 준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방의 의미 는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들이 중첩되어 민중의 집 전체를 규정짓는다.
그림 21. 공간 나눔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그림 22. 화요 밥상 (출처: 민중의 집 홈페이지)
한편, 부엌과 주방은 사회운동 단체의 거점 공간이 지닌 딱딱한 이미지 를 허물고 민중의 집에서의 공간 실천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화요밥상(<그림 22> 참고), 할머니밥상, 요리 강좌와 같은 자체 프 로그램들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이용자들이 활동 중에 다과를 만들어 먹으며 자연스레 공간에 대한 친밀도를 높일 수 있었다. 또한 정 기적으로 이곳에서 밥상 모임을 갖는 단체와 공동으로 반찬이나 야식을 만들어 나눠 갖는 모임도 생겨났다.
이곳의 장점은 놀고, 먹고, 마시고, 뒤풀이까지 다 된다는 거예요.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딱 적절하죠. 그래서인지 대학생들도 알음알음 많이 찾 아와요. 소규모 워크숍도 많고요.
(현 사무국장 A)
또한 민중의 집의 공간 공유에서는 ‘숙박’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망원 동에 있던 시절에는 ‘집’이라는 친근함에다 편의 시설 등 숙박에 유리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물론 민중의 집에 머무른 사람들 중에는 민중의 집과 철학을 공유하는 진보 정당 및 사회운동 단체의 활동가들이 많다.
그러나 이 외에도 공정여행을 하는 대학생들, 청소년 여행 프로젝트팀, 제주도 곶자왈의 어린이들, 극단 연기자들, 각종 소모임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이 민중의 집에 머물렀다. 이는 성산동으로 이전한 후에도 계속된다. 대학 동아리와 총학생회, 미혼모 단체, 요양보 호사협회, 각 지역의 대안 학교, 청소년 독서 모임 등 많은 단체가 민중 의 집을 찾았다. 2014년에는 11월 말 기준으로 약 15개 단체가 숙박을 하였는데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숙박 횟수가 증가한 것이 눈 에 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이 자본주의 경제 논리를 넘어 전략적으로 공간을 나누고 공유한 결과, 민중의 집은 다양한 필요에 맞 게 전유되었다. 이를 통해 민중의 집은 결과적으로 이질적인 (heterogeneous) 행위와 행위자들, 다양한 정체성이 공존하는 복수의 공 간(김동완, 2014)이 되었다. 이는 곧 Lefebvre가 말한 차이의 공간이기도 하다.
제3절 효과
그렇다면 민중의 집의 이러한 ‘거점 공간의 경계 허물기와 공유적 전유 를 통한 탈영역화 전략’은 구체적으로 어떤 효과를 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