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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시대 한반도 안보딜레마와 핵문제

Korea I Korea I 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2. 냉전시대 한반도 안보딜레마와 핵문제

정전협정과 한미동맹을 구성요소로 하는 정전체제는 한반도 ‘안 보딜레마(security dilemma)’를 생산하는 기제였다. 정전협정 제60항

에 따른 제네바 정치회담이 결렬되면서 정전체제를 대체하는 평화

체제는 더 이상 한반도의 의제가 아니었다. 군비증강을 금지한 정전

협정 조항에 대한 위반은, 한반도를 ‘군비경쟁’을 통해 자신의 안보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행위가 상대방의 군사적 대응을 야기해 자신

의 안보이익을 감소시키는 ‘안보딜레마’가 일상화된 지역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88) 특히 한반도의 안보딜레마는, 식민시대에는 단일

한 실체였지만 탈식민(post-colonial) 시대에 두 개의 국가들로 분

단된 상태에서 하나의 국가 만들기, 즉 통일을 지향하고자 할 때,

전쟁과 같은 폭력적 방법으로 일방이 타방을 흡수하고자 하는 계기

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특이성이 있다.89) 또 다른 특이성은 한반

도 안보딜레마가 핵무기와 연계되었다는 점이다.

정전협정 조항의 무시는 한반도 안보딜레마를 생산한 첫 계기였

다. 정전협정 제2조 13항에는, “한 급 높은 정치회담을 진행하여 평

화적 해결을 달성하는 것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군사인원(ㄷ목),” “한국 경외로부터 증원하는 작전비행기,

88) Robert Jervis, “Cooperation under the Security Dilemma.” World Politics, vol.

30, no. 2 (1978), pp. 167~214; 함택영, 󰡔국가안보의 정치경제학󰡕(서울: 법문사, 1998) 참조.

89) 구갑우, “평창 ‘임시평화체제’의 형성 원인과 전개: 한반도 안보딜레마와 한국의 ‘삼

장갑차량, 무기 및 탄약(ㄹ목)”의 반입을 금지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정전협정 제13항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 즉 정전체제를 평화

체제로 대체하기 위해서 군사력과 무기의 증강이 있어서는 안 된다

는 문제의식의 소산이었다.90) 정전협정 제13항의 이행을 감시하는

기구가 유엔군이 지정한 스위스와 스웨덴, 북중이 지명한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4개국으로 구성된 ‘중립국감독위원회(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였다. 1954년 즈음에 이르러, 중립국감독위원회가 사실상 감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정전협정 제13항은 무력화되었다. 1957년 6월 유엔군 사령부는 정

전협정을 관리하는 군사정전위원회에서 “향후부터 남한으로의 군수

물자 도입 금지 조항을 무시할 것이며, 제8군과 한국 육군의 증강을

추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91) 사실상 정접협정 제13항 ㄹ목의 폐기 였다.

북한은 ‘미국과 한국’의 정전협정 제13항 ㄹ목을 일방적 포기를 언

급하면서, 정전을 “공고한 평화”로 전환시키기 위해 정전협정 제60항

에 따른 미군과 중국군이란 외국군대의 철수를 다시금 주장했다. 남

한이 “미국의 원자 기지”로 되어 가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였다.92)

북한은 1956년 3월 ‘정부의 성명’을 통해 남북한의 불가침 선언이

필요함을 언급하며 병력 8만 명을 축소했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그

리고 정전협정 제13항 ㄹ목의 폐기선언 이후인 1957년 9월에는 최

90) 북한은 이 조항도 “우리측”으로 표현한 북중의 제안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강근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외관계사 1󰡕, p. 141.

91)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 _id=E0006635> (검색일: 2018.10.4.); 서주석, “한반도 정전체제와 유엔군사령부,”

󰡔통일시론󰡕, 통권 9호 (2001), p. 107; 1957년 7월에는 일본 도쿄에 위치해 있던 유 엔군 사령부가 서울로 이전했고, 도쿄에는 유엔사 후방기지가 창설되었다. 설인효,

󰡔유엔사의 어제와 오늘: 유엔군사령부의 역사적 전개과정 및 평화체제 이행시의 주 요 문제,” 󰡔군사󰡕, 제108호 (2018), pp. 11~12.

92)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58󰡕(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8), pp. 78~79.

고인민회의를 통해 남북한의 병력을 10만 명 혹은 그 이하로 줄이자

는 군축제안을 했다.93) 한국전쟁에 참전한 북한 측 외국 군대인 중

국인민지원군 철수가 북중소 사이에 논의되고 있던 시점이었다.94) 한미동맹이 강화되고 있음에도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가 논의된 이유는,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이었던 펑더화이가 소련의 미코얀

(A. Mikoyan)과 함께 1956년 9월 김일성 정권을 제거하기 위해 내

정간섭을 했던 사건과 연관되어 있었다.95) 더불어 1956년 11월 소

련이 헝가리사태에 군사적 개입을 통해 정권을 붕괴시키는 것을 보

며, 북한은 중국군을 위협으로 느꼈을 것이다. 1958년 2월 남한에서

의 미군철수에 대한 압력수단이란 명분으로 중국이 제안하고 북한

이 수용하는 방식으로 중국인민지원군 철수가 결정되었고, 북한은

정반대로 1958년 2월 자신들이 제의하고 중국이 동의했다고 기록하

고 있지만,96) 1958년 3월부터 중국인민지원군은 북한에서 단계적

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1958년 1월의 시점에서 북한군은 약 33만

명이었고, 남한군은 약 61만 명이었다.97)

북한에서 군축담론이 전개되고 중국군 철수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미국의 행동은, 정전협정 13항 ㄹ목을 사실상 사문으로 만들며 남한

93)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57󰡕(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7), pp. 19~20.

94) 중국인민군 철수와 관련하여서는 다음 참조. 한상준, “중국인민지원군 단독철군 제 재론,” 󰡔동양사학연구󰡕, 제142집 (2018), pp. 287~317; 이종석, 󰡔북한 주둔 중국 인민지원군 철수에 관한 연구󰡕(성남: 세종연구소, 2001), pp. 1~49; 한상준, “중국 인민지원군 철군의 원인과 중‧북 관계,” 󰡔아태연구󰡕, 제19권 2호 (2012), pp. 5~39.

북한과 중국 가운데 어느 편이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를 요구했는가가 쟁점 가운데 하나다.

95) 와다 하루끼 지음, 남기정 옮김, 󰡔북한현대사󰡕(파주: 창비, 2014), pp. 130~133.

96) 북한은 1958년 2월 5일 ‘정부 성명’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동시 철거, 중립국감시 의 총선거, 남북의 경제, 문화교류, 군축 등을 자신들이 언급하고, 2월 19일 북한의 김일성 수상과 중국의 주은래 총리가 서명한 북중 공동성명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의 철수가 합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59󰡕(평 양: 조선중앙통신사, 1959), pp. 55~58.

에 핵지뢰, 핵포탄, 전폭기 탑재용 핵무기 등의 전술핵무기와 핵무

기 운반체인 미사일을 배치하는 것이었다. 유럽과 동아시아에서 소

련의 재래식무기가 가하는 위협을 “저비용 고효율”의 핵무기를 통해

억지하겠다는 전략이었다.98)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은 1958년 3월 중국인민지원군 환송대회에서 미국이 남한에 원자 및 로케트 무기

를 반입하고 있음을 지적하기도 했다.99) 당시 핵개발을 할 능력을

결여하고 있던 북한은, 1961년 7월 소련, 중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

면서 사실상의 핵우산을 제공받는 방식으로 ‘균형맞추기(balancing)’

를 시도했고, ‘국제제도’로서 평화지대 건설이란 대안을 제시했다.

평화지대는, “핵 및 로케트 무기가 없는 지역”으로 지역 내 인민들의 반제연대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었다. 주한미군

의 철수 및 남북한 군대를 각각 10만 명 또는 그 이하로 축소하자는

‘군축’도 1962년 후반 북한이 다시금 제기한 의제였다. 그러나 소련

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북한은 1962년 12월부터 경제와 국방의 동

시적 발전을 도모하는 이른바 ‘병진로선’을 선택하게 된다. 핵우산을

대체하는 국방력 강화의 결정이었다. 1963년 8월 미영소가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합의하자 북한은 핵확산금지가 중국을 비롯한 사 회주의국가의 핵보유를 막기 위한 조처인 것으로 해석했다. 1964년

10월 중국의 핵실험을 북한은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중국이 제공할

핵우산을 염두에 둔 북한의 반응이었다.100)

한반도 핵문제의 또 다른 발흥은 남한 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시도

였다.101) 북한은 1960년대 후반 남한과 미국에 대한 군사적 도발을

98)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핵무장국가 북한과 세계의 선택󰡕 (파주: 한길사, 2018), pp. 175~181.

99)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59󰡕, pp. 10~11.

100) 구갑우, “북한 ‘핵 담론’의 원형과 마음체계, 1947-1964년,” 󰡔현대북한연구󰡕, 제17 권 1호 (2014), pp. 197~250.

101) 자세한 내용은 다음 참조.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pp. 181~192.

감행하던 시점이었다. 북한은 1968년 1월 청와대 습격사건을 일으 켰고 미군 정찰함인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다. 1969년 4월에는 미군

정찰기인 EC-121을 격추했다. 이 와중에 미군기지가 있는 오키나와

의 일본으로의 반환이 논의되기 시작하자 박정희 정부는 제주도를

대체 미군 핵기지로 만들어 1969년 1월의 닉슨독트린에 따른 주한미

군의 감축계획을 막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을 포위하기 위해 중국과

의 관계개선을 도모하고 있던 미국은 박정희 정부의 제안을 수용하

지 않았다. 결국 박정희 정부는 독자적 핵무장을 시도했고, 미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다시금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선택을 했다. 미국

은 남한에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남한에 대한

핵우산 제공 의지를 다시금 밝혔으며, 1976년부터는 대규모 한미연

합군사훈련을 정례화했다. 남한의 핵개발 시도는 1979년 10월 박정

희정권의 붕괴와 함께 무산되었다.

남한의 핵개발 시도와 한미동맹의 강화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미

중 데탕트 속에서 중국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으며 평화협정을

의제화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푸에블로호 나포사건 발생 5일 후에

“미제국주의의 무분별한 도발”을 비난하며 북한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02) 미중대화에서 중국은 1958년 중국군이 북한에서 철수

했음을 상기시키며 주한미군의 철수를 의제화하기도 했다. 그럼에

도 미중이 한반도문제를 거래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북한

을 위해 군사적 지원을 결정했다.103) 다른 한편, 북한은 정전협정을

102)소련의 즉각적인 지지성명과 달리 5일의 지체를 당시 북중관계의 악화에서 찾는 견 해도 있다. 푸에블호 나포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중국이 북한을 ‘수정주의’로 비난 하면서 서로 대사를 소환할 정도로 북중관계가 좋지 않았던 시기였다. 최명해, 󰡔중 북한 동맹관계: 불편한 동거의 역사󰡕(서울: 오름, 2009), 제3장 참조.

103) Yafeng Xia and Zhihua Shen, “China’s Last Ally: Beijing’s Policy toward North Korea during the U.S.-China Rapprochement, 1970-1975,” Diplomati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