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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냉전시대 한반도 안보딜레마와 핵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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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탈냉전시대 한반도 안보딜레마와 핵문제

냉전시대에는 한반도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시키는 협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화협정은 북한의 의제였고, 이 의제를 논의하

110) 북한은 1975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두 결의안이 통과되었음을 언급하지 않고, “유엔 총회 제30차회의에서《조선에서 정전을 공고한 평화에로 전환시키며 조선의 자주 적통일을 촉진시키는데 유리한 조건을 조성할데 대하여》라는 우리측 제안이 압도적 다수의 찬성으로 채택된것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우리 공화국 의 줄기찬 투쟁의 결과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용국, “조선반도에서의 평화체제 구축,” pp. 1~9.

111) 자세한 내용은, 최영진심세현, “‘위기’에서 ‘생성’으로: 한미연합군사령부 형성과 정에 대한 연구,” 󰡔전략연구󰡕, 제15권 3호 (2008), pp. 182~215 참조.

는 대화의 장은 마련되지 않았다. 유엔사는 1975년 유엔총회에서 해

체 결의안이 채택된 이후 한미연합사가 만들어지면서 정전협정만을

관리하는 성격전환이 이루어졌고, 그 결과 정전체제의 한 구성요소

인 한미동맹의 형태변환이 발생했다. 그러나 주한미군사령관이 유

엔사령관과 한미연합사령관을 겸임했기 때문에 사실상 유엔사의 성

격전환도 정전체제의 근본적 변화를 초래한 요인은 아니었다. 미국

발 핵문제는 한반도 안보딜레마를 가중하는 효과를 발휘했고, 한국

발 핵문제는 한미갈등을 거쳐 한미동맹의 강화를 결과했다. 비핵화,

평화체제, 한미동맹의 공존에 대한 문제제기, 즉 이 셋이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를 형성하게 되는 트릴레마는 탈냉전 시대에 북한발 핵문제가 발생하면서 작동하게 된다.

1988년 10월 노태우 정부가 유엔총회에서 한반도 평화체제를 의

제화한 이후, 같은 해 12월 베이징에서 북한과 미국의 외교적 접촉

이 시작되었다. 1990년 4월 미국정부가 ‘동아시아전략구상’을 발표

하면서 주한미군의 감축안을 제안하자 노태우 정부는 북한의 위협

이 해소된다면 동의할 수 있음을 밝혔다. 1991년 9월 미국은 남한에

배치된 전술핵의 철수를 선언했고, 10월 한미는 전술핵 철수에 합의

했다. 그리고 11월에는 한국발 핵문제의 대체물로 시작된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중단을 결정했다. 12월 남북한은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합의하면서, “정전상태”를

“공고한 평화상태”로 만들 때까지 정전협정을 준수할 것을 약속했

다. 그리고 남북한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에도 합의했다. 1992년

1월 북한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핵안전협정에 서명했고, 북한

과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최고위급 회담을 뉴욕에서 개최했다. 정전

체제의 평화체제로의 이행을 담은 탈냉전시대 ‘한반도 평화과정’의

시작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건들의 연쇄였다.

그러나 탈냉전과 더불어 시작된 한반도 평화과정은 시작과 함께

좌초했다. 비교평화과정 연구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평화과정은 신

뢰에 기반한 협상, 주요 분쟁당사자들의 참여, 분쟁의 핵심사항을 다루려는 의지, 무력사용의 부정, 합의의 지속적 준수 등과 같은 본 질적 요소를 필요로 한다.112) 그러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 반의 한반도 평화과정은 이 요소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91년

11월 한미는 북한의 핵무기개발에 대한 우려를 이유로 주한미군 감

축계획을 철회했다. 남한은 1990년 소련과 1992년 중국과 수교했지

만, 북한은 미국, 일본과 수교를 하지 못했다. 평화과정의 출발선에

서 상호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갈등을 해결하려는 적극적 시도

를 담은 평화과정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에 대해 완전한 승리를

거두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할 때 작동한다.

한반도 평화과정의 좌초와 함께 발생한 문제가 한반도에서 발생

한 (비유적으로) 세 번째 핵문제라고 할 수 있는 북한발 핵위기였다.

제1차 핵위기가 북한의 핵시설과 경수로의 교환 그리고 북미관계 정상 화의 내용을 담은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합의로 봉합되는 과정에 서, 1993년 3월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on-Proliferation Treaty:

NPT)을 탈퇴했고, 1993년 4월에서 1995년 2월에 걸쳐 중립국감독

위원회에서 체코와 폴란드 대표단을 군사정전위원회에서 중국대표 단을 철수시켰다.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면서 동시에 “정전협정을 평 화협정으로 바꾸고 현 정전기구를 대신하는 평화보장체계”의 수립

을 위한 협상을 미국에 제안했다.113) 1994년 5월에는 이른바 ‘조선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했다. 1994년 6월에는 한반도 전쟁위

기까지 발생했다. 1995년 6월에는 유엔사 해체를 다시금 의제화했

112) J. Tonge, Comparative Peace Processes (Cambridge: Polity, 2014), pp. 5~29.

113) 조선중앙통신사 편, 󰡔조선중앙년감 1995󰡕(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95), p. 238.

고, 1996년 2월에는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의 수립을 위한 협상을 다

시금 미국에 제안했다. 핵심 내용은 평화협정 체결 이전에 정전협정

을 대신할 “잠정협정”을 체결하고,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체하는 북미

군사공동기구를 만들자는 것이었다.114)

정전협정 제4조 60항에 따른 1954년 제네바정치회담 이후 처음으

로 1997년 12월부터 1999년 8월까지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남북미중

이 한반도 평화체제를 논의하는 4자회담이 개최되었다.115) 이 다자

대화에서도 예상되었던 것처럼, 의제설정 자체가 쟁점이었다.116)

남한은 ‘한반도 평화체제’와 ‘군사적 긴장완화 및 신뢰구축’을, 북한

은 ‘주한미군 철수’와 ‘북미평화협정’을 의제로 설정하고자 했다. 결

국, ‘평화체제 구축 분과위’와 ‘긴장완화 분과위’가 설치되었고, 북한

114) “미국은 우리의 새로운 평화보장체계수립을 위한 제안에 긍정적으로 응해나와야 할

것이다,” 󰡔로동신문󰡕, 1996.2.23.

115) 4자회담이 열리게 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국가가 참여하는가가 첫 번째 쟁점이었다. 북한은, 1979년 7월 한미가 제안한 남북미 3자회담을 북미대화와 남북 대화를 분리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했지만, 1984년 1월 입장을 바꾸어 남북미 3자 회담을 제안할 때, 남한은 “군통수권과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제한적 당사자이고, 중국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을 철수했고 한반도 위기에 책임이 없기 때문에 당사자가 아니라는 입장을 밝힌 바 있고, 4자회담과 관련하여서도 이 주장을 반복했다. 당사자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은 공제민, 󰡔고려민주련방공화국 창 립방안󰡕(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9), pp. 106~118 참조; 1983년 후반 중국은 남 북미 3자회담을 중국의 베이징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한 바 있었다. 중국이 한국전쟁 이후 한국을 실질적 당사자로 인정한 제안이었다. 최명해, 󰡔중국북한 동맹관계󰡕, 5장; 반면, 남북미 3자회담을 제안했던 한미는 북한의 3자회담 제안이 북미대화를 중심으로 남북대화가 보조하는 형태라 해석하고 역으로 남북미에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을 제안한 바 있다. 결국 북한은 남북미 사전 협의 이후 중국이 참여하는 3+1 형식의 회담을 수용했다. 1997년 10월 미중정상회담에서는 다시금 북한에게

4자회담에 참여하라는 압박이 있었다. 탈냉전시대, 미중관계와 한반도문제의 연계

였다. 결국 북한은 4자회담 본회담에 참여하게 된다. 구갑우, “탈식민‧탈패권탈분 단의 한반도 평화체제,” 이병천윤홍식구갑우 엮음, 󰡔안보개발국가를 넘어 평화 복지국가로󰡕 (서울: 사회평론, 2016), pp. 163~164.

116) 4자회담과 관련한 내용은, 박영호, “4자회담의 전개과정과 평가,” 김학성 외, 󰡔한반 도 평화전략󰡕(서울: 통일연구원, 2000); 김용호, “대북정책과 국제관계이론: 4자회 담과 햇볕정책을 중심으로 한 비판적 고찰,” 󰡔국제정치논총󰡕, 제36권 3호 (2002), pp. 135~153; 구갑우, “탈식민‧탈패권탈분단의 한반도 평화체제,” pp. 164~165 참

이 주장한 의제는 분과위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절충이 이루어졌다.

이 절충은 4자회담에 참여하는 주체들의 평화협정 당사자 문제에 대

한 동상이몽의 결과였다. 남한은 탈냉전‧민주화 이후 평화체제를 의제화하면서 ‘남북’이 주도하고 미중이 동의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반면, 북한은 ‘북미’를 중심에 두는 북미평화협정을 생각하고 있었

다. 미국은 북미보다는 ‘남북’을 우선했고,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보하기 위해 북미보다는 ‘남북’이 중심이 되

는 평화체제를 선호했다.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하여서도 한미

는 주한미군이 정전협정과는 무관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른 주둔

이기 때문에 4자회담과는 무관하다는 입장이었던 반면, 북한은 긴

장완화를 위한 ‘근본문제’로 주한미군의 철수를 제기했다. 중국은 한

편으로는 쉬운 것에서부터 어려운 것으로 나아가자는 이른바 선이

후난(先易後難)의 한미의 입장을 지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북

미관계 개선과 같은 의제를 상정하면서 북한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

도를 보였다.

4자회담과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탈냉전시대에 두

번째 한반도 평화과정이 재개되었다. 2000년 7월 아세안지역포럼 (ASEAN Regional Forum: ARF)에서 북미 간에 첫 외무장관 회담

이 개최되었다. 2000년 10월에는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

위원장이 미국을 방문했고, 그 결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미합중국 간의 공동 코뮤니케’가 만들어졌다. 서로의 적대적 관계를

종결하는 선언을 첫 중대 조치로 명기한 이 공동 코뮤니케의 주요

내용은, 북미관계의 전면적 개선, 정전협정의 평화보장체계로의 전

환, 자주권의 상호 존중 및 내정불간섭, 호혜적인 경제협조와 교류,

북한의 미사일 실험 유예, 한반도의 비핵‧평화, 미국의 대북 인도적

지원, 반테러 협력, 남북관계의 진전에 대한 미국의 협력 등이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