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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I Korea I nstitute for National Unification

1. 정전체제의 기원

1950년 6월 25일 발발하고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이 이루어

진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남북의 ‘내전’이자 미군과 유엔군 그리고 중

국군이 개입한 ‘국제전’이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이 전쟁의

이름을 남북미중은 ‘한국전쟁(Korean War)’ 또는 ‘조선전쟁’으로 공

유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북한과 중국은 미국의 한반도 개입에 맞

선 ‘조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抗美援助戰爭)’이란 의미규정을

하고 있다.58) 일본의 연구자 와다 하루끼(和田春樹)는 원제 󰡔朝鮮戰

爭󰡕이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전쟁을 남북한‧소련‧미국‧일

본‧중국이 관련된 ‘동북아시아 전쟁’으로 규정하기도 한다.59)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 25일 미국은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North Korea)’의 적대행위 즉각 중단 및 38도선 이북으로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 제82호를, 27일 에는 북한이 적대행위의 중단과 38도선으로 군사력의 철수를 하지

않자 국제 평화와 안보를 회복하기 위해 유엔 회원국에게 ‘대한민국

(Republic of Korea)’에 필요한 군사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권고하

는 결의안 제83호를 채택했다.60) 6월 30일 미국은 유엔안보리 결의

58) 한국전쟁의 이름은 아래의 책 제목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브루스 커밍스 지음, 김주 환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上󰡕(서울: 청사, 1986);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 원 I󰡕(서울: 나남출판, 1996); 오혜경최광철황택선, 󰡔죄악에 찬 미제의 조선침략 사󰡕(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10); 홍학지, 󰡔항미원조전쟁을 회억하여󰡕(연길: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8). 한국정부의 법률용어로는 그리고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의 간행물들에는 ‘6.25 전쟁’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한국전쟁이란 표현에 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정치적 동기”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비판도 있다. 김명섭, “전쟁명명의 정치학: ‘아시아‧태평양전쟁’과 ‘625 전쟁’,”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0권 2호 (2009), pp. 71~98. 1950년 6월 발발한 전쟁의 명칭을 둘러싼 ‘전쟁’은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59) 와다 하루끼 지음, 서동만 옮김, 󰡔한국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9), p. 7.

60)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 만들어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Security Council

안에 근거하여 미군을 한반도에 파견했다.61) 1949년 6월 제2차 세

계대전 동안 진주했던 남한 주둔 미군의 철수를 완료했던 미국이 다

시금 한반도에 군사적 개입을 시작한 것이다. 7월 7일 유엔안보리

결의안 제84호에서는 유엔 회원국이 한국에 파견하는 군대를 미국

정부하의 ‘통합사령부(unified command)’에 배속할 것을 권고하면

서 각국의 기와 더불어 유엔기를 사용할 수 있음을 허가했다. 7월

25일 미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유엔군 사령부’가 수립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62) 즉 1950년 1월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동아

시아에서 알류산열도‧일본 본토‧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을 미

국의 ‘불퇴(不退)의 방위선’으로 설정하고 한반도와 대만을 그 밖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63) 미국은 한국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유엔을 매개로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재개했다.

또 다른 외부세력인 중국은 10월 한국군과 미군이 당시 한반도의

분단선인 38도선을 넘자 준비하고 있던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64) 10월 8일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毛澤東)

Resolution)은<http://www.un.org/en/sc/documents/resolutions/1950.shtml>

(검색일: 2018.9.3.) 참조. 소련은 유엔안보리에서 대만을 대신해 중국이 상임이사국 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보리 회의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

61)와다 하루끼, 󰡔한국전쟁󰡕, p. 163.

62) 정태욱, 󰡔한반도 평화와 북한인권󰡕(파주: 한울, 2009), pp. 117~146. “유엔사는 군 사적으로는 유엔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정치적 차원에서도 유엔은 단지 미국에 통합사령부가 행한 것에 관한 보고를 요청했을 뿐이며, 이러한 보고도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성질의 것”이라는 것이 󰡔한반도 평화와 북한인권󰡕의 주장이다. 현재 기능 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부의 미래와 관련하여 국제법적 쟁점을 제기하는 진술이다.

미국은 유엔을 통해 집단안전보장을 실현할 수 있는 유엔군을 건설하고자 했으나 1950 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만들어진 유엔군이 미군을 중심으로 한 독자성과 통합성을 가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손경호, “625전쟁 시기 형성된 유엔군의 성격 분석,” 󰡔국제정치논총󰡕, 제58권 3호 (2018), pp. 137~168 참조. 유엔사의 성격을 둘 러싼 국내의 국제법적 논쟁은, 노동영, “한국문제에서 유엔사의 지위와 역할,” 󰡔국방 연구󰡕, 제60권 4호 (2017), pp. 56~58 참조. 북한과 중국도 유엔군 및 유엔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자신과 함께 파병을 지지했던 펑더 화이(彭德懷)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출병 결정을 내렸다.65) 소련의 스탈린(J. Stalin)은 중국에 한국전 쟁에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66) 소련도 한국전쟁에 공군을 파견

했지만, 소련 공군은 중국 비행사 제복을 입고 북한의 표식이 달린

전투기로 출격했다고 한다.67) 1949년 10월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

은 한반도가 미국의 관할권하에 놓일 때, 자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북한에 대한 지원과 미국과의 전쟁이 불가

피하다고 생각한 중국지도부의 결정이었다. 즉 중국혁명의 연장선

상에서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했다.68) 북한은 1940년대 중반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싸울 때, 자신들이 중국공산 당을 지원한 대가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69)

64) 김명섭, 󰡔전쟁과 평화: 6.25전쟁과 정전체제의 탄생󰡕(서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5), pp. 141~148.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채택된 유엔안보리 결의안에는 북한군의 38도 선 이북으로의 철수만을 명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엔군이 38도선을 넘는 것에 대해 서는 또 다른 정당화가 필요했다. 1950년 10월 7일 한국의 통일, 독립, 민주를 언급 한 유엔총회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http://www.un.org/en/ga/search/view_doc.

asp?symbol=A/RES/376(V)> (검색일: 2018.10.4.) 참조.

65) 펑더화이 지음, 이영민 옮김, 󰡔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서울: 앨피, 2018), pp.

423~425. 펑더화이는, 중앙위원회에서 “만약 미군이 압록강변과 대만에 배치되면 침략전쟁을 일으킬” 것이라 발언했다고 한다.

66)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한반도의 무력통일을 문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스탈린은 남침에 반대했다. 스탈린이 제시한 이유는, 북한 군의 열세, 미군의 주둔, 미소의 38선에 대한 합의였다.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 pp. 96~98. 한 일본저자에 따르면, 김일성과 박헌영이 무력통일 구상을 타진한 시점은 1949년 8월이다. 시모토마이 노부오 지음, 이종국 옮김, 󰡔모스크바와 김일성: 냉전기의 북한 1945-1961󰡕(서울: 논형, 2012), p. 90. 1949년 3월 김일성 은 소련을 방문했을 때, 비밀군사협정을 체결했고 그에 의거하여 소련의 무기를 받는 대가로 금과 쌀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소련의 무기공여는 원조가 아니라 사업이었 다는 평가다. 기무라 미쓰히코아베 게이지 지음, 차문석박정진 옮김, 󰡔전쟁이 만 든 나라, 북한의 군사 공업화󰡕(서울: 미지북스, 2009), 9장.

67)펑더화이는, “공군의 엄호가 전혀 없는 가운데 후방 근무 공작을 펼친 것은 귀중한 경험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펑더화이, 󰡔나, 펑더화이에 대하여 쓰다󰡕, p. 432.

68) 와다 하루끼, 󰡔한국전쟁󰡕, pp. 43~52.

미국은 1950년 7월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이양받았고, 중국은

참전한 이후 북한 내 연안파 공산주의자였던 박일우를 부사령원 겸

정치위원에 임명하면서 사실상 김일성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했고,

이 조치는 1950년 12월 실질은 중국인민지원군 사령부이지만 형식

적으로는 중조연합사령부(中朝聯合司令部)의 설치로 제도화되었

다.70) 따라서 전쟁 중에 시작된 정전협상의 실질 주체는 미국과 중

국이었다. 한국전쟁이 38도선에서 교착이 이루어질 즈음인 1951년

6월 ‘북중소’는 정전협상에 대한 합의를 했고, 6월 23일 소련은 미국

에 정전교섭을 제안했다. 미국은 1951년 5월 31일에 정전의지를 소

련에 전달했다고 한다. 중국인민지원군 부사령원 홍학지는 1951년

6월 30일 유엔군 총사령관 리지웨이(M. Ridgway)가 공식적으로 정

전회담을 제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71) 북중소와 미국이 정전협상

의 개시에 동의했을 즈음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전쟁의 주체로서 유

일하게 정전협상에 반대했다. 전쟁을 중단하는 정전으로 분단된 한

반도는 “민주주의로 통일되거나 공산주의로 통일”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남한정부의 정전협상에 대한 반대논리였다.72)

남한정부의 북진통일론은 1951년 7월 10일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2년여의 기간 동안 진행된 정전협상에서 정전협정의 주체 또는

당사자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정부의 정전협상 반대와

관련하여 가장 극적인 사건은 남한정부가 1953년 6월 17일 심야부

터 18일 아침까지 ‘조선인’/‘반공’ 포로 2만 5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

69) 길재준리상전, 󰡔중국 동북해방전쟁을 도와󰡕 (평양: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8), pp. 1~318 참조.

70) 와다 하루끼, 󰡔한국전쟁󰡕, pp. 199~219.

71)홍학지, 󰡔항미원조전쟁을 회억하여󰡕, p. 284. 홍학지는 정전협상의 시작과 관련된 장을, “전쟁은 종래로 고립된 군사적행동이 아니라 언제나 외교적투쟁과 긴밀하게 결합된다”라는 진술로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