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북한 주민들의 교육수준은 매우 낮았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기간 내내 조선인의 교육기회를 제한하였다. 결과적으로 해방 직 후에 높은 비문해율과 기술인력의 절대적인 부족은 교육 부문에서 해결해야 할 주요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해방 후 북한 지역의 비문해
율은 60%에 달하였다.20 “모든 근로인민을 문맹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반봉건 혁명’의 주요 과업인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 수행 과 산업 건설을 위한 토대가 되는 것이었다.
해방 후 ‘민주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교육개혁을 통해 노동인 력 개발의 기초가 다져졌다. 1946년에 공표된 ‘20개조 정강’에는 교 육개혁의 방향으로 의무교육제 실시와 국가가 경영하는 학교의 확장, 국가 및 경제 건설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한 학교의 설치를 명시하 였다. 이에 따라 성인들에 대한 집중적인 문해교육을 실시하였고, 국 가가 전적으로 관리하는 교육체제를 구축하였으며, 고등교육기관을 설치하여 국가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을 양성하였다.
해방 직후에 지식인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다양한 기관에서 산발 적으로 실시하였던 문해교육은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설립되고 교육국에 성인교육부가 설치됨에 따라 국가 주도의 계획적 교육으로 전환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문맹자 전국 일제조 사’를 실시하고, 이를 토대로 하여 1949년 3월에 이르기까지 3년의
20장종식, “북조선 교육의 당면과제,” 인민, 11호 (1946); 이향규, 「북한사회주의 보통교육의 형성: 1945-195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p. 63에서 재인 용. 이 수치에 관해서는 이견이 존재한다. 이향규에 따르면, 또 다른 자료(조선중
앙년감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0))에서 밝힌 비문해자수 230만 명을 당시 인
구에 대입하여 계산해 보면 비문해율은 42%로 계산된다.
기간에 세 차례의 집중적인 농한기 ‘문맹퇴치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는 단순히 글자를 깨우치는 교육이 아니라 일제 잔재 청산과 사회주 의국가 건설에 전 주민을 동원하는 전사회적 운동의 일환으로 실시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3월에 북한은 ‘문맹퇴치’가 완결되었음을 선 포하고, 이후 초등교육 이수 수준의 기초성인교육 체계의 구축을 위 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교육기회의 전면적인 확대와 분배가 이루어졌다.
식민지시기 간이 실용학교 중심의 비체계적인 학제는 보통교육 중심 의 초․중․고등교육의 체계적인 연계를 갖춘 학제로 개편되었다.
관․공립학교를 국유화하고 사립학교는 국가의 관리체계 하에 편입 하고 점진적으로 청산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21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과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것 또한 이 시기 노동인력 양성에 있어 핵심적 과제였다. 해방 직후 북한의 교육 은 초등교육부터 고등교육과 성인교육에 이르기까지 양적, 질적으로 열악한 상황이었으며, 이는 고등교육기관으로 갈수록 더욱 심각하였 다. 이러한 문제는 초급기술인력 양성을 중심으로 하였던 일제 식민 지기 교육 정책의 결과였다.22
전문기술인력 및 양성기관의 부족은 국가건설 과정에서 우선적으 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였다. 해방 후 북한에는 단 하나의 대학도 없 었으며, 자연과학과 기술분야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12명 정
21이향규, 「북한 사회주의 보통교육의 형성」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pp.
80-85.
22식민지기에 공업, 농업, 의학, 교육 분야 등 중등전문가를 양성하는 전문학교가 설치되었는데, 중등학교 입학생 구성을 보면 일본인 학생이 훨씬 많았다. 공과 계 열의 경성공업전문학교는 한국학생과 일본학생의 비율이 1:7, 광산전문학교가
1:4, 부산수산학교가 1:6이었다. 신효숙, “북한사회의 변화와 고등인력의 양성과
재편(1945-1960), 현대북한연구, 제8권 2호 (서울: 한울, 2005), p. 43.
도였다.23현장 기술인력 중에 기사24는 약 900명 가량, 기수는 ‘극소 수’에 불과하여 극심한 기술인력 부족현상이 야기되었다.25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문인력 및 기술인력을 양성하는 것 또한 초기 교육개혁의 핵심적 과제의 하나가 되었다.
민족간부 양성 기관으로 1946년 10월 1일, 북한 최초의 대학인 김일 성종합대학이 개교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은 북한지역에 있었던 두개 의 전문학교인 평양공업전문학교와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모체로 하여 설립되었다. 초기 조직은 공학부, 농학부, 의학부, 문학부, 리학부, 철도 공학부, 법학부 등 7개 학부로 구성되었다. 이후 2년간 함흥의과대학, 흥남공업대학, 청진의과대학이 설립되었고, 1948년 9월에는 김일성종 합대학의 3개 학부가 분리되어 평양공업대학, 원산농업대학, 평양의학 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이 3개의 대학은 새로운 대학을 설립한 것이 아 니라, 김일성대학의 학부를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형태로 설립하였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방 법으로 대학을 증설하였다. 1948년 9월에는 청진의학전문학교와 성진
23김창호, 조선교육사 3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1990), p. 116.
24북한의 기술인력은 기능공, 준기사, 기사의 제 수준으로 구분된다. 기능공은 일정 한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전문지식과 숙련 및 경험을 가지고 있는 노동자로, 일반적으로 해당 작업에서 단독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정도 이상의 기능을 소유하 고 있는 노동자를 의미한다. 준기사는 중등기술지식을 소유하고 주로 현장의 노동 조직과 기술지도를 담당하며 전문학교를 졸업하여 국가로부터 기수자격을 수여 받은 기술요원이다. 준기사는 기능공과 기사의 중간적 역할을 담당하며, 중등교육 이수 후에 진학하는 2~3년제 고등전문학교 졸업자에게는 준기사 자격이 주어진 다. 준기사는 산업화시기에는 기수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기사는 일정 분야의 고 등지식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기술 지도를 할 수 있는 기술 요원으로 이공계 대학 을 졸업하여 국가로부터 기사자격을 부여받은 자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기술적 숙련을 획득한 기능공이 국가검정시험을 통하여 준기사 및 기사 자격을 획득할 수도 있다(조선중앙년감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65), p. 349).
25일례로 해방 당시 흥남 비료공장에는 4명의 기술자, 황해 제철소에는 단 한 명의 기술자만이 존재했다고 한다(김종항, “우리 나라에서의 기술 인재 양성 사업에 대하여,” 근로자, 제7호 (1962), p. 14).
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청진의과대학을 창립하였으며, 1949년 2월에 는 2년제 로어학교를 평양로어대학으로 개편하여 각 부문의 고급전문 인력 양성체제를 갖추었다. 이는 대학 설립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이 극히 부족하였던 당시의 상황에서 고등교육기관을 확충하는 가장 현실 적인 방안이었다. 이후 통신교육기관과 공장대학 설립, 1980년대의 대 학 증설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북한 인력양성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시점마다 이러한 ‘현실적’ 방안이 활용되었다.
전문가 양성을 위한 대학을 증설하는 한편에서 중간급 기술자 양 성 체계를 정비하였다. 이는 대학을 통해서 “비교적 오랜 시일이 필 요하고 또 필요한 일군들을 한꺼번에 대대적으로 길러낼 수 없는” 상 황에서 단기간에 대량의 기술인력 수요를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간급 기술자와 기능공 양성을 위해 3-4년제 중등전문학교를 두었 다. 이 학교는 중학교 졸업자격을 갖춘 자가 입학하는 후기 중등교육 기관이었다. 1945년 11월 평양공업전문학교 창립 이래 1949년까지 총 55개의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26 그러나 중등교육 이수자들은 고 급중학교를 통해 대학에 진학하기를 희망하였기 때문에 기술계 전문 학교가 활성화되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27
이 시기 노동인력 양성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던 곳은 각 생산현장 에 부설된 학교였다. 1947년 4월부터 각 공장과 기업소에 직장기술전 문학교와 직장기술학교가 설치되었다. 직장기술학교는 2년 만에 131 개가 설립되어 12,600명을 교육하였고, 직장전문학교는 17개 학교가
26위의 책, p. 202.
271974년 9월의 학제개혁으로 종전의 4년 내지 6년이었던 국민학교는 5년제 인민학
교로 바뀌었고, 중등교육은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으로, 총 6년으로 연장 되었다. 초급기술학교와 전문학교는 인문계 중등교육체계와 구분되는 중등기술교 육체계에 속하였다.
설립되어 3,600명의 노동자를 교육하였다.28
직장부설 교육기관과 함께 야간 및 통신형태의 교육기관이 대학 병설로 설치되었다. 1948년 2월과 9월에 김일성종합대학에 야간학부 및 통신학부가 설치되었으며, 이는 곧 다른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48년에 3개 대학 20개 학급의 야간대학과 4개 대학 82개 학급의
통신대학이 설립되었다. 공장 부설 교육기관 설치와 대학의 야간 및 통신학부의 개설은 ‘일하면서 배우는 교육체제’의 토대를 갖추는 작 업이었다. 야간, 통신, 공장부설 교육기관은 생산과 생산에 필요한 교 육훈련을 동시에 병행할 수 있는 제도로 국가건설 초기부터 계속 확 장되어 갔다.
해방 후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던 노동인력 양성과 개발은 한국전쟁 의 발발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전쟁 중 노동인력 양성 및 개발의 방침은 ‘교육의 지속’과 ‘핵심인력의 보전’이라 할 수 있다. 전 쟁이 발발하자 주요한 대학들이 신속히 지방으로 소개되었다. 김일성 종합대학은 전쟁 개시 후 곧 평안북도 구성군으로, 1952년 3월에는 다시 평안남도 순천군으로 옮겨졌다. 평양공업대학29이 평안북도 정 주군으로, 원산농업대학이 자강도 장강군으로 옮겨진 것을 비롯하여 여러 대학들이 전쟁의 피해로부터 안전한 곳으로 소개되었다. 전선에 파견되었던 대학생과 교수들은 1951년에 모두 소환되어, 9월 신학기
에는 15개 대학과 55개 기술전문학교가 일제히 개교하였다.
전쟁 중 교육기관 뿐만 아니라 중요 공장과 기술자에 대한 소개가 이루어졌다.30 공장 및 인원 소개 정책은 1950년 9월 중순 이후 한국
28조선중앙년감 (평양: 조선중앙통신사, 1950), pp. 349-350.
29평양공업대학은 1952년 김책공업대학으로 학교명이 바뀐다.
30이후 전쟁기간 중 공장 소개에 관한 내용은 차문석, “한국전쟁 시기 북한의 전시 생산 체제,” 통일문제연구, 제15권 1호(2003), pp. 87-99를 요약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