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까지의 초기 산업화 시기 노동인력 개발의 중점이 ‘紅’,
즉 사상의식보다 ‘專’, 즉 기술과 전문성의 향상에 두어졌다면, 1960 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에 이르는 시기에 노동인력 개발의 강 조점은 사상의식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한다. 이러한 변화는 1967년에 소위 ‘갑산파 사건’이라고 불리는 북한 역사상 최대의 내부 정치투쟁 을 경유하면서 김일성 중심의 유일지도체계가 강화되고, 1970년의 제5차 당대회 및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임명 을 통하여 김정일이 정치적 후계자로 등장하게 되는 정치적 변화와 긴밀하게 관련된다.
1967년 북한사회에서는 정치․사회․문화의 각 부문에서 격변이 일어났다. 이 격변의 성격은 정치적으로는 상당수의 당 고위간부에 대한 숙청과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이었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개인 숭배의 전면화였다.59 정치적 숙청은 1967년 5월의 당중앙위원회 제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절정을 이루었으며, 숙청대상은 주로 사상문
화 분야에 포진되어 있던 ‘갑산파’라고 불리는 국내계 정치세력이었 다. 이러한 정치적 숙청은 사회 전 부문에서 정치사상교육의 강화로 이어졌으며, 학교의 교육과정에도 반영되었다. 1967년 이후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유학중이던 유학생들도 외교관 양성을 위한 최소한의 인원을 제외하고 대거 철수시켰다.
59이종석, 새로 쓴 현대 북한의 이해 (서울: 역사비평사, 2000), p. 64.
1970년 11월에 열린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서 북한 지도부는 사 상, 기술, 문화의 3대 기술혁명의 본격적인 전개와 전체 사회의 주체 사상화를 1970년대의 과제로 내세웠다. 1972년 10월 제5기 5차 전원 회의에서 김정일이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김정일은 이듬해 9월 당중앙위원회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선전담당 비서로 선임되었으 며, 1974년 2월의 제5기 8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위원이 되면서 후계자로 공인되어 당 내 실권을 장악해나갔다. 이러 한 과정은 1972년 사회주의 헌법의 제정에 따른 국가기구의 강화와 김일성 중심의 유일적 영도체제의 확립과 맥을 같이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의 과정 속에서 교육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통하여 유일 지도체계를 확립하는 주요한 도구로 위치지어졌다.
1968년 3월 14일에 발표한 “학생들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참된 후비대로 교육교양하자”라는 연설문에서 김일성은 교육 부문에 사대주의, 자본주의 사상, 봉건주의 사상과 같은 나쁜 사상 독소가 있 으며, 이것은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계 급선이 분명하지 못한 ‘범벅교육’의 결과라고 지적하였다.60 또한 일 부 교육일군들이 어린이들에게는 혁명사상을 가르칠 필요가 없고 ‘자 연주의적 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을 비판하였다. 김일성 은 교육사업의 기본 방침이 사람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 화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에 따라 새로운 교육방법과 교재 를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또한 교육 부문의 과제로 교원들을 혁명화 하는 것과 함께 사회정치활동을 통하여 청소년들을 “산 정치활동가, 산 인테리”로 양성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때부터 1970년대 말까지 사 상성은 교육과 노동인력 개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60김일성, 사회주의교육학에 대하여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73), pp. 308-309.
한편 조선노동당은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제1차 6개년 계획을 발표하였다. 제1차 6개년 계획의 기본 과업은 “공업화의 성과를 강화 발전시키고 기술혁명을 새로운 높은 단계로 전진시켜 사회주의의 물 질적․기술적 토대를 한층 더 공고히 하여 인민경제의 모든 부문에 서 근로자를 힘드는 일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공업 부문에서 중공업과 경공업간의 격차를 줄이고 농업노동자와 공업노 동자의 소득 격차를 줄이며, 여성의 가사노동 부담을 완화하는 3대 기술혁명을 수행함으로써 국민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근로자를 힘든 노동에서 해방하는 것을 계획의 기본과제로 내세운 것이다.
북한은 1960년대 말까지 대외무역정책의 기조로서 자력갱생 원칙
에 의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노선을 고수해왔다. 1970년대 초반의 오일쇼크로 인해 사회주의 진영의 대부분의 국가들에 대규모의 오일 달러가 유입되었다. 북한에서도 서구와의 무역은 1972년에 급격히 확대되어 1974년에는 최고에 달하였다.61 해외로부터 도입된 자본과 기술 덕택에 6개년 계획목표는 10% 이상의 연평균성장률을 기록하 면서, 예정되었던 계획기간보다 1년 반 앞당겨 성취되었다.62 그러나 이 계획기간을 경유하면서 북한에서는 외채가 걷잡을 수 없이 누적
되어 1970년대 후반에는 대외채무 불이행사태가 발생하였고, 경제
침체 메커니즘이 장기화되기에 이른다.
경제적 침체와 자립경제 노선이 지속되는 가운데 과학기술의 자립 화를 위한 기술인력 양성이 교육에서 또 하나의 주요한 과제로 대두
61양문수, “북한경제의 발전과 낙후 및 회생모색기: 1971-2002,” 북한 60년의 재조 명 (서울: 고려대학교 북한학연구소, 2000), p. 67.
62양문수에 따르면 이 기간의 연평균 성장률은 추정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 다. 북한의 공식통계를 통한 추정치는 17.2%-19.7% 정도이며, USCIA의 추정치 는 10.4% 정도이다.
된다. 모든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의 노동력 구성에서 대학과 고등기 술학교를 나온 기사, 기수 및 전문가 비율이 10% 이상에 이르도록 하고, 6개년 계획 기간 동안 52만 3천명의 기술자, 전문가를 양성하 여 6개년 계획 종료 후 기술자와 전문가의 수를 총 100만명 이상으로 증가시킬 것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특히 기계공학, 자동화공학, 전자 공학 분야에서 기술인력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야 한다는 점이 강조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등교육 및 고등교육은 사상성의 벽에 가로 막혀 고급기술인력 양성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를 거치는 시기에 새로운 정치사상 교과 목이 편성되고 그 시간 비중도 대폭 증가하였다. 1963년 8월에 보통 교육성령을 통해 개설되었던 ‘공산주의도덕’ 교과는 교과서 편찬 및 부분적 운영을 거쳐 1968년 9월부터 전국의 모든 인민학교와 중학교 에서 일제히 수업이 시작되었다. 정치사상교과는 이후 시기에 ‘위대 한수령 김일성원수님 혁명활동’, ‘위대한 수령 김일성원수님 혁명력 사’등으로 더욱 확대되었다.63 대학에서는 1975년에 ‘김일성동지 로 작’, ‘김일성동지 혁명력사’, ‘조선로동당정책사’ 과목이 신설되었다.
1960년대 초반의 정치사상교육에서는 집단주의, 노동을 사랑하는
정신, 공동재산 절약, 사회주의 우월성 인식64 등이 주요 교육내용이
63현재 1970년대 북한의 중등교육과정에 관한 연구나 기초자료의 부재로 인하여 이들 교과가 정확하게 언제 개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1983 년 과정안에 이들 교과가 편성되어 있고 대학에서 1975년에 유사 과목이 신설된 것으로 보아, 1970년대 중반에 이러한 정치사상 교과가 대폭 신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4김일성, “청소년교양에서 교육일군들의 임무에 대하여(전국교육일군열성자대회 에서 한 연설, 1961년 4월 25일),” 사회주의교육학에 대하여 (평양: 사회과학출 판사, 1973); 김일성, “보통교육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 내각 4차전원회의에서 한 연설, 1962년 10월 16일),” 김일성저작선집3 (평
되었으며, 특히 사회주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는 ‘공산주의적 로동의 태도’가 강조되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항일무장투쟁의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는 것이 정 치사상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계급교양’의 내용으로 대두되었다. 1970 년 12월의 5차 당대회에서 혁명전통교양을 강화할 것이 언급된 이후 에 혁명전통에 대한 사상교육은 더욱 강화되었다. 혁명전통과 함께 집단주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노동에 대한 공산주의적 태도가 정치 사상교육의 주요 내용을 이루었다.65 이러한 정치사상교육의 방향과 원칙은 1977년 9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14차 전원회의에 서 발표된 ‘사회주의교육에 관한 테제’에서 명시적으로 표현되었다.
정치사상교육이 중심이 되었던 이 시기 교육의 특징은 1970년대에 중고등교육을 받았던 북한이탈주민의 증언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확인된다.
5년제 중학교66시절에는 기술생산에 필요한 그런 기술교육 같은
것은 전혀 받지 않았다. 5년 동안 실습도 안 나갔다. 실습이라는 게 교과서 한 과목에 생산기본이라는 거 하나 있는데, 실습을 4-5 학년 동안 드문 드문 한다. 생산현장에 대한 이론적인 개념적인 것을 파악시키자는 그런 게 좀 있는 것 같다. 그건 직업교육이라 고 말할 수 없다. 6학년으로 개편된 후에는 더하다.67
아무리 공부 못해도 아버지가 간부고 그러면 대학에 가는 거예요. 그게 제일 심했던 적이 60년대 말부터 70년대. 70년대가 계급투쟁 이 제일 심각했거든요. 내가 공부할 때가, 60년대 후반에 되게 신 양: 사회과학출판사, 1975) 참조.
65집필위원회, 교육학(사범대학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1969), pp. 288-338.
661967년 학제개정으로 중등교육기관은 5년제 중학교로, 1973년 학제 개정으로 6년
제 고등중학교로 변경되었다.
67K1, 함경남도 연합기업소 노동자(1979-1998), 한국교육개발원 면담(2003년 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