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농당스의 무용사적 의의
III.1. 자기반영적 비판으로서 농당스
III.1.2. 농당스의 메타극적 특성
것이며, 우리는 어떤 것이 주요한 위험인가에 대해 매일 윤리적·정치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166) 따라서 푸코의 비판 모델은 규범적 척도를 요구하지 않는 새로운 비판 기획이며, 이는 우리를 비판적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고무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비판을 통해 현재를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기반으로 윤리적인 사고와 실천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이 보여주는 것이 허구임을 드러내기 위해 극 자체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내용과 기법을 담고 있는 것이 메타극이라면, 벨은 메타극적 기법을 통해 무용 공연이 블랙박스에서 허구를 보여준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제롬 벨>은 “환영의 종말(la fin des illusions)”이라는 균열을 공포했다고 평가되는데,168) 본고에서는 <저자가 부여한 이름>에서 발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제롬 벨>에서도 메타극적 맥락에서의 의도적인 환영의 붕괴가 일어난다고 파악한다. 사실 <제롬 벨>은 그 고안 단계에서부터 메타극적 성격을 가졌다. 벨은 첫 안무작인 <저자가 부여한 이름>에 대한 ‘춤이 아닌 것’이라는 반응에 입각해, 그 다음 작품인 <제롬 벨>의 안무 단계에서는 ‘무용 공연’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고 한다.169) 어떤 퍼포먼스가 ‘무용 공연’이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들이 있어야 하는가? 벨은 무용이 구성되기 위해서는 움직이는 남성과 여성의 신체와 음악, 조명이 필요하다는 스스로의 간단한 정의 아래, 그 외의 불필요한 것들은 배제시키고자 하는 시도로서 발가벗은 나체의 무용수, 마찬가지로 ‘발가벗은’ 음악으로서 라이브 노래, 그리고 ‘발가벗은’ 조명으로서 일광을 사용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광을 사용하려면 극장 밖에서 공연을 해야 했기에, 극장이라는 공연 공간을 지키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인공조명으로서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전구를 사용하는 것으로 타협했다.170) 그리고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일종으로 보면서, 메타극의 자의식성을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이어져 온 전통으로 본다. (Lionel Abel, Metatheatre: A New View of Dramatic Form (New York:
Hill and Wang, 1963), James Calderwood, Shakespearean Metadrama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71), Richard Hornby, Drama, Metadrama and Perception (Lewisburg: Bucknell University Press, 1986), June Schlueter, Metafictional Characters in Modern Dram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9) 참고.)
168) Frétard, op. cit., p. 12.
169) 벨은 <저자가 부여한 이름>이 ‘춤이 아니’라는 반응을 받은 후 다음 작품을 통해 무엇이 ‘춤’인가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무엇이 ‘무용 공연’인가에 대한 실험을 한 것인데, 사실 앞 장에서 논했듯이 ‘춤’과 ‘무용 공연’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무용 공연에는 단순히 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무라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어야 하고, 공연으로 성립되기 위해 필요한 관객과 수행의 기제 또한 내재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Bel, interview by Christophe Wavelet, Jérôme Bel, Catalogue raisonné Jérôme Bel 1994-2005)
고소까지 당했던 벨의 항변에 따라 “이건 단지 모든 것이 가짜인 연극일 뿐”이라는 점에서,171) 이때 벨이 <제롬 벨>을 통해 드러내는 것은 메타극의 특성인 예술적 자의식성이다.172) 그리고 준 쉴뤼터(June
Schlueter)가 메타극에서의 자의식성을 “자기 내부로 향하는 끊임없는
침투적 전환이며 극단적으로 추구되었을 때는 예술작품의 형식 자체가 내용이 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설명한 것처럼, 농당스에서는 이러한 메타극적 형식이 곧 내용이 되는 것이다.173)
이렇듯 농당스를 메타극적 무용극, 또는 메타무용으로 이해할 때,
농당스가 무용사에서 가지는 의의를 포착하는 것이 수월해진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농당스에 대한 기존의 평가는 그것이 무용이 아닌 다른 예술과 갖는 외적 유사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무용과 무용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그 기준 자체가 농당스의 비판 대상이 된다는 것을 상기하면, 그러한 기존의 평가가 적절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따라서 메타무용으로서 농당스는 소위 융·복합예술을 지향해 여러 예술 장르를 의도적으로 혼합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메타픽션으로서 소설과 연극이 그래왔듯이 예술적 자의식성을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174)
170) Ibid.
171) 본고의 각주 91번 참고.
172) 예술적 자의식성은, 리처드 슈스터만(Richard Shusterman)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적 속성으로 간주된다. 예를 들어, 대중예술에 예술로서 지위가 부여되지 않는 이유들 중 하나는 대중예술이 스스로 예술임을 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고에서 논하고 있는 예술적 자의식성은 메타극적 맥락에서 특수하게 이해되는 것으로, 예술 매체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면서 그 해당 매체를 다루는 것에 대한 개념이며, 따라서 예술 일반에서의 자의식성 개념보다는 비교적 좁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Richard Shusterman, Pragmatist Aesthetics: Living Beauty, Rethinking Art (Lanham: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00[1992]), p. 230 참고.)
173) Schlueter, op. cit., p. 3.
174) 쉴뤼터는 예술적 자의식성이 비단 18세기 영국 소설『트리스트럼 션디(Tristram
Shandy)』나 16-17세기 셰익스피어 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소설과 연극
각각의 시작점에서부터 이미 존재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가령 최초의 소설로 평가되는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Don Quixote)』나 아이스퀼로스 비극의 코러스에서 이미 예술가가 자신의 매체에 대해 가지는 의식이 주요한 특성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Ib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