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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농당스란 무엇인가?

II.2. 전통적 안무 개념의 전환

II.2.2. 몸과 움직임 결속의 해체

일반적으로 춤에서 무용수의 몸이 할 수 있는 것은 ‘춤추는 것’, 즉

움직이는 것으로 여겨진다. 모던 댄스 이전의 춤에서 움직임은 그 주체로서 무용수의 몸과 결속되어 있지는 않았다. 궁정 사교 무용에서 춤추는 몸은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지니고 있었으며, 18세기 말부터 19세기까지 전문화된 예술로서 고전발레에서는 무용수의 몸이 이야기 속의 인물을 체현하게 되어 있었다. 즉 당시 춤추는 몸은 기호적 몸이자 안무에 부차적인 것이었고, 발레에서 움직임은 상징적 재현 체계에 의해

따르면 많은 안무가들이 “시공간 속에서의 움직임의 구성”이라는 안무의 일반적인 정의에 동의하지만, 각자의 이해에 따라 서로 다른 강조점을 두고 있다.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는 안무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정의했고, 그 이후의 정의들은 인간 신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생략하거나 신체에 움직임을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졌다. 얀 리체마(Jan Ritsema)안무란 무대 위 시공간에서 객체와 주체의 구성에 대한 사유라고 했으며, 르 르와에게 안무는 인공적으로 연출된 행위() 그리고/또는 상황()”이다. 더 나아가 조나단

버로우즈(Jonathan Burrows)는 움직이는 몸과 안무와의 연결 관계를 끊으며 안무는

선택에 대한 것이고, 그 선택에는 선택하지 않을 선택도 포함된다는 급진적인 개념을 제안하기도 한다. (Cvejić, op. cit., 8 참고.)

143) 이러한 접근 방식에서 농당스가 불가해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예견된 일이다. 농당스를 주요하게 다루는 유일한 국내 학위논문 작성자인 박종현은 이러한 입장을 반영하듯 농당스를 현대 춤의 ‘아포리아’로 상정한다. 이 논문에서 ‘아포리아’는

‘당스’인가 ‘농당스’인가의 문제에서의 해답이 식별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박종현은 농당스 작품을 장면마다 표현기법과 움직임, 사용매체, 음악 등

구성요소들을 구별 후 분석하여 표로 제시하는데, 이러한 구성요소들이 총체성을 이뤄내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하지만 농당스의 기획이 총체성의 추구에 있지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논문에서 증명하고자 한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오류가 드러난다. (박종현, 「현대 춤에 나타난 아포리아적 양상 연구 –농 당스 작품을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4.)

통제되었다. 이에 대해 모던 댄스의 선구자인 뷔그만과 그레이엄은 몸의 의식 및 신체적, 감정적 경험과 결속된 몸의 움직임이야말로 춤의 특수한 본질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움직임을 미메시스로부터 해방시키고자 했다.

그리고 마틴은 춤이 오직 움직이는 것에서 자신의 진정한 존재를 찾을 때 자율적인 예술로서의 지위를 얻는다고 주장하면서 모던 댄스에 대한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했다. 자기표현은 몸을 움직임으로써 내면의 감정적 경험을 표현하도록 하는 모던 댄스의 이념적 작동 기제였다.144) 이를 통해 모던 댄스에서 움직임은 존재론적으로 몸에 결속되었다.

이처럼 모던 댄스가 ‘주관화’ 과정으로서 자기표현을 통해 몸과 움직임을 주관적 경험으로 연결했던 반면, 머스 커닝엄의 후기 모던 댄스와 그 이후 포스트모던 댄스는 일종의 ‘객관화’ 과정을 통해 움직임을 물리적 사물로서 의식으로부터 분리해냈다.145) 즉 그레이엄이나 뷔그만의 춤에서 움직임은 오직 그 춤을 추고 있는 무용수의 내면의 감정으로부터만 생겨날 수 있는 감정적 산물인 데 반해, 커닝엄이나 저드슨 교회 무용가들의 춤에서 움직임은 운동 그 자체의 역동성과 이동성에 가치를 두었던 것이다. 후자에서 종종 발견되는 우연성과 비결정성은 움직임의 구성과 시행, 즉 춤추기로부터 자기표현의 모든 효과들을 제거하기 위한 장치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댄스는 움직임의 자기반영성을 통해 움직임을 주관적인 것이 아닌 객관적인 것으로 다루지만, 이때도 여전히 몸과 움직임 사이의 결속 관계는 유효하다. 이때 춤추는 몸은 움직임의 ‘행위자(doer)’로서 움직임의 도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146) 포스트모던 댄스는 단지 움직임의 동력으로서 자기표현을 거부했던 것이고, 그 대신 몸의 물질성을 통해서만 움직임을 생산했다.

144) “모던 댄스 무용가는 감정적 경험이 움직임을 통해 스스로를 직접 표현할 수

있다는 원칙을 기반으로 한다.” (Martin, The Modern Dance, p. 18.)

145) Cvejić, op. cit., 19 참고.

146) 이본 레이너는 자신의 춤에서 무용수는 그 자신이 아니라 중립적인 행위자인 것이 이상적이라고 설명했다. (Yvonne Rainer, Work 1961-73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74), p. 65, Ibid.에서 재인용.)

그리고 포스트모던 댄스에서 움직임은 모던 댄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춤의 본질로서 권위를 가지는 것이다.

대다수 농당스 연구 및 농당스를 언급하는 기사나 비평문에서

농당스의 핵심적 특징은 ‘움직임의 부재’, 즉 이제까지의 춤의 제일원리를 거부하는 것으로서 언명된다.147) 움직임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해 춤으로 보이는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 농당스 작품에서 관객이 제일 먼저 인식하게 되는 특징인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당스를 포스트모던 댄스, 그 중에서도 분석적 포스트모던 댄스의 미니멀리즘적 춤과 유사한 것으로 쉽게 오해한다. 하지만 농당스를 분석적 포스트모던 댄스처럼 단순히 재현이나 ‘아름다운 움직임’에 대한 거부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실상 포스트모던 댄스와 농당스는 현상적으로 유사하게 보이지 않지만, 학계에서 ‘움직임의 부재’와 ‘정지’라는 동일한 용어를 사용해 양자 모두를 묘사함으로써 둘 사이의 개념적 혼동이 야기된다.

포스트모던 댄스에서 움직임의 부재는 ‘아름다운 움직임’의 부재를 의미한다. 즉 이전에는 예술로 인정되지 않았을 일상의 움직임만으로도 포스트모던 댄스 작품이 구성된 현상을 지칭하는 개념적 용어가 바로

‘움직임의 부재’인 것이다. 하지만 사실 포스트모던 댄스는 움직임 자체의

운동성과 조화롭지 않고 비정형화된 일상적 움직임 그 자체에서 생겨나는 고유한 조형성을 탐구하는 데 주력했다는 점에서, 애초에 포스트모던 댄스의 특징을 움직임의 부재로 파악하는 것 또한 적절하지는 않다.148)

147) 대표적으로 오선명은 농당스가 움직임의 부재를 통해 동작에 대한 거부이자 저항”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하며 이 현상을 1960-70년대 미니멀리즘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한다. (오선명, op. cit., p. 209.)

148) 포스트모던 댄스에는 운동의 휴지(pause)가 있기도 했지만, 결국 그것 역시 결국 춤으로 수용되었다. 비어즐리는 휴지를 (영어로는 발음마저 비슷한) 포즈 잡기(posing)로 이해하면서, 움직임과 구별되는 것으로 보일지라도 포즈 잡기는 행위 안에 포함되기 때문에 춤의 일부가 될 수 있다고 역설했다. (Beardsley, op. cit.

참고.)

스티브 팩스턴의 접촉 즉흥(contact improvisation) 작품인

<마그네슘(Magnesium)>(1972)에서 몸의 정지된 상태(stillness)는 팩스턴이 “직립(the

stand)”이라고 이름 붙인 ‘기술’이 됨으로써 춤으로 편입되었던 바 있다. 팩스턴은

이완된 상태로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정지 상태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조각의 정지 상태와는 다르게 미세한 움직임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작은

다른 한편 농당스에서 움직임의 부재라고 불리는 것은 포스트모던 댄스처럼 ‘정지’ 상태 또는 장식적 움직임이 배제된 일상적 운동이 아니라, ‘춤’의 근대적 존재론을 구성하기 위해 동원되었던 운동적 기획, 즉 움직임의 필수성이라는 조건이 소진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전의 춤에서는 당연하고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무용수의 몸과 움직임 사이의 결속이 농당스에서는 해체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모던 댄스를 옹호하며 춤의 본질로 움직임을 내세운 마틴의 주장은 무용사에서 비교적 최근인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제기된 것이다.

춤에서 신체가 끊임없이 움직일 것이 요구된 배경에는 기성의 틀에

‘효율적’으로 맞추기 위한 근대적 기획의 억압적 기제가 있었다.

포스트모던 댄스에 있어서는 춤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움직임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정지 또한 움직임의 일부로서 포섭될 수 있었던 반면, 농당스에서 움직임의 소진은 무용극의 안무와 상연의 관습에 내재하는 운동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통해 나타난다. 특히 벨의 작업에서 무용수가 무대에 등장해 가만히 서 있을 때 나타나는 움직임의 부재 또는 부동의 상태는 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춤에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되었을 몸의 자연스러운 상태를 되찾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춤은 어떤 것으로 고정되어 절대적인 것으로 박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체현의 의미와 감각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149) 말하자면 농당스가 미국 포스트모던 댄스로부터 계승한 것은

춤(small dance)”으로 부르기도 했다. 접촉 즉흥은 팩스턴이 1972년 무술과 신체의 발달 및 인식에 대한 연구, 그리고 미니멀리즘 실험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듀엣 형식에 부여한 명칭이다. 접촉 즉흥에서 무용수들은 쌍을 이뤄 각각의 듀엣 그룹이 상호적으로 움직이는 집합체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가장 쉬운 경로를 따르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자유롭게 즉흥을 한다. 이 체계는 촉감과 균형감에 기초하며, 무용수들은 서로와의 촉각적 교감을 통해 서로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접촉 즉흥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성질을 지니지만, 다른 즉흥 형식과 마찬가지로 매순간 새롭고 놀라운 발견을 선사한다. (Steve Paxton, “Contact Improvisation” in Dance as a Theatre Art: Source Readings in Dance History From 1581 to the Present (New York: Harper & Row, 1974), pp. 222-227 참고.)

149) André Lepecki, “Undoing the Fantasy of the (Dancing) Subject: ‘Still Acts’ in Jérôme Bel’s The Last Performance” in The Salt of the Earth. On dance, politics 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