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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의 문제: 농당스, 개념무용,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

I. 1.1. ’당스’: 농당스 이전 춤의 관념

I.2. 농‘당스’: ‘춤이 아닌’ 춤

I.2.2. 용어의 문제: 농당스, 개념무용,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

수 있는 예시인 동시에 컨템퍼러리 댄스의 여러 하위 범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춤의 전통적 관념으로서 ‘당스’는 물론 이 장의 앞부분에서 묘사한

무용미학적 측면 외에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본고에서는 앞의 논의로부터 첫째, 누벨 당스에서 나타나는 뚜렷한 춤의 속성으로서 극장의 환영을 창출하는 재현 장치, 둘째, 전통적인 안무 개념, 셋째, 서사나 감정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기호적 몸으로서의 무용수, 이 세

가지를 ‘당스’의 주요한 속성이자 기존 춤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구성하는 것으로 보고, 다음 장에서는 그것을 의문시하고 춤을 통해 사유하는 농당스 실천들을 작품 예시를 통해 살펴보겠다.

농당스에서는 누벨 당스의 ‘연극성에 대한 강조로부터 퍼포먼스성의 강화로의 이행’이 있었다고 (부정확하게) 평가되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심지어 당연하고 정당한 이름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퍼포먼스성의 강화는 동시대 예술형식 전반에서 포착되는 경향이기 때문에 퍼포먼스적 무용이라는 이름은 무용에서 농당스의 고유한 특성과 의의를 설명하지 못하는 데다, 이 춤이 ‘퍼포먼스 아트와 같은 춤’이라는 오해를 일으킬 여지가 다분하다. 관점에 따라서는 일부 농당스 작품이 현상적으로 퍼포먼스 아트나 다른 예술 형식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컨템퍼러리 댄스로 인정되고 있는 농당스가 여전히 춤일 수 있는 근거를 알아봄에 있어서, 그것을 다른 예술 형식과 비교하는 것보다는 춤으로서 계보학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울 것이다. 퍼포먼스 아트는 조형예술에서 발전된 형식으로, 예술작품의 사물성에 대한 비판적 고찰의 결과로서 예술작품의 시공간적 비고정성을 실험하며 발전된 것인 반면, 농당스는 극장성을 강조하는 극장주의적 무용극의 정점에서 스스로를 향한 자기반영적 비판으로부터 생겨난 무용극이기 때문이다.

한편 ‘개념무용’이라는 용어는 이 새로운 춤이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이념을 공유한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보하나 스베이치는 그러한 인식의 찬반 논리를 모두 제시하면서 반박 또는 강조를 통해 개념무용이 부적절한 용어임을 주장한다. 예를 들어 개념미술의 자기반영성이 개념무용에서도 똑같이 유효한 것처럼 보이지만, 개념무용에서 자기반영성은 관객이 무언가를 무용으로서 제시받는 극장의 조건, 역할, 과정들과 관객의 지각, 해석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으므로, 자기반영성보다는 관객성(spectatorship)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또한 스베이치는 모더니즘 기획의 일부로 볼 수 있을 개념미술과는 다르게, 이 춤은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98) 또한 이 춤은 상연의 형식이나 관객, 제도적

98) 모더니즘적 환원주의란 그린버그 모더니즘에서 매체의 환원불가능한 본질 추구를 의미한다.

예술시장을 바꾸려는 목표를 갖지 않으며, 오히려 제도 안에서 극장의 장치를 비판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에서 개념미술의 기획과는 차이가 있다.99) 자기반영성에 대한 스베이치의 주장에는 이견의 여지가 있으나,100) 굳이 다른 예술 형식인 조형미술과의 부자연스러운 비교를 감수하면서까지 개념무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용어 역시 자주 쓰이지 않는다.

최근 들어 학계에서 가장 흔하게, 그리고 큰 반발 없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는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다. 오늘날 컨템퍼러리 댄스는 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 유럽에서 그 위상을 크게 떨치고 있다. 국내에 소개되는 컨템퍼러리 댄스 예술가의 대부분은 유럽 출신인 데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컨템퍼러리 댄스 축제는 대부분 유럽 기반으로 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사실 레페키와 솔로몬이 사용하는 ‘유럽 컨템퍼러리 댄스’라는 이름은 유럽 전역에서 일어난 그리고 여전히 진행 중에 있는 더 넓은 범위의 무용 실천들을 일컫는 것으로, 1990년대 초반 등장한 농당스와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의 춤을 모두 아우른다는 점에서, 분석과 이해의 날을 둔하게 만든다. 갈수록 빠른 세대 전환이 이루어지는 오늘날, 20년 이상의 시간동안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온 유럽의 현대무용을 통틀어 동일한 분류 아래 놓는 것은 다양하고 섬세한 무용학 연구에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농당스를 무용사적으로 모던 댄스 및 포스트모던 댄스 이후의 춤이라는 의미에서는 컨템퍼러리 댄스에 속하는 것으로 보되, 그 분류 안에서도 2010년대 이후 컨템퍼러리 댄스에게는 비판 실천으로서의 춤의 가능성이라는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구분지어 보는 것이다. 솔로몬은 박사학위논문과 자신이 편집한 선집 『당스: 앤솔로지(Danse: An Anthology)』의 서문에서 프레타르의 르 몽드 기사를 인용하면서, ‘농당스’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프레타르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드러낸다. 솔로몬에 따르면 프레타르는 첫째, 농당스라는

99) Bojana Cvejić, “To end with judgment by way of clarification”, in Danse: An Anthology, ed. Noémie Solomon (Dijon: Les Presses du Reel, 2014), pp. 145-157.

100) 농당스의 자기반영성에 대해서는 III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춤이라는 예술형식을 구성하는 것, 즉 춤의 본질이 되는 것을 움직임의 흐름으로 보고, 농당스에는 움직임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그것은 춤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둘째, 솔로몬이 보기에 프레타르는 농당스를 이전까지의 예술형식으로서의 춤과 학문분과로서의 무용학의 질서를 뒤흔드는 위협으로 보고 이전의 전통적인 춤의

“아름다운 움직임(beau mouvement)”이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한다는 것이다.101)

그러나 솔로몬의 이러한 해석은 프레타르의 기사에 대한 오독이며,

‘농당스’라는 용어를 폐기하기 위한 일종의 허수아비 논증의 오류로 보인다. 기사의 서두에서 스스로 밝히듯 프레타르는 ‘농당스’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 아니었고, 단지 그 당시 사람들이 그 특정한 무용 현상을 지칭하기 위해 쓰고 있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 것뿐이었다. 또한 실제로 프레타르가 썼다는 문제의 기사에서 “아름다운 움직임”이라는 표현은 미국 포스트모던 댄스에 대한 묘사로서 쓰인 것이 전부이다.102) 프레타르는 농당스가 포스트모던 댄스를 참조했지만, 농당스 실천가들은 이제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스스로의 발전을 위한 기반과 조건을 확립해야 함을 알고 있다고 평가한다. 즉 프레타르는 “아름다운 움직임”의 귀환을 예언하며 농당스를 춤이 아니라고 부정한 것이 아니라, 농당스 무용가들의 매너리즘에 대한 경고와 함께 새로운 춤을 계속해서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농당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나 사조가 되기보다는 이전의 춤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다른 무용 실천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농당스 이후의 새로운 춤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농당스는 잠깐 지나가는 유행이 아니라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춤에 대한

101) Solomon, op. cit., Noémie Solomon, “Introduction” in Danse: An Anthology, ed.

Noémie Solomon (Dijon: Les Presses du Reel, 2014), p. 11.

102) 모든 세대를 대표하는 이 예술가들은 포스트모던이라고 불린, 또한 춤과 아름다운 움직임을 거부했던 시대인 1970년대 미국의 경험에 대한 그들의 오이디푸스적 참조 이후, 그들만의 발전을 위한 기반과 조건들을 강구하는 것이 필수적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여기, 즉 유럽에서,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Frétard, “La fin annoncée de la non-danse”.)

인식과 그것을 둘러싼 관습들을 해체시킨 춤의 결정적인 제스처였고, 따라서 농당스 등장 이후의 춤은 그 이전의 춤과 동일시될 수 없다.

프레타르 역시 ‘농당스’라는 이름이 잘못 지어졌음을 인정하고 있으나, 적어도 그 이름이 주어졌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듯하다.103)

‘농당스’라고 불리기 시작함으로써 그것에 실체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프레타르와 ‘농당스’에 대한 부당한 평가를 걷어내고,

‘농당스’라는 용어가 직관적으로 제기하는 대로 ‘당스’가 아닌 춤, 즉

‘춤이라고 인식되었던 것이 아닌, 또는 그 인식의 타당성 자체를

의문시하는 춤’으로서 이 특수한 무용 현상을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다음 장에서는 벨의 작품 분석을 통해 농당스의 특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가보겠다.

103) “어떤 것이 실존하기 위해서는 명명되어야 한다. 농당스는 실존한다. 그것이

잘못 명명되었다는 위험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이후에 오는 것은 그것의 진화다.(Frétard, Danse contemporaine: Danse et non-Danse, vingt-cinq ans d'histoires, p. 1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