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농당스의 무용사적 의의
III.2. 예술작품에서 예술적 연구로
III.2.2. 예술적 연구로서 춤의 존재론
예술적 연구는 ‘연구로서 예술’을 의미한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연구란
“인류, 문화, 사회에 대한 지식을 포함한 지식의 축적을 증가시키기 위해
시행하는 그 어떤 창조적 체계적 활동, 그리고 새로운 적용들을 고안하기 위한 이 지식의 사용”이다.180) 예술은 언제나 “창조적”이며 많은 경우
“체계적”이기 때문에, 이 정의에 따르면 연구로서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예술이 있을 수 있음이 드러난다. 벨기에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 중인 문화철학자 디터 르사주(Dieter Lesage)에 따르면 예술 프로젝트는 어떤 맥락의 예술적 문제의 형성에서 시작하며, 그 문제는 예술적인 동시에 시사적인 탐구를 요하고, 이 탐구는 예술작품, 퍼포먼스, 선언 등으로 이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181) 특히 예술적 연구라는 개념은 예술 실천이 과학적 연구와 유사한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음을 함의한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이론과 실천 사이의 관계가 불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개념의 설정도 쉽지 않았던 무용계에서는 예술적 연구 개념에 대해 적지 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오늘날 안무와 무용 실천의 많은 사례에서 춤 공연은 레퍼토리화되어 언제든 재상연될 수 있는 전통적인 작품으로서보다는 오직 그 시점에 유의미한 예술적 연구로서의 정체성을 더 강하게 띠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술적 연구 담론은 2000년대 후반부터 유럽의 예술 이론계를
중심으로 발전되어오고 있으나, 예술계와 학계 양자로부터 적지 않은 반발을 겪은 바 있다.182) 일각에서는 예술적 연구 담론이 고등교육기관의 개혁에 치중된 것으로서 예술 실천 자체에는 큰 이득이 없다는 의견이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연구’에 대한 전통적 정의를 고수하고자
180) “Research and development – UNESCO”, Glossary of Statistical Terms, UNESCO.
Last modified March 12, 2003, https://stats.oecd.org/glossary/detail.asp?ID=2312.
181) Dieter Lesage, “Who’s Afraid of Artistic Research? On measuring artistic research output”, Art & Research, Vol. 2, No. 2 (Spring 2009), p. 5.
182) Ibid., p. 2.
하는 기성 학계의 거부가 있었다. 하지만 예술적 연구는 갈수록 컨템퍼러리 댄스를 비롯한 우리 시대의 예술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개념이며, 예술 실천과 이론 양자에 대한 그 영향력과 함의는 간과될 수 없다. 예술적 연구가 새로운 것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이해에 대해, 예술적 연구에 반대하는 이론가들은 그것이 일반적 연구와는 달리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또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취한다.
전자는 예술적 연구를 여타 학문 분과의 연구보다 열등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고, 후자는 예술이 지식을 생산하는 도구가 될 경우 인지자본주의183)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술적 연구가 창출하는 새로운 지식을 인지자본주의의
체계에서 계급 간 불평등을 일으키는 지적 자본으로 볼 수는 없다.
빅토리아 페레즈 로요(Victoria Pérez Royo)가 주장하듯, 예술적 연구에서는 참여자 모두가 지식 경험에 기여할 수 있으므로 그 지식은 위계질서를 형성하지 않기 때문이다.184) 따라서 이때 지식은 서비스나 상품이 아니라 모든 참여자들이 연루되는 집단적 실천을 통해 생겨나는 것으로, 오히려 인지자본주의의 지적 자본에 대안적인 형태의 지식일 것이다. 예술적 연구의 주요 목적은 이처럼 예술이 참여자들, 관객들과 관계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것에 있다.
예술적 연구의 또 다른 주요 목적은 새로운 것의 창출을 위해 기존의
낡은 전제들을 해체하는 것이다. 스베이치는 예술적 연구의 조건으로
‘문제’의 생산을 꼽는다.185) 문제의 생산으로서 예술적 연구는 “스스로를
183) 인지자본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지식과 정보, 인지과정 및 정서를 생산·유통·분배·소비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184) Victoria Pérez Royo, “Knowledge and Collective Praxis”, Dance [and] Theory, eds.
Gabriele Brandstetter and Gabriele Klein (Bielefeld: Transcript Verlag, 2013), pp. 51-61.
185) 스베이치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Différence et Répétition)』으로부터
‘문제(problème)’ 개념을 빌려온다. “플라톤의 정의에 따르면 변증술은 ‘문제들’에 힘입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 문제들을 통해 근거의 역할을 맡는 순수한 원리로까지, 다시 말해서 문제들 자체를 본래대로 측정하고 해당의 해답들을 분배하는 순수한 원리로까지 상승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2004, p. 158.)
변화시키는 문제들에 전념하며, 생각하는 행위 안에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공연과 창작 과정”이다. 따라서 스베이치는 그것을, 인식이라는 관객의 영역을 통해 인정되거나 증명되는 기교를 기반으로 가치를 영속시키고 축적하는 기존의 예술과 구별한다.186) 이때 스베이치는 연구로서의 공연만이 진정한 예술이며 연구가 아닌, 즉 문제를 생산하지 않는 공연은 예술이 아니라고 다소 급진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예술적 연구가 특별하게 새로운 형식의 예술이 아니라,
“차이와 분기”를 통해 새로운 것을 발생시키는 모든 예술과 관련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187) 문제의 생산은 창작 과정을 지칭하며,
이것이 ‘연구’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창작의 모든 과정 그 자체가
연구여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구를 위한 문제가 제기되기 위해서는 우선 기존의 모든 숨은 전제들이 드러나고 의문시되어야 한다.
주어진 전제들의 은밀한 억압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가능성의
탐구라는 예술적 연구의 특징들은 농당스에서 찾아볼 수 있었던 성향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적 연구의 초기 형태로 벨의 창작 과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벨은 “어떤 것이 무용 공연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창작의 이정표로 세운 사례를 보였다. 그는 무용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크리스토프 바블레(Christophe Wavelet)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저자가 부여한 이름>을 통해 무용 공연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용이 아니라고 했던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 크게 고민했다고 진술한다.188) 첫 안무작에서 생겨난 이러한 물음을 계속해서 탐구하면서, 그는 직후의 작품인 <제롬 벨>뿐만 아니라 이어진 모든 작업에서 ‘공연’으로서의 춤이 가져야 할 조건들을 유지했다. 앞선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벨은 ‘무용 공연’을 성립시키는 게임의 법칙을 완전히
186) Bojana Cvejić, “A Few Remarks about Research in Dance and Performance ― or The Production of Problems”, Dance [and] Theory, eds. Gabriele Brandstetter and Gabriele Klein (Bielefeld: Transcript Verlag, 2013), pp. 45-50.
187) Ibid.
188) Bel, op. cit.
폐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법칙을 가시화시키고 그 안에서 가능한 만큼 유희함으로써 이 매체에 대한 비판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벨이 무용 공연의 조건에 대해 고민했던 때로부터 20년이 지난 오늘날, 무용 공연은 그 당시 무용 공연의 최소 필수 조건으로 여겨졌던 무용수의 신체, 조명, 음악 등을 포함하지 않는 경우는 물론이고 ‘공연’의 틀거리 자체를 넘어서기도 한다. 농당스에서는 벨이 <제롬 벨>이라는 제목을 통해 완성된
‘작품’에 저자의 ‘서명’을 하는 다소 도발적이고 그 자체로 퍼포먼스인
어떤 것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 오늘날 최전선의 컨템퍼러리 댄스에서는 완성된 ‘예술작품’에 대한 인식조차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러한 춤의 패러다임 전환을 구체적인 작품 사례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