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tudy on Urban Characteristics and Urban Growth of the Cities in the Former GDR After German Unification
Ⅱ. 당대표자회 결과와 지배구조 전망
1.
김정은의 후계자 내정과 경력 쌓기김정일은 고영희와 생활하는 동안에 이미 3남 김정은을 ‘후계자감’으로 지목했 다
.
장남 김정남(71년생)은 ‘성혜림 소생’이라는 불리한 점으로 자신이 후계자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높음을 알고 있는 듯 일찌감치 일본 밀입국 등 자유분방한 생활 을 해왔다. 고영희 소생 두 아들 중에서 정철(80년생)은 성격이 여성처럼 유순하 나, 정은(84년생)은 승부욕이 강하고 정치적 야심을 보여 김정일의 총애를 받아왔 다.4 후계자 내정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 2000년대 초반 한때 추진된 것으로 알 려졌다. 2001년부터 북한 내부에서는 고영희를 “존경하는 어머님”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고,5 김정일의 3남 총애를 감지한 핵심 간부들이 후계문제를 간헐적으로 거론하였다. 그러나 권력누수를 우려한 김정일의 거론 자제 지시에 이어 2004년5월 고영희의 사망으로 후계문제는 잠잠해졌다.
爲)의 정치로 상황을 무마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정성장, “[집중분석] 김정일 후계자 김정운,” 신동아, 2009년 7월호, pp. 246-259; 정성장, “김 정은, 이미 김정일과 거의 대등한 권력행사,” 월간조선, 2010년 11월호, pp. 84-97 참조.
5한기범, “북한 정책결정과정의 조직행태와 관료정치: 경제개혁 확대 및 후퇴를 중심으로 (2000-09),” (경남대 박사학위 논문, 2009), p. 36.
김정은이 후계자로 내정된 시점은 2009년 1월로 알려졌다.6 북한 지도부는 김 정일이 뇌졸증(2008년 8월)으로 쓰러진 후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자 후계 자를 서둘러 확정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내정 과정은 알려진 게 없 으나, 장성택 당 행정부장이 김정일 와병 중에 사실상 국정 관리자 역할을 맡았었 고, 김정일이 다시 거동이 가능해져 현지지도를 할 때 김경희와 함께 그를 뒷바라 지 했다는 점에서 후계문제도 이 과정에서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은 후계자로 내정된 후 정책경험을 쌓을 기회가 주어졌다. 북한의 선전 자료에 의하 면 김정은이 2009년 4월 5일 함북 화대에서 김정일과 함께 “광명성 2호” 발사 현 장을 관찰하였고, 4월 14일 “강성대국 불보라” 명칭의 김일성 생일 축포야회를 직 접 조직하였다고 한다.7
2009년의 150일·100일 전투, CNC(컴퓨터 수치제어)에
의한 산업시설 관리, 함흥 비날론 공장 가동, 대계도 간척지 개발도 김정은이 주도 한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8 화폐개혁,
천안함 공격, 월드컵 축구 경기 등은 김정은 이 주관한 것처럼 암시하여 그를 띄우고자 하였으나 어설프게 역효과가 난 사업 이었다.9 북한의 선전 자료는 김정은의 자질과 능력에 대해서 “김일성군사종합대 학 전 과목 최우등 졸업,”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천재적 영지와 지략을 지닌 군 사의 영재,” “현대군사과학과 기술에 정통한 천재”라고 표현하고 있다.10 북한은 김정은이 주로 군사 과학부문에 자질이 있고, 중요한 국가적 사업에 기획 능력이 있는 것으로 선전하고 있다.2.
후계체제 출범에 대비한 김정일의 역할북한에서 후계체제 구축 문제는 김정일의 관리사항이라 할 수 있다. 후계구축 과정 초기에는 김정은은 배우에 불과하며 김정일이 감독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
62009년 1월 8일 김정일이 김정은을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교시를 리제강 당조직지도부 1부부장에
게 하달하여 고위 간부들에게 전파되었으며, 군에는 총정치국을 통해 대좌급 이상에 전달되었다 는 주장이 있다. 연합뉴스, 2009년 1월 15일, 2009년 3월 9일.
7“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 마이니치신문, 2009년 9월 8일. 이 내부 문건
은 2009년 6월경 군 간부 교양자료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문건에 의하면 김정은은 김일 성군사종합대학 보병지휘관 3년제와 연구원 2년제를 2006년 12월 24일에 졸업하면서 ‘인공위성 자료와 GPS수신기 좌표를 활용한 작전지도 개발을 통하여 포병의 화력타격 정확성 보장방안’을 발표하는 등 후계자 내정 이전부터 군사적 자질이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8김갑식, “북한 ‘조선로동당대표자회’ 개최 결과와 향후 전망,” 국회입법조사처, 이슈와 논점, 제 126호(2010.10.4).
9박형중, “당대표자회와 과도적 권력체계의 출범,” (Online Series Co 10-38, 2010.10.11).
10“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 마이니치신문, 2009년 9월 8일.
다
.
11 김정일은 간부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김정은의 위대성’에 관한 ‘말씀’을 전
파하여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였다.12 김정일이 2010년 5월에 이어 8월에 중국을‘깜짝’
방문한 것도 후계구도 공식화를 앞두고 분위기를 잡기 위한 연출이었다. 김정은의 등장에 앞서 다시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과의 대를 이은 친선관계’를 과시 하고, 만주지방 방문으로 김일성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혁명전통’을
계승한다는 암시 효과를 겨냥한 셈이었다. 2009년 이후 세 차례의 권력체계 정비 도 승계를 제도화하기 위한 김정일의 구상이라고 할 수 있다. 2009년4월 헌법
개정을 통한 국방위원장 기능 강화, 2010년 6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한 장성택의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임명, 그리고2010년 9월 당대표자회 소집을 통한 당조직
정비가 그것이다.2009년 4월 헌법 개정의 핵심은 김정일의 국방위원장 취임 이래 실제로 확장된
국방위원회의 기능을 명문화한데 있다. 당시 개정 헌법은 국방위원장과 국방위원 회를 별도의 장으로 분리하면서 종래 ‘국방위원회 임무와 권한’ 중에서 ‘권한’은 국방위원장에게로 ‘임무’는 국방위원회로 분류하여 ‘일을 시키는 자리’와 ‘일을 하 는 자리’로 나누어 놓았다. 개정 헌법은 국방위원회가 아닌 국방위원장이 ‘국가의 최고령도자’로서 국방위원회 사업은 물론 ‘국가의 전반 사업을 지도’할 뿐 아니라, 국방위원들을 비롯한 중요 군사간부들을 임면할 권한을 보유하며, 전시상태와 동 원령 선포는 물론 추가로 ‘비상사태’ 선포 권한까지 갖는 강력한 기관으로 규정하 였다.
반면 국방위원들은 권한이 축소된 가운데 “국가 중요정책 수립,” “국방위원 장 명령 등과 어긋나는 국가기관의 결정·지시 폐지” 임무를 추가하였다. 국방위원 장의 역할과 국방위원회의 역할을 가른 것은 국방위원장의 지휘 책임에 앞서 국 방은 물론 국정 전반, 특히 비군사적 또는 내부 위기관리를 포괄하는 국정관리 책 임을 일차적으로 국방위원들에게 부담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동시에 국방위원들 충원 방식이 과거 군 고위인물 중심에서 장성택 당 행정부장을 비롯한 국가안전 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공안기관 책임자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바뀐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1311박형중, “당대표자회와 과도적 권력체계의 출범,” (Online Series Co 10-38, 2010.10.11).
12북한은 “존경하는 김정은 대장동지의 위대성 교양자료”를 통하여 고위간부들에게 “김정은대장 동무는 군사적안목이 넓고 실력이 대단히 높습니다,” “일군들은 당과 인민에 대한 김정은대장동 무의 충실성과 헌신적 복무정신을 따라배워야합니다,” “인민군지휘성원들은 김정은대장동무를 잘 받들어 나의 의도에 맞게 인민군대를 정치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 의 ‘말씀’을 주입시키고 있다.
13북한은 2009년 4월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장성택과 주상성 인민보안상(2010년 4월 5일 중앙TV
김정일은 2010년 4월에 이어 이례적으로 6월에 다시 소집된 최고인민회의에서 장성택 국방위원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승진시켰다. 이로써 장성택의 후계구 도를 관리하는 실무 총책임자 역할이 보다 명확해졌다. 동시에 최영림 평양시당 책임비서를 내각 총리에 임명하는 등 상당수의 당 간부들을 내각 간부로 충원하 였다. 내각 간부들 교체는 화폐개혁으로 인한 민심이반 책임(2010년 3월, 박남기 당 계획재정부장 총살)을 물은데 이은 후속 인사 조치이나 여기에는 권력승계 시 기에는 정치·사상적 지도기관인 당과 당에 경륜을 쌓은 간부들의 역할이 더욱 필 요하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세습의 정당성을 전 사회적으로 설득하고, 불 평·불만 세력을 감시하는 정치과정은 당 조직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6월 23일자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결정서는 “조선로동당 최고지도기관 선거를 위한 조선로동 당대표자회를 9월 상순에 소집할 것을 결정 한다”고 하여, 후계체제의 전위조직인 당을 전면 정비할 것임을 예고하였다.
3. 2010
년9
월 당대표자회와 당조직 정비북한은 당초 예정보다 2~3주 지연된14
2010년 9월 28일 1,653명의 당대표들
이15 참석한 가운데 제3차 당대표자회를 개최하였다. 당대표자회에서 김정일을 다시 당 총비서에 추대하고,
당 규약을 개정한데 이어 당 중앙위원회 위원·후보위 원과 당 중앙검사위원회 위원을 선거하였다. 같은 날 개최된 “당 중앙위원회 2010 년 9월 전원회의”(6기 22차 전원회의)에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 당 비서 를 선거하고, 당 비서국(당 부장)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조직결과가 발표되었다.1993년 당전원회의 소집 이래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었던 당 중앙지도기구들이
26년 만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16 새롭게 정비된 당 중앙지도기구가 앞으로 어떤무게감을 갖고 얼마나 활성화될지는 더 지켜볼 일이나, 많은 간부들에게 당직을
를 통해 인민보안부로 개칭된 사실이 확인), 우동측 국가안전보위부 부부장, 김정각 군총정치국 1부국장 등을 국방위원에 새로 등용하였다.
14“9월 상순 소집”을 공표하고도 늦춘 것은 신의주 등에 내린 집중 호우로 당표자회가 예정된 시점
이 ‘경축분위기’ 조성에 적합하지 않다는 북한 지도부의 판단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북한의 당대표자회의 연기, 2010년 4월에 이은 6월 최고인민회의 재소집, 2010년 5월에 이은 8월 김정일 재 방중(訪中) 사례들은 특정 정치 일정이 소수에 의해 파행적으로 결정됨을 보여준다.
15당대표자로 선출된 1,657명 가운데 1,653명이 참석하였으며, 방청으로 517명이 참석하였다.
1966년 10월의 제2차 당대표자회에는 1,323명의 대표가,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는 3,220 명이 참석하였다.
16당 정치국은 1994년 김일성 장례문제 논의, 1998년 9월 주석제 폐지 결정 등 극히 간헐적인 소 집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