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ent Migrant North Koreans
I. 서론
Ⅲ. 사례 재구성
북한 주민들의 의미관점의 전환과 이에 따른 경험의 재해석의 미시적 메커니즘 을 탐색하기 위해 이 절에서는 구술자들의 생애체험을 살펴본다. 연구자가 직접 생애사 면접을 실시하였던 열한 명의 탈북이주민 중 두 명의 생애사를 재구성하 여 서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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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사례는 관련된 내용 분석 시 부분적으로 소개한다.16 생애사 분석의 주요 대상이 된 사례는 전체 사례들 속에서 남한에서의 학습과정과 그 과 정에서의 정체성 변화의 특성을 잘 드러낸 수 있는 사례를 선정한 것이다.1.
자기주도적 학습자 이유경 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닌 삶연구자가 이유경 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초였다. 당시 이유경 씨와 연구자 는 북한의 직장생활과 노동문화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다. 2년 후인 2006년에 탈북
15이희영, “사회학 방법론으로서의 생애사 재구성,” 한국사회학, 제39집 3호 (2005), pp. 124-133.
16분석 과정에서 주요 면접자 네 명의 생애사를 재구성, 해석하였으나, 논문 작성 및 심사 과정에 서 논문의 구성 및 분량을 고려하여 최종적으로 두 명의 사례로 압축하였다. 또한 구술자들의 신변보호를 위해 이름 및 기본 인적사항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음을 밝혀둔다.
이주민의 문화 적응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던 연구자는 함께 연구에 참가했던 공동연구자가 진행한 이유경 씨의 인터뷰 기록을 통해 그녀가 우리 사회에서 어 떻게 생활하고 있으며 적응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 를 접하였다. 당시 남한에 정착한 지 6년이 다 되어가던 그녀는 남한살이의 고달 픔과 문화적 차이로 인한 어려움, 인간관계의 갈등을 한창 겪어나가는 와중이었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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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새로운 삶을 다방면으로 모색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여름, 한층 환해진 얼굴의 이유경 씨를 다시 만나 지나온 생애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여 기에 소개하는 이유경 씨의 생애사는 시차를 두고 이루어진 세 번의 만남에서 들 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연구자가 재구성한 것이다.이유경 씨는 1960년대 중반 함경북도 청진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 녀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녀는 새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하게 되었 다. 새어머니는 곧 남동생을 낳았고 그 동생이 부모님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바람 에 성장기의 이유경 씨는 “정에 굶주렸고” 외로움을 많이 타면서 자랐다. 그녀는 스스로 어린 시절에 아버지에게 “늘 인정을 못받고,” “혼자 찬밥으로 불행하게 컸 다”고 회상한다.17
남을 돌보는 일을 좋아했던 그녀의 꿈은 어머니처럼 간호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고등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같은 학교의 졸업생들 대부분이 새로 건설된 연합기업소 소속의 군수공장에 무리배치 되었다. 그녀는 고등중학교를 졸 업하면서부터 1990년대 후반에 북한을 떠나기까지 20년 가까운 기간을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그녀는 집을 떠나고 싶은 생각에 결혼을 빨리 하기를 원했지만 20대 초반에 약혼자가 사망하는 등 불행한 사건이 겹치면서 결혼은 그녀의 뜻대로 진 행되지 못하였다.
고난의 행군기에 들어서면서 북한의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자 이유경 씨의 오빠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으로 탈북한다. 당시 오빠네 집에서 살고 있던 그녀도 오빠를 따라 중국으로 들어가게 된다. 중국에서 생활을 해오던 중 탈북자 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오빠가 먼저 남한으로 들어오고 사회 정착 후 브로커를 통해 이유경 씨를 남한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이유경 씨는
17이유경 씨는 인터뷰 초반부에 성장기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외롭고 불행했다고 말했으나, 두시간여에 걸쳐 자신의 전 생애를 모두 이야기한 후 인터뷰 말미에 “제가 어린 시절 엄청 불행 하고 사랑 못 받고 살았다지만 아니란 생각이 들어요”라고 진술을 번복한다. 사회 정착 과정에 서 자아의 실현, 사회적 인정을 통해 성장기의 결핍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생애사 구술의 과정에 서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하게 된 것이다.
남한이 잘 산다는 정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뿐 “차마 감히” 남한에 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 중국에서는 잡아서 북송시킨다고 하고 남한에 먼저 들어온 오빠는 돈을 보내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할 수 없이 와야 되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2년 그녀는 한국행 비행 기를 타면서 북한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이라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이유경 씨가 북한에서 태어나 성장하면서 남한에 오기까지 그녀의 삶은 주로 피동형으로 묘사된다.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애정과 인정을 갈구했던 성장기, 졸업 후 직업 선택, 결혼의 실패, 탈북과 남한행 등 삶의 주요 사건과 전환의 계기 들은 주로 그녀 자신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2010년에 이루어진 생애사면접의 초반부에 그녀가 북한에서의 삶을 회고하면서 “어린시절 불행했다”
고 단언했던 것은 아마도 그곳에서의 삶이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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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할수록 좋다남한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남한 에 오게 된 이유경 씨가 처음 남한 사회를 대면하면서 갖게 된 느낌은 막막함이었 다. 2006년 면접 당시 그녀는 초기 적응기간을 회상하면서 “가슴 아팠고, 암울했 던 그 시기, 구름이 쫘악 낮게 깔려있던, 시커먼 구름이, 그런 느낌”이라고 표현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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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노선도 모르고 지하철 타는 방법도 모르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살 줄도 몰랐던 그 때가 그녀에게는 “너무 너무 암울했던” 시기였다. 남한살이에 대한 그 녀의 표현은 4년 만에 상당한 변화를 보이게 된다. 2010년 연구자가 다시 이유경 씨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남한에 오게 된 것이 “선물인 거 같아요. 저는 비로소 탈북 한 그때로부터 제 인생, 제2의 인생, 행복한 인생이 펼쳐졌다고 생각돼요. 그때로 부터 쫙 이렇게 앞에 구름이 다 걷히는 거 같았었어요. 그 때부터 다시 시작했었 었고”라고 표현한다. 남한 사회 정착6년차인 2006년부터 10년차인 2010년까지
남한 사회에서의 그녀의 삶은 빗줄기를 품은 검은 구름이 낮게 깔리는 풍경에서 구름이 걷히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풍경으로 전환된 것이다. 2006년 사회 적 응의 어려움과 갈등을 토로하였던 그녀가 4년 만에 자신의 적응 과정을 한 발짝 떨어져 평가하면서 “다 겪어야 할 과정”이었다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는 여러 방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다양한 학습 경험이 작용하였다.남한 사회에서 이유경 씨에게 가장 큰 학습 경험을 제공했던 장은 그녀가 몸담
았던 직장이었다. 하나원 초기적응교육과 직업교육을 거쳐 그녀는 입국한 이듬해 에 공장에 취업하게 된다. 그녀가 처음 일을 하게 된 공장은 전자회사였다. 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적성에 안 맞아 일을 잘 하지 못했고, 그녀는 보름만에 해 고를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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쫓겨난다는 서글픔으로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흘렀다. 북한에서 그 녀가 다니던 공장은 노동규율이 세지 않았다. “좀 아프면 병원진단서 끊어서 내면 월급 타먹고 쉴 수 있었고”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직장에서 해고 되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북한의 직장과는 생판 다른 남한의 직장문화에 큰 충격 을 받고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자”고 결심을 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이 하고 싶었 던 일이었던 홈패션 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하여 일하게 된다. 이곳은 노동자가 스 무 명도 안되는 소규모 공장이었지만, 여기서 일하던 시기에 이유경 씨는 노동규 율과 문화, 인간관계 등 남한 사회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학습할 수 있었다.처음 3개월간은 말도 못하고, 다음 3개월간은 눈치를 보면서 조금씩 말을 하기 시작했고, 1년이 지나니 기술이 늘고 월급이 올라가고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 었다.” 직장에서 가장 어려웠던 것은 동료들과 말이 안 통하는 것이었다. 미싱일 은 북한에서도 해보았지만 기계 자체가 다르고 부품의 명칭이나 관련 용어가 다 르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해내기 쉽지 않았다. 직장 동료들은 북한에서 왔다고 하 니 처음에는 호기심이 생겨서 다가왔지만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자 곧 돌아섰다.
“귀머거리”
소리를 들으면서 동료들의 말을 알아듣기까지 꼬박3개월이 걸렸다.
그 다음 3개월간은 자신의 말을 동료들이 알아듣지 못해 고생을 했다. 동료 아줌 마들이 쉬는 시간에 커피를 마시면서 수다 떠는데 낄 수가 없어 왕따가 됐다. 살 이 빠졌다는 뜻으로 “얼굴이 못쓰게 됐네”라고 했다가 기분 나쁜 얘기를 한다고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녀는 언어의 장벽을 넘기 위해 모르는 말이 나오면 신변보 호담당 형사나 직장의 친한 동료들에게 물어보고 다 수첩에 적어서 외웠다. 취업 후 3개월간은 거의 매일 눈물을 흘릴 정도로 힘겨운 나날들이었지만 첫 직장에서 보름 만에 해고당했던 상처는 그러한 어려움을 이를 악물고 극복해내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