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자세히 서술했지만, 1990년대 이래의 북한사회는 과거의 그 것과는 크게 다른 것이다. 또한 사회 내의 여러 변화는 구조적으로 자가동력을 가지고 전개하고 있기 때문에, 정권의 정책방향이 그에 우호적인가 적대적인가에 상관없이 지속되고 있다. 정권은 그러한 변 화에 편승하고 적응할 것인가 또는 억제하고 통제할 것인가에 대해서 만 결정할 수 있지, 그것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은 선택지로 떠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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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권의 정책이 변화에 적응하고 편승하는 경우에는 정권 대 사회 사이에 갈등의 소지가 줄어든다. 반대로 정권 이 변화에 대해 억제와 통제의 방향의 정책을 택하게 될 때, 정권과 사회 사이의 간격과 갈등의 잠재성은 증가하게 된다.
가. 역동적 사회변화와 당국의 대응
1990년대 이래 북한에서는 당·국가 일원화 체계에 기초한 개인에 대한 전체주의적 통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 한정권은 자신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새로운 상황전개에 대해 정권의 주도권을 상실하지 않도록 하는 차원에서 한편에서는 편승 및 적응하면서, 다른 편에서는 억압 및 통제하는 이중의 정책을 펼 쳐왔다.
1990년대 이래 나타난 다양하고 불가역적인 현상을 보면 이렇다.
경제난에 따라 전통적 당·국가체계가 붕괴하면서 개인은 당적·정치 적 통제와 배급제에 따른 경제적 속박에서 상당한 정도로 자유로워졌 다. 마찬가지로 기관·기업소의 경우에도 당적침투와 통제 및 국가계 획 및 예산에 의한 통제와 간섭으로부터 상당한 정도로 자유로워졌 다. 이를 배경으로 개인과 기업의 국가 직접통제 바깥에서의 다양한 활동전개, 그리고 준-공무 겸 준-사무(私務)의 광범위한 발생, 국가 공식영역 바깥에서의 다양한 방식의 음성적 자본축적, 당과 국가가 매개하지 않는 개인 간, 기관 간, 개인과 기관 간의 다양한 거래와 소통관계의 전개 등이 있었다.
그러나 당·국가는 이러한 다양한 현상에 대해 언제든지 자의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한을 보유하고 있다. 사회변화가 매우 광
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러한 현상 중에서 국가가 공식적으로 승 인한 것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현상은 언제든 지 당·국가의 억압과 탄압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직 구체제의 법과 제도, 당과 국가의 침투 및 통제의 관행, 절대적 최고지도자 및 각급 단계에서의 ‘소왕’(주로 당 책임비서들)의 자의적 간섭관행이 아직 공 고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가 새로이 전개하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의 상당한 부분이 준-공무 겸 준-사무(私務)의 성격을 띠며, 각종 부패와 불법적 결탁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공적 권력의 합법 적이고 정당한 통제대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북한정권은 이러한 전개에 대해 이중적으로 적응했다. 새로운 상황 에 적응하는 차원에서 내부통제와 관련된 기구와 방식을 변화시킴으 로써 새로운 통치환경에 적응하는 동시에 새로이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전통적 통제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한편에서는 당의 조직과 사상통제의 약화, 상당한 수준으로 주민이동과 경제거래에 대한 국가 직접간섭의 포기 등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대안으로 이른바 ‘선 군정치’의 전개, 각종 공안기관의 강화 등이 정치면에서 나타난다. 경 제면에서는 내각의 역할을 강화시키면서 2002년 7월 조치를 단행하 는 등 개혁적 정책을 펴기도 하고, 다른 편에서는 노동단련대 설치 등을 통해 노동이탈에 대한 물리적 통제를 유지하면서, 이밖에도 개 인과 기업의 경제활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북한당국의 이러한 이중적 대응에서 핵심적인 것은 기업소 노동자 에 대한 통제유지의 문제였다. 경제난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배급제가 중지되고 또한 국유기업 가동이 중단됨에 따라 많은 노동자들이 지배 인 및 당 비서의 묵인하에 불법적으로 기업을 이탈했다. 공장을 이탈 한 노동자들은 다양한 방식의 개인 생계활동을 모색했다. 일부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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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들은 개인텃밭을 경작하거나 시장에서 장사에 참가하는 등 개인영 업을 시작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각종 기관·기업소의 명의를 빌어 설 립된 사실상의 반관·반민의 각종 회사에 사실상 사적으로 고용된 임 노동자가 되었다. 또한 이와 같은 공식 직장이탈노동자를 불법적·사 적으로 고용하는 것을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국가 외부 잉여축적과 함께, 경제적 거래관계가 발생했는데, 이는 정권이 직접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는 북한정권에 쉽지 않은 도전을 제기했다. 북한정권의 입장에서 는 새로이 발생하는 현상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도 없는 처지에 빠졌다. 먼저 정권의 각종 기관·기업소 그리고 크고 작은 엘리트들이 새로이 발생하고 있는 다양한 현상에서 주요한 참여 자이다. 각종 특권기관이 설립해서 운영하고 있으며 그 수익이 기관 의 공적 운영비의 일부로 충당되고 있는 각종 회사가 그 대표적 체현 물이다. 또한 크고 작은 엘리트들은 구체제의 이완과정이 제공하고 있는 각종 불법적·준-합법적 기회를 적극 활용하여 사적인 경제적
재부(財富) 축적의 기회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구체제의 각종 기관·
기업소, 그리고 크고 작은 엘리트들이 새로운 현상에 적응하면서 이 미 깊숙이 그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북한정권은 새로운 현상을 그저 묵과하고 수용 할 수만은 없었다. 그 이유는 첫째, 국유부문과 비국유부문에서의 임 금격차와 기회구조의 차이에 따른 삼투압 때문에 국영부문에서의 각 종 자원이 준 민간부문으로 가속적으로 유출된다. 둘째, 정권이 직접 통제 할 수 없는 각종 행위와 기회, 거래관계와 정보소통, 잉여축적이 발생함으로써 정권의 권위에 도전할 수 있는 잠재적 세력이 형성되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현상은 억제되고 통제되어야 했다.
편승 및 적응 대 억압 및 통제라는 이중정책은 북한당국에 일련의 딜레마를 제기했다.310 첫째, 공산주의적 복지는 제공하지 못하면서 도, 과거와 같은 조직생활을 복원하고 싶은 데 딜레마가 있다. 과거 북한당국이 일반주민을 직장과 주거지에서의 조직생활을 통해 확고 하게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배급제 등을 통한 공산주의적 복지가 제공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생활과 공산주의적 복지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그런데 북한당국은 한편에서 현재에도 북한주민을 과거 와 같은 방식의 조직생활 속에 얽어매고자 하지만, 과거와 같은 수준 의 공산주의적 복지를 더 이상 제공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
둘째, 비사투쟁과 개인축재 사이의 모순이다. 비사투쟁은 개인축재 를 불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사투쟁은 사회에 존재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의 투쟁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부익부 빈익빈이 심해 지고 있으며, 따라서 비사투쟁은 강화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증가한다.
셋째, 사회·문화적 통제와 상층부에 팽배한 소비욕구 사이의 모순 이다. 정권은 내부정치 안정을 위해 사회·문화적 통제를 강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는 상층 부자계층의 문화적 욕구와 충돌한다. 북한의 상층은 세계적 평균소비 수준에 도달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그런데 북한과 같이 정보와 문화에 대한 통제가 심한 나라에서 는 이들의 욕구가 제대로 실현되기 어렵다.
넷째, 계획과 실리의 상충이다. 계획을 하자니 경제가 죽고, 실리를 하자니 계획이 죽는 것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국영기업을 중시할 것 인지 회사를 중시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310_탈북자 면담, 2009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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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기관별 구획별 경제이권 갈등의 만연앞서 북한경제는 비교적 상호 독립적인 7개의 구획으로 이루어졌 음을 서술했다. 이와 같은 구획화론은 현재 북한경제 내부에 존재하 는 기관별·구획별 경제이권 갈등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면, 또한 이것 이 유발하는 정치적·사회적 갈등도 찾아낼 수 있게 해준다.
먼저 분권화된 약탈론을 보자. 이는 김정일 또는 북한정권과 중·하 부요원 간에 국가재산 관리와 조세수취와 관련한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990년대 이후 중·하급 간부의 부정부패현상이 극심 해지는데, 이는 국가의 자산재고와 조세수입을 현저하게 축소시키는 한편, 일반주민의 원성의 대상으로서 내부정치 안정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정권의 이에 대한 대응은 주기적으로 중·하급 간부를 대상으로 하는 ‘비사검열’이다. 일반주민의 입장에서 볼 때, 간부에 대한 ‘비사 검열’은 환영할 만한 것이다. 또한 정권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충성분 자에게 이권과 직책을 배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 그렇지만
‘비사검열’ 자체가 비사검열원에게 검열을 핑계로 한 새로운 약탈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311
다음으로 경제의 7개 구획화가 내포하고 있는 경제적 이권갈등의 내용이다. 첫째, 김정일경제(당경제) 구획, 기관별 회사경제 구획, 제2 경제 구획을 주축으로 하는 특권경제와 그 이외 구획 간의 경제적 갈등이다. 둘째, 특권경제의 개별구획 내부에 존재하는 경제적 이권 갈등이다. 셋째, 경제 개별구획 간에 존재하는 이권갈등이다. 넷째, 경제정책이 편승과 적응의 국면과 억제와 통제의 국면을 교차하고
311_북기업소 간부 인터뷰, “北간부들, 검열은 뇌물 챙길 절호의 기회[7],” 데일리 NK, 2008월 4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