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보수파의 반격과 보수국면의 전개(2005~2008년)
2005년 초반은 북한에서 보수파의 반격이 시작되는 시기였다. 그런
데 이 시기를 보면 대외정책과 대내정책이 동시에 강경해지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한 외무성은 2005년 2월 10일 ‘핵보유 선언’을 했 다. 부시 대통령이 재선된 것은 북한 내부 강경파의 득세를 도왔을 수 있다. 북한이 보기에 부시 정부는 2002년 「제네바 합의」를 파기했 고, 관여정책을 거부해왔으며, 미국 상하원은 2004년 9월과 10월 「북 한 인권법」을 통과시켰다. 이를 배경으로 미국과의 비핵화 외교를 통 해 북한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강경파가 득세했을 수 있
다.24 2006년 10월에는 1차 핵실험이 시행되었다. 대내정책 면에서
보면, 2005년에는 이렇다 할 개혁조치가 없었다.25 2004년 말에 박봉
주를 중심으로 대담한 개혁안이 마련되었던 것에 비추어 볼 때, 갑작 스런 중단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내부에서 개혁에 대한 반발이 시작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후의 여러 동향을 보면 2005년 초부터 2007년 4월 박봉주가 완전 실각하기까지 지도부 내부에서 개혁정책 의 향배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005년 이 후 북한의 대내정책을 관찰하면, 개혁추진에 의해 이익을 침해당하게 되는 군수공업 관련 세력 및 당경제 세력, 내각에 권한을 뺏긴 권한 을 회복하고자 하는 당 기관, ‘비사회주의 현상’의 만연을 우려하는 공안세력이 개혁 반대파의 핵심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도 이 시기의 주요 배경적 사건을 보면, 국제사회 인도지원 식량거부
(2005.9), 배급제(식량전매제) 재도입 시도(2005.10), 김정일 후계논
의 금지(2005.12), 장성택 복귀(2005.12), 중앙통제 강화정책 시도
(시장억압, 중앙검열 등, 2006~), 핵무기 실험(2006.10), 북·미 핵폐
기 협상과정 전개(2007.2), 2차 남북정상회담(2007.10), 지식인대회
(2007.11) 등이 있다.
이 시기의 전반 정책방향을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보수파는 시장 에 대한 적대감을 확실하게 드러냈다. 시장은 무질서와 비사회주의 현상의 온상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장악력은 강화되고 시장은 억제되어야 했다. 시장억제책은 시간이 가면서 점차
24_David Wright, “North Korea’s Missile Program,” (2009) This paper was produced as part of the project “Improving Regional Security and Denuclearizing the Korean Peninsula: U.S. Policy Interests and Options.”
p. 9; Joel S. Wit, “U.S. Strategy Towards North Korea: Rebuilding Dialogue and Engagement,” A report by the U.S.-Korea Institute at SAIS and the Weatherhead East Asian Institute at Columbia University (October 2009), pp. 25~26.
25_최준택, “김정일 정치리더십 연구: 현지지도를 중심으로,” (건국대학교 정치학과 박사학위논문, 2007.6), p. 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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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되었다. 다음으로 특히 박봉주 총리가 추진했던 개혁적 경제조치 를 대부분 철폐했으며, 이 시기 동안 내각으로 이관되었던 이권사업 을 당 등으로 복귀시켰고, 또한 이 시기 동안 개혁정책과 대남경협에 서 일선에 섰던 인물을 숙청했다. 다음으로 보수파의 입장에서 보았 을 때 무질서하게 번성하고 있는 지방·국경연선 및 군부의 무역회사, 지방의 부패한 당·정 간부, 각종 ‘비사회주의 현상’(도강, 마약, ‘남조 선 알판’(CD·DVD), 밀수 등)에 대한 각종 비사검열을 강화했다.
이 시기의 주요 인물 동정을 보면 장성택이 당 근로단체 및 수도건 설 제1부부장으로 복귀(2005.12)했으며, 정하철 선전선동담당비서가 철직(2005 후반)되었다. 장성택은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 여러 도시를 순방하기도 했다(2006.3). 이어 김영일 총리가 임명(2007.4~) 되었고, 내각의 주요 상들이 교체(전력, 석탄, 수산, 육해운, 외교)되었 다.26 장성택은 이어 행정부장에 취임(2007.10~)했는데, 이는 시장 억제 강화시기와 일치하며, 또한 인민보안성의 역할이 격상(2007.10 과 2008.5.1)된 시기와도 일치한다. 아울러 국방위원회가 강화된 것으 로 보인다(2007.2~). 그 징후로서 현철해가 국방위 상무부국장으로, 이명수는 국방위 행정국장으로 취임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27
표면적으로 경제정책의 보수적 선회를 이끌고 있는 실무책임자는 박남기였다. 그는 2005년 9월 중앙당에 새로 신설된 계획재정부장으 로 임명되었다. 중앙당 비서국의 경제 관련 부서는 위에서 언급했듯 이 2004년 9~11월간의 중앙당 정비 때 폐지되었었다. 그런데 계획재 정부가 새로이 신설된 것은 그간 역할이 커진 내각을 견제하고 당이 경제정책에 대한 정책 주도권을 재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박
26_전현준, 최근 북한 엘리트 변동 분석 (서울: 통일연구원, 2008.4), p. 19.
27_위의 책, pp. 13~14.
남기가 계획재정부장으로 임명된 이후 반개혁적이며 국가통제를 강 화하기 위한 각종 조치가 점차 취해지기 시작했다.
2005년 9월 북한당국은 미국이 인도적 지원사업을 정치적으로 쟁 점화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유엔에 대해 북한에서 활동하는 모든 인 도적 지원 사업을 2005년 말까지 끝내도록 공식 요청했다.28 2005년
10월에는 국가배급제의 변형인 국가 식량전매제도가 도입되었다. 시
장에서의 식량유통을 금지하고 양정기관을 통해 식량을 유일적으로 유통시킨다는 것이 주요 방침이었다. 이 조치의 목적은 군량미의 장 마당 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라 했다.29 이는 실효성이 없고 물가 등 귀 등 부작용이 컸기 때문에 다음 해인 2006년 3월 폐지되었다.30 같은 시기 뙈기밭과 소토지에서의 개인경작물을 국가배급으로 간주 한다는 방침이 내려졌다.31 과거에는 뙈기밭이나 소토지 생산물의 20%만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개인소유를 허락했었다. 12월에는 장성택이 ‘혁명화’로부터 복귀하여 근로단체와 수도건설 제1부부장 에 취임했다. 과거 직책과 비교할 때 보잘 것 없는 직책이었다. 2005 년 12월과 2006년 3월에 8.3노동 등 개인노동 금지조치에 관한 김정 일 지시가 내려졌다. 그러나 실효성이 없었다.32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직장 측에서는 각종 과업을 수행하려면 자금이 필요하기
28_<http://www.reliefweb.int> (Deutsche Presse Agentur, North Korea asks U.N. to end humanitarian aid, Sep. 22, 2005), 농촌경제연구원 웹사이트 국제교 류협력(2005.10.1) 재인용.
29_계명빈, “우리나라의 경제형편(중),” 림진강, 제2호 (2008.3), p. 68.
30_이성진, “북 주민 국가 배급 타먹느니 시장 장사가 더 낫다,” 데일리 NK, 2009년 1월 14일.
31_좋은벗들, 오늘의 북한, 북한의 내일 (서울: 정토출판, 2006), pp. 24~25.
32_좋은벗들, “개인노동 금지 조치 별다른 효과 없어,” 오늘의 북한소식, 제56호 (20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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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8.3노동자로부터 돈을 받고 개인노동을 허락했다. 8.3노동자는
직장에 일정한 금액을 받치고 장사를 하거나, 다른 사람에 고용되어 개인노동을 했다. 직장에 바쳐야 하는 돈은 2007년 초 최소 8,000~
10,000원 가량이었다. 참고로 2007년도 전반기 쌀 1kg의 가격은 800
원대였다.
2006년 여성들의 시장활동 연령을 40세 이상을 목표로 새로운 단 속을 개시하였다.33 2006년과 2007년에 여러 시장에 대한 제한 지침 이 내려왔고, 2007년 10월경까지는 젊은 여성들을 종합시장에서 몰아 내는 조치를 취하였다.34 이는 2002년 7.1조치에 의해 허용된 여성들 의 시장활동을 금지하고 대신 직장에 복귀시켜 국가경제를 활성화하 려는 데 표면적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보완하여야 할 국가의
‘배급 노동 경제’는 복구되지 못한 상태였다.
2007년 4월 결국 총리 박봉주는 김영일에 의해 교체되었다. 퇴진하
기 전에 박봉주는 이미 힘이 없었다. 2005년 이후 개혁적 경제담론은 제2경제 등 특권경제를 대표하는 보수적 경제담론의 반격과 비판을 받았다. 박남기가 중앙당 계획재정부장으로 취임한 이후(2005.9) 그 는 내각에 대한 당의 정책권한과 인사권을 재확보했다. 2006년 6월부 터 박봉주는 공식활동을 중단했다. 그는 내각 전원회의에서 자아비 판을 해야 했으며, 농업자금을 유류구입 자금으로 전용한 것 등에 대해 검열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35 이후 박봉주 주도로 개혁기간 에 혜택을 보았던 기관과 인물에 대한 검열과 숙청이 있었던 것으로
33_류경원, “또 다시 긴장감 흐르는 시장,” 림진강, 제4호 (2009.3), p. 64.
34_좋은벗들, 2006-2007 북한사회변화와 인권 (서울: 좋은벗들, 2007), pp. 28~35.
35_연합뉴스, “북, 내각 총리 ‘깜짝 교체’ 배경에 관심,” 조선닷컴, 2007년 4월 12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4/12/2007041200486.html>;
FNK 정보센터, “에너지 관련 직언한 고위 간부들 경질,” 2008년 11월 17일.
보인다. 박봉주의 공식활동 중단 이후 김진성 문화상(2006.6), 김수 학 보건상(2006.10), 주동일 전기석탄공업상(2006.10)36이 교체되 었다. 박봉주와 주동일은 각각 “국내기업과 난방을 위해 석탄수출을 중단할 것, 장군님 초대소의 전기를 당겨 쓸 것” 등을 제안했다고 한다.37
김영일이 총리가 된 후(2007.4), 박봉주의 개혁조치는 취소되었다.
즉 기업이 생산물의 30% 보유, 6개월 토지 등이 폐지되었다. 2007년 부터 소토지 경작에 대한 억제가 시작되었다. 개인들이 일구고 있는 소토지(뙈기밭, 텃밭)를 모두 농장소유로 환원한다는 방침이 시행되 었다. 이 방침은 군부, 정계, 지방당 기관 등에 내려왔다. 일부지역에 서는 개인들이 일군 땅에 자라고 있는 옥수수, 수수, 조, 기장 등을 모두 베어 제거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38 2007년 2월 13일 6자회담 의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이하 2.13합의)에 의해 식량 이 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소토지가 경작될 필요가 없다고 했다.39 아 울러 개혁기간에 번성했던 시장과 시장세력에 대한 공격으로서 ‘비사 검열’이 2007년부터 현저히 강화되었다. 2008년 8월 김정일은 “시장 은 비사회주의의 서식장”이라는 8.26지침을 하달했다.40 이는 개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개혁적 경제담론의 포기와 함께 공
36_통일부 홈페이지>북한정보자료>주요인물 참조, <http://www.unikorea.go.kr/
kr/CMSF/CMSFBsub.jsp?topmenu=3&menu=2&sub=3>.
37_이용수, “‘에너지난 직언’ 북한 고위관리들 수난,” 조선닷컴, 2007년 1월 19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1/19/2007011900074.html?
srchCol=news&srchUrl=news1>.
38_좋은벗들, “소토지 농장소유화 방침에 사회적 파문,” 오늘의 북한소식, 제56호 (2007.3.8).
39_좋은벗들, 2006~2007 북한사회변화와 인권, pp. 35~36.
40_좋은벗들, 통일연구원 북한 동향 보고 원고 (정례보고회내용, 2008.12.18), p.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