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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선으로서의 백록담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17-127)

2. 해방 전후 정지용의 감정공동체와 ‘초혼적 글쓰기’

3.2. 백록담 의 발견과 정지용 시단의 확장

3.2.1. 복선으로서의 백록담

앞 절에서의 논의는 시집 백록담 이후로 해방 후반부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정 지용의 문학적 실천들을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라는 특유한 정체성 속에서 검토 할 수 있게 한다. 1948년을 전후한 시점의 정지용은 역사의 필연성에 따라 ‘불가 피로 쓰이는 시’를 모색하는 가운데 시인으로서 자신의 ‘인간적 진실성’을 어떤 방 식으로 확보해 나가고 있었는가. 이를 살펴보기 위해 본 절에서는 첫째, 1948년을 전후한 시기의 정지용이 시 혹은 예술과 현실의 긴장관계를 피력한 일제 말기의 산문들을 해방공간에서의 사유들 사이에 재배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러한 재배치의 양상을 통해 일제 말기의 시정신이 해방 직후의 공백기를 지나와 해방 후반부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로서의 문학적 실천 속에서 속필되며 발전해 나가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이에 대한 검토는 정지용 시문학사에 있어서 일제 말기 의 백록담 준비기와 해방 후반부를 발전일로의 구도로 파악할 수 있게 한다.

둘째, 시인 자신에 의해 해방공간에서 ‘시적 부름’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백록 담 준비기의 시세계를 살펴본다. 시집 발간과 가장 가까운 시점에 완성된 백록담 준비기의 여타 작품들과의 내질적 차이를 살핌으로써 일제 말기의 정지용이 시 혹은 예술과 현실 사이의 긴장관계를 다룬 시적 산문들과의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현실을 참조하고 다시 현실의 수준을 상회하는 방식의 시세계로 나아가고 있었음 을 확인한다.

셋째, 이처럼 백록담 준비기에 나타난 현실주의 문학으로서의 성격이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 시인 비평가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비평적으로 그 의미가 강화되는 지점을 살펴본다. 그들의 시각은 현실주의 문학 진영의 잔류파적 정체성 을 나눠가진 시인에 대한 감정발화의 성격을 갖는 것이자 해방 후 정지용 시세계 의 문학정전화 과정에서 점차 탈거되어 가는 현실주의적 맥락을 회복한 것이라는 데 그 일차적인 의의가 있다. 나아가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 시인 비평가들의 시 각을 매개시킬 때 이른바 ‘정지용 시단’은 청록3인이 중심이 되는 해방 이전 문장 신인 시인들의 범위를 초과하면서 해방 후 변성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게 된다.

‘정지용 시단’은 해방공간 정지용의 역동적인 자기전개에 의하여 윤동주와 같은 특 수한 예외적 개인을 아우르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의 비평 적 시각 속에서 확장되고 있었던 것이다.

백록담 의 수록시편들이 작품의 생산 방식과 시인의식의 변화 과정을 온축한 것이었고 시집에 대한 비평적 시각 또한 다층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었음에도 해방 후 문학사에서 백록담 과 정지용은 ‘순수시(인)’으로 사후 표상되어 왔던 것이 사 실이다. 따라서, 백록담 준비기 시와 산문의 현실주의적 맥락이 해방공간의 시인 자신에 의해 그리고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의 소장 시인 비평가들에 의해 현재화 되는 지점에 대한 확인은 백록담 에서 해방공간까지 불연속적으로 이어진 정지용 문학의 전통을 다시 묻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첫째 소절에서는 백록담 준비기의 사유가 정지용 에 의해 해방 후반부에 속필되고 재맥락화되는 지점부터 살펴보도록 한다. 서두에 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방공간 정지용의 문학적 실천은 1948년을 전후로 한 시기 에 활성화되었다. 그것이 ‘문학적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이유는 시 비평, 작품집과 잡지의 편집, 역시(譯詩)와 같은 창작 주변부의 영역에 다양하게 걸쳐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히 ‘시가 없는’ 시인의 시에 관한 ‘무수한 답쌓 임’에 가까운 자각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의 일’(1947~1948)을 시작으로 문단에서의 잔류를 종결하게 될 때까지 정지용은 산문 발표와 P. B. 셸리의 시 「 사랑의 철학」 번역 등 창작 주변부의 활동에 집중해 나간다. 편집자적인 자의식을 토대로 한 해 간격으로 두 권의 산문집을 간행한 것도 모두 이때의 일이다.

‘윤동주의 일’로부터 격발된 해방 후반부 문학적 실천의 흐름 속에서 시인이 가 장 먼저 발표한 산문은 「공동제작」이다. 해방 직후 찬가 계열의 시와 그 연장선상 의 동요집 평문을 발표하고 교원의 일상을 다룬 산문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던 것에 비추어볼 때 일상적인 생활의 단편 속에서 자신의 예술관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 공동제작」의 자리는 돌올한 것이다.

「공동제작」은 “도자기 제작자요 조선고공예 흠모자”인 미국인 ‘길벝슨국장’과

‘내’가 조선의 도자기 예술에 관하여 주고받은 문답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조백자를 아메리카로 가져가더라도 “조선의 하늘을 설명하기에 힘들지 않을” 것임 을 낙관하는 국장에게 ‘나’는 이조백자의 ‘피부’ 속에 감춰진 ‘혈액’에 대하여, 그리 고 ‘비뚤고 우그러진 자세’의 이유를 묻기를 삼가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국장이 혈액이 내비치지 않는 서양자기의 경우처럼 이조백자 역시 육체를 갖지 않았을 것 이며 ‘비뚤고 우그러진 자세’는 ‘백자=자연’임에 따른 현상일 것이라 대답하자,

‘나’는 ‘자연’에서 ‘인간’을 배제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으며 도자기의 ‘비뚤고 우그 러진 자세’는 이조 신분정치시대의 “눌르고 눌리우고 뺏고 빼앗기던 관계”가 형상 으로 드러난 것이라 대답한다.

눌르고 눌리우고 뺏고 빼앗기던 관계로, 이조백자는 절로 비뚤고 우그러져 태생한 것 이오.

감격성의 아메리카 예술가의 뺨에는 홍조가 오르고 이조백자기 피부 안에 흐르는 백성 의 혈액은 선연하기가 그저 「고전예술」만이 아니었다.303)

이처럼 산문 「공동제작」을 통해 시인은 ‘예술’의 생산적 맥락과 그것에 담긴 계급 적 상황을 투시하듯 바라보는 한편 인민 다수가 주체가 되는 예술형태에 대한 ‘고 전주의적’ 발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공동제작」은 이듬해에 내리 쓰인 자기비판 적 시론인 「산문」과 「조선시의 반성」, 그리고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 시인에 대한 입론을 통해 인민예술에 대한 지향점을 드러내게 되는 해방 후반부 정지용 예술관 의 단초를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해방 직후 찬가 계열의 시를 발표한 이후 오랫동안 시가 없었던 시인에게 이와 같은 예술관을 피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함이었을까. 인민예술론에 대한 지향을 비롯하여 ‘동생시인들’에 대한 시 비평 등 시를 둘러싼 비직접적이고도 환유적인 문필 행위들을 지속해 나간 해방 후반부 정지용의 문학적 실천은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시인의 인간적 진실성에 의한 ‘불가피로 쓰이는 303) 정지용, 「공동제작」, 경향신문 , 1947. 2. 16; 지용문학독본 , 박문출판사, 1948, 6

면.

시’를 도모하는 준비기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술과 생활 혹은 현실 간의 긴장관계를 다룬 과거 백록담 준비기의 산문을 해방 후반부의 산문집 사이에 선택적으로 재배치한 편집술 또한 이와 같은 차원, 곧 새로운 준비기를 위한 문학적 실천으로 이해된다. 작품선집을 제외한다면 정지 용의 마지막 작품집이 되는 산문 (1949)에서 「시와 언어」와 「비」는 해방 이전에 발표되었으며 이미 한 차례 기존 작품집에 실린 산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처럼 중복수록임이 명백한 두 편의 산문을 해방공간의 시론인 「산문」 및 「조선시의 반 성」과 함께 실은 이유는 무엇인가.

시의 무차별적 선의성은 마침내 시가 본질적으로 자연과 인간에 뿌리를 깊이 박은 까 닭이니 그러므로 자연과 인간에 파 들어간 개발적 심도가 높을수록 시의 우수한 발화 를 기대할 만하다. 뿌리가 가지를 갖는 것이 심도가 표현을 추구함과 다를 게 없다.

(……) 다만 <근신>만으로서 성자가 될 수 있을른지는 모르나 <표현> 없이는 시인이랄 수가 없게 된다. 시는 실제적으로 표현에 제한되고 마는 것이니 표현 없이는 시는 발화 이전의 수목의 생리로 그치고 말음과 같다. 그러므로 <근신>은 일종의 Action으로서 도덕과 윤리에 통로되는 것이요 표현은 Making에 붙이어 예술과 구성에 마치는 것이 니 Poem의 어원이 Making과 동의였다는 것은 자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304)

「시와 언어」는 시의 제작을 근저에서 떠받치는 것이 시인의 행동임을 피력한 해방 이전 정지용의 마지막 번째 시론이다. 이를 통해 시론이 발표된 시점인 백록담 준비기의 정지용이 ‘자연과 인간’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태도를 ‘표현’에 우선하는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해방공간의 산문집에 재배치된 이유에 대해서는 먼저 「시와 언어」가 그 이전까지 발표해 오던 시론들을 결산하는 성격을 갖는 것이면서305) 해방공간으로부터 시간적인 거리가 가장 가까운 시론이 기 때문에 취택되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나아가 「시와 언어」는 자연과 인간 을 정시하는 시인의 현실주의적인 태도와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시론이라는 점 에서 해방 후반부에 현실주의적 예술관을 피력하게 되는 정지용의 사유와 가장 그 거리가 가까운 것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작가론적인 추정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텍스트는 「시와 언어」와 마 찬가지로 해방 이전에 발표·수록되고 해방 후반부의 시론들 사이에 재배치된 「비」

304) 정지용, 「시와 언어」, 문장 , 1939. 12.

305) 「시와 언어」는 산문 에 재수록되는 과정에서 문장 의 시선 심사평인 「시선후」의 내 용을 포함하는 형태로 개작되었다. 이는 정지용이 「시와 언어」라는 해방 이전 마지막 시 론의 틀과 문제의식을 문장 고선위원으로서 전개해 나갔던 시론적 사유를 포괄적으로 대표할 만한 것으로 여겼음을 의미한다.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117-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