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전후 정지용의 감정공동체와 ‘초혼적 글쓰기’
2.1. 비평가 감정공동체와 ‘우정텍스트’의 지기(知己)
2.1.1. 비평가 감정공동체와 해방공간 정지용 시비의 종결
박용철과 정지용의 첫 만남은 박용철이 시문학 (1930.3~1931.10, 통권 3호) 발 간을 앞두고 상경한 “在京五十日”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 해 여름, 25세의 박용철 은 탕약을 새로 짓고 신열로 누워지냈을 만큼 이미 건강하지가 않은 몸이었고, 경 성행이 예정보다 늦어질 만한 집안사정도 있었다. 그럼에도 박용철은 “어렵든 서울 길” 끝에 정지용을 만나 시문학 합류의 “同意”를 얻고,92) 그로부터 6년 뒤 정 지용시집 (1935)을 간행하기에 이른다.
박용철이, 더 오래 알고 지낸 벗 김영랑의 시집보다도 정지용 시집의 간행을 서 두른 대외적인 이유는 정지용의 “문단적 명성을 고려한 것”93)이라 파악될 수 있겠 91) ‘지기(知己)’의 동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2.1.1.에서 살펴보도록 한다.
92) 박용철, 「日記抄」, 박용철전집 2 , 시문학사, 1940, 368~373면 참조. “[시월-인용자 주] 二十五日에는 (……) 芝溶을 찾었다. 생각든바 老熟보다는 學生風이 앞서고 날낸 才 華에 俗流攻擊이 비오듯 하였다. (……) 雜誌의 이약이는 손쉽게 同意가 나왔다. 밤이 늦 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같은 책, 371면) 박용철이 경성에 머무는 동안 이들은 또 한 차 례 만났다. 1929년 12월의 일기에서 박용철은 정지용의 제안으로 김소운을 잡지에 참여 시키기로 한 것이다. 이 같은 장면들은 박용철이 정지용을 다만 시문학 창간을 위한 상징적인 존재로 여기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신뢰로써 대하고 의지하며 정지용을 통해 잡 지의 기틀을 잡아나갔음을 말해준다. 시문학 창간 이후 정지용의 역할범위가 고선(稿 選) 등 다른 동인들과 달랐음 또한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정지용이 잡지 시문학 에 발 표한 시편이 적음을 들어 그 참여 수준이 미미하였다고 바라본 선행연구의 시각은 수정 될 필요가 있다.
으나, 만난 날에서 꼭 이틀이 늦은 6년째에 간행된 정지용시집 은 두 사람 사이 의 우정이라는 맥락을 동반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거의 항상 정확한 날짜 단위의 일기를 남겨왔던 박용철의 습관으로 미루어94) 시집 출간을 서두른 것이 두 사람의 우정을 기념하려한 ‘문학적 동반자-편집자’라는 이중관계에 따른 안배였으리라 추 정해볼 수 있다면 이틀의 오차는 서둘렀던 마음을 도리어 절절한 것으로 드러낸다.
정지용과의 첫 대면 당시 그 “넘우 굳은 카톨릭”이 초기시의 “作風”을 저해할까 마음속으로 걱정하던 박용철은 정작 시집을 만들 때만은 호화판으로 장정, 속표지 화를 「수태고지」의 ‘가브리엘 천사’로 꾸며주었으며,95) 시집 편제상 종교적 성향의 시를 위한 자리를 배려하기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 던”96) 정지용의 시집은 그렇게 박용철의 세심한 손길을 거쳐서 세상으로 나왔 다.97)
또한 어떠한 시집에고 무슨 전설이 붙어다니기 쉽고 그 전설은 실상은 그 책의 가치와 아무 관계까 없는 것이나 그것이 그 책에 어떠한 인간적인 체온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이 시집의 탄생에 뭇 산파의 노력을 다한 朴龍喆씨의 어여쁜 우정은 이 시집 의 뒤에 숨은 아름다운 전설의 하나일 것이다.98)
정지용시집 으로부터 박용철의 “어여쁜 우정”을 알아본 김기림은 그 우정을 시로 수렴되지 않는, 그러나 시집에 “인간적인 체온”을 더해주는 “아름다운 전설”의 차 원으로 상승시켰다. 그리고 이때에 김기림이 알아본 “시집의 뒤에 숨은” 박용철의
“어여쁜 우정”은 후일 정지용의 ‘시적 내면 공간’99)을 거치면서 ‘안해 같이 여쁜 93) 류복현, 용아 박용철의 예술과 삶 , 광산문화원, 2002, 360면; 최동호, 그들의 문학과
생애, 정지용 , 한길사, 2008, 80면.
94) 박용철의 일기는 정지용을 만나기 위해 상경한 1929년 하반기까지의 것만 확인된다. 이 듬해부터는 잇따른 잡지 발간으로 사적 기록을 남길 여유가 없었던 것이라 추측된다. 그 리고 동시에 이는 벗들을 시인으로 만들어주고, 자신의 시집은 내지 않은 박용철의 운명 과 겹쳐지는 것이기도 하다.
95) 정지용시집 속표지화로는 「수태고지」의 화면 일부가 확대 수록되었다. 그것은 바로
‘메시지의 중재자’를 상징하는 ‘가브리엘 천사’의 모습이다. 졸고, 「정지용 시와 가톨릭문 학론의 관련 양상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13면.
96) 김기림, 「정지용 시집을 읽고」, 조광 2권 1호, 1936. 1; 김기림, 김기림전집 2 , 심 설당, 1988, 370면.
97) 소래섭은 정지용시집 의 구성 및 편제를 시문학파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박용철의 시론 이 반영된 결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해석적 관점은 정지용시집 을 매개항 삼아 시문 학파의 위상을 구인회와 균형을 이룰 만한 수준으로 재배치한 시도이자, 박용철의 출판 행위로부터 작가적 수행의 적극적인 차원을 읽어낸 점에서 주목된다. 소래섭, 「 정지용시 집 에 담긴 박용철의 의도와 구인회의 흔적」, 어문연구 46권 2호,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8 참조.
98) 박용철, 앞의 책, 370~371면(강조-인용자).
벗(「꽃과 벗」, 문장 , 1941. 1)’의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일곱 거름 안에/ 벗은, 呼吸이 모자라/ 바위 잡고 쉬며 쉬며 오를제,/ 山꽃을 따,// 나 의 머리며 옷깃을 꾸미기에,/ 오히려 바뻤다.// 나는 蕃人처럼 붉은 꽃을 쓰고,/ 弱하 야 다시 威嚴스런 벗을/ 山길에 따르기 한결 즐거웠다.100)
「꽃과 벗」의 ‘벗’은 “呼吸이 모자”랐고, 후두결핵을 앓던 박용철은 1938년 봄 향년 3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101) 박용철과 정지용의 우정이 깊어진 시기를 용아 의 마지막 3~4년간이라 회고한 김영랑에 따를 때,102) 정지용시집 (1935)의 간행 은 대략 그 기점에 놓이는 사건이 된다. 따라서 그것의 간행은 비단 한 권의 시집 을 세상에 내놓는 일 이상의 의미였으리라 헤아려진다. 그것은 정지용의 시적 위상 을 문단에 공표한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103) ‘시인으로 꾸며준 자’와 ‘시인이 된 자’의 구도로 박용철과 정지용을 결속시킴으로써 “나는 芝溶이가 더 좋으이”라던 박용철의 ‘초과된 소망’을 이루어지게 하는 “天下可定”의 순간이었을 것이다.104)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의 ‘머리를 올려주는’ 이 오래된 입사(入社)의 장면은 박 용철의 유고를 정지용이 정리하는 작업으로 이어지고,105) 「꽃과 벗」에 이르러서는 99) “그[정지용-인용자 주]가 김영랑과 만나게 되는 곳 그리고 그와 함께 여행하는 시간은 그 둥그런 기억의 창고에 쌓여가는 시간이 된다. 마치 동백나무 열매와 같은 이 풍요롭 고 내밀한 공간은 시적 창조의 공간이기도 하다.” 신범순, 「동백, 혈통의 나무―신경증과 불안의 극복: 정지용론」, 시작 2권 4호, 천년의시작, 2003, 260면. 박용철과의 산행기 가 산행으로부터 오랜 뒤에 비로소 시로 정착된 것은 “기억의 창고” 안에 쌓인 기억이 시가 되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지용은 특유의 기다림 시학을 견지하며 그것[시]을 기다렸 다고 할 수 있다.
100) 정지용, 「꽃과 벗」, 백록담 , 문장사, 1941, 34~35면.
101) 함대훈, 「인간 박용철의 추억」, 박용철, 앞의 책, 5면.
102) 신범순, 「정지용의 시와 기행산문에 대한 연구―혈통의 나무와 德 혹은 존재의 平靜을 향한 여행―」, 한국현대문학연구 9, 한국현대문학회, 2001, 195면 재참조; 김영랑, 「인 간 박용철」, 김학동 편,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김영랑전집 , 새문사, 2012.
103) 첫 시집이 간행된 1935년은 시인 정지용의 ‘시적 위상의 확립’이 시작된 시기로 인정 되고 있다. 최동호, 위의 책, 79면.
104) 박용철이 시문학 을 준비하면서 김영랑과 교신한 내용 가운데에는 수주(樹州)와 지용 (芝溶)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수락하면 잡지를 시작하기로 하되 그것이 정지용이었으면 좋겠다는 내밀한 소망의 내용이 적혀 있다. “何如間 芝溶 樹州 中 得其一이면 始作하지 劉玄德이가 伏龍鳳雛에 得其一이면 天下可定이라더니 나는 芝溶이가 더 좋으이.” 박용 철, 「永郎에게의 便紙」, 박용철전집 2 , 319면. 사실상 이 같은 박용철의 소망은 자신이 내건 ‘得其一’이라는 조건을 스스로 위배하고 있는 것이다. 형편과 소망 사이의 이 같은 불균형이, 박용철의 소망을 더욱 강렬한 것으로 부각시킨다.
105) 김영랑이 정지용에게 일보(一步)와 공동으로 용아의 유고를 정리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 용의 편지는 정지용, 「서왕록(상)」, 조선일보 , 1938.6.5.에 실려 있다. 신범순, 앞의 글 은 전남, 한라산, 북쪽지역으로 이어지는 정지용의 여행기를 ‘애도’로 결연된 3인[정지용, 박용철, 김영랑] 예술가 공동체의 릴케적 사유로부터 존재의 평정(平靜)과 덕(德)의 발견
‘내’ 머리와 옷깃 위에 ‘붉은 꽃’을 씌우는 ‘벗’의 행동으로 재맥락화된다. 이것은 명백히 시로 구현된 ‘초혼(招魂)’ 행위이다. 경험현실 속에서 이루어진 장정(裝幀) 과 그 위함의 행위는, 자신은 잊고 남을 위해 ‘꾸며주는[裝]’ 행위로 기억되고 재맥 락화되면서 “弱하여 威嚴스런” 희생의 고귀한 가치로 증폭된 것이다.106) 이와 같 이 「꽃과 벗」을 한 편의 ‘초혼가’로 이해할 때, “별과 꽃 사이 (……) 길이 끊어진”
산정(山頂)이 굳이 시의 배경이 되어야 했던 것은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불가피한 상황으로 여겨진다. 「꽃과 벗」을 위시하여 창작시기상 시집 백록담 의 가장 마지 막에 제작된 시편들에서의 깎아지른 듯한 산정으로의 끝없는 상승과 마주대함의 서사(「백록담」, 「나븨」, 「진달래」)는 이 시집의 기저를 흐르고 있는 것이 ‘초혼가’
이며 ‘초혼’하는 시인의 정서임을 방증한다.107) 정지용의 내면풍경을 이러한 것으 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정지용시집 (1935)에서 백록담 (1941)까지의 거리는 ‘초 기시와 후기시’ 혹은 ‘모더니즘 시에서 산수시로의 이행’이라는 구도로 환원되지 않는다.108) 그것은 지상의 시인으로 남은 정지용이 박용철의 ‘어여쁜 우정’을 ‘위 엄’의 가치로 상승시킨 초혼의 과정, 그 연속적이고도 내질적인 ‘시인의 시간’으로 재독될 수 있어야 한다.
박용철과 정지용 두 시인 사이를 순환하는 감정이었던 ‘알아봄’, ‘알아줌’으로서 의 지기(知己)는 이처럼 초혼가적 재맥락화를 통해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상호이해의 감정으로서의 지기(知己)가, 그것을 알아본 당대 의 ‘비평가 감정공동체’를 중심으로 수평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해방 후반부에 는 다른 문학의 주체들에 의해 재생되면서 이른바 ‘정지용 시비(是非)’의 종결을 완수하기에 이르렀던 하나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시인을 두고 그 존재 자체가 ‘시비(是非)’에 부쳐지는 폭력적 사태 속에서, 오래 전 정지용을 둘러싸고 있던 비평가 감정공동체의 ‘감정’은 해방공간에서 그 주체를 달리하며 어떻게 재생 되고 있는가. 문학사에서, 문인 간의 관계 내에서 형성되고 존재하는 감정의 문제 는 어떻게 재생하고 하나의 전통이 되어서 시인의 존재를 해명하는가. 정지용 비평 가 감정공동체의 형성에서부터 해방공간의 ‘정지용 시비’에 이르는 감정공동체의 불연속적 연결망을 살펴보는 일은 이러한 물음에 답해보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에 이르는 여정으로 구축하였다. 「남유」 연작에서 「장수산1·2」을 거쳐 「화문행각」에 이 르는 여정이 그것이다. 신범순은 ‘동백’ 기호를 중심으로 여러 시간과 공간에 걸쳐 이루 어진 여행을 계기적으로 독해하였으며, 이로써 정지용의 후기시를 ‘산수시’의 프레임 바 깥에서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구축하였다.
106) 「꽃과 벗」에 대해서는 다음 소절에서 ‘우정텍스트’의 하나로 보다 자세히 다루기로 한 다.
107) 이에 대한 자세한 고찰은 3장 1절에서 이어나가도록 한다.
108) 따라서 통상 정지용 시 연구에서 적용되어 왔던 정지용시집 / 백록담 , 모더니즘시/
‘산수시’, 초기시/후기시의 이분법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