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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윤동주의 자화상 감정과 상호생성적 관계

Dalam dokumen 비영리 - S-Space - 서울대학교 (Halaman 80-94)

2. 해방 전후 정지용의 감정공동체와 ‘초혼적 글쓰기’

2.2. 해방 전후 정지용과 윤동주의 감정공동체

2.2.1. 정지용-윤동주의 자화상 감정과 상호생성적 관계

최근 윤동주 연구의 흐름은 윤동주의 시세계를 일기와도 같은 사적인 영역의 기 록으로 바라보거나 ‘순수시인’이나 ‘민족시인’으로 역사화하며 이념적으로 사후표상 하던 방식에서 벗어나218) 점차 윤동주의 시세계를 문학사의 맥락 속에서 다루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에 따라 윤동주의 시세계와 그 이행의 과정을 ‘1930년 대 시인’ 정지용과의 영향관계 속에서 바라보는 관점과 방식 또한 유연해지고 용이 해졌다.219) 주로 그 관련성에 대한 논의는 윤동주가 1936년 봄 평양에서 구입하여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까지 소장한 정지용시집 (1935)과 윤동주의 시를 중심으 로 이루어져 왔으며, 이러한 구도 속에서 윤동주와 정지용의 영향관계에 관한 논의 는 선배시인에 대한 후배시인의 모방의 양상과 수정주의적 이탈의 과정을 다루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220)

그런데 두 시인의 영향관계에 관한 연구가 정지용시집 이라는 단일한 대상으로 부터의 기법적인 영향의 수용이라는 구도 하에 이루어짐에 따라, 두 시인 사이에서 더욱 폭넓고도 오랫동안 전개된 시적 사유의 상호작용의 측면은 주의깊게 다루어 지지 않았다. 두 시인의 영향관계는 정지용시집 이후로도 지속되면서 시적 사유 의 측면에서 상호 영향관계로 확장되었으며, 이는 주로 문장 에 실린 정지용의 백록담 준비기 작품을 마주보고 형성된 윤동주의 후기시(1940년 이후작)를 경험 한 해방공간의 정지용이, 윤동주의 「병원」 이후 작품들로부터 격동된 감정은 백록 담 준비기의 정지용 자신에 대한 만시적인 자화상 감정이었으리라는 것이 본 소 절의 요지이다.

그것이 홀로된 작업이기는 하였어도 1930년대부터 윤동주는 비문단 지대에서나 마 이미 정지용에 대하여 ‘소년시인-청년시인’의 보조를 맞춰나가고 있었을 뿐 아 니라,221) 문장 을 구독하면서 쓰기-읽기의 시차가 거의 없는 애독자의 자리에서 정지용의 발표시와 산문을 스크랩해나가고 있었다.222)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졸 218) 이 같은 윤동주 문학 연구의 양분법적 시각에 대한 문제제기로는 김유중, 한국 모더 니즘 문학과 그 주변 , 푸른사상사, 2006, 327~328면; 허정, 「윤동주 시의 정전화와 민 족주의 지평 넘기」, 어문논총 51, 한국문학언어학회, 2009, 572~573면 참조.

219) 두 시인의 시의식의 관련성에 주목한 대표적인 연구로 남기혁, 「윤동주 시에 나타난 윤리적 주체와 저항의 의미」, 한국시학연구 36, 한국시학회, 2013.

220) 정지용시집 을 매개로 한 시적 영향관계에 집중한 최근의 선행연구로는 김응교, 「윤 동주와 정지용시집 의 만남」, 국제한인문학연구 16, 국제한인문학회, 2015; 김신정, 「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적 영향관계」, 배달말 59, 배달말학회, 2016.

221) 미성년의 윤동주는 연길교구에서 간행되던 가톨릭소년 (1936.11;1937.1)에 시를 발표 하였다. 이는 경성교구의 정지용이 가톨릭청년 의 문예란 편집주간으로서 시인들의 시 를 활자화하고 있었던 때와 가까운 시기이다. 1930년대의 소년시인-청년시인이라는 유비 는 이로부터 착안된 것이다.

222) 윤동주의 독서방식과 범위에 대해서는 홍장학 편, 정본 윤동주 전집 , 문학과지성사,

업하고 1942년 초 도일하기까지, 1941년 4월 문장 이 폐간되는 것까지도 정지용 과 이태준의 독자223)로서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말해주는 것은 윤동주와 정지용의 관계가 비단 정지용시집 (1935)이라는 단일한 지점 위에서 완료된 것이 아니라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까지도 진행되었으리라는 가능성이다. 이러한 가능성이 실제였음을 알게 하는 자료로 윤동주의 장서 중 정지용시집 에 남아있는 가필의 흔적을 들 수 있다. 이 는 단순한 낙서나 메모가 아니라 윤동주가 정지용시집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정 지용으로부터 받아들인 시적 사유의 흔적(trace)으로 보아야 한다.

윤동주의 장서에 관한 실증적인 연구를 통해, 정지용시집 에 수록된 정지용의 시

「태극선」 3연 아래에 ‘熱靜을 말하다’라는 메모가 보인다는 사실이 언급된 바 있 다.224) 그런데 이것은 ‘熱靜’이 단어로서 갖는 그 유일성과 특수성으로 인하여 윤 동주가 1930년대 후반 문장 에 연재된 정지용의 시론 가운데 「시의 위의」(1939.

11)의 핵심을 자신이 이해한 바에 토대하여 두 글자의 한자어로 압축하고 정지용 시집 에 가필한 것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

정지용시집 보다 시간적으로 후행하는 문장 수록 시론의 핵심을 정지용시집

2005의 「작가 및 작품 연보」(163~167면)와 윤일주, 「선백의 생애」, 윤동주, 하늘과 바 람과 별과 시 , 증보, 1955.

223) 윤동주의 「화원에 꽃이 핀다」는 주역의 ‘이상견빙지’의 괘를 시적으로 재맥락화한 것이 다. 이는 시인으로서 윤동주가, 이태준의 패강냉 의 ‘현’을 통해 발화된 암울한 전망으 로서의 괘를 반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다. 이태준의 패강냉 과 윤동주의 「화 원에 꽃이 핀다」에 주목한 논의로는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 , 민음사, 1977.

224) 김응교, 앞의 글, 107면(사진 강조-인용자). 사진 출처는 왕신영 외, 사진판 원본 윤동 주 전집 , 민음사, 2000의 제2부 사진판 자필 메모, 소장서 자필 서명. 이 메모는 정지용 에 대한 윤동주의 적극적인 독서의 양상이라는 맥락에서 언급되고 있다.

에 가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윤동주와 정지용의 영향관계를 정지용시집 이 발 표된 1930년대 중반 시점의 일로 제한할 수 없으며, 윤동주가 정지용에 대하여 관 계를 형성하는 방식이 지속적이었을 뿐 아니라 ‘가필’이라는 적극적인 행위를 동반 하는 것이었음을 방증하는 자료가 된다. 이는 ‘가필’이면서, 특정 시행의 아래에 붙 인 ‘주석’이기도 하다. 종이와 시행 위에 밀착된 가필 혹은 주석의 행위는 비평적 거리를 소실시키며 정지용의 시집을 안았던 동시기 비평가 감정공동체의 태도와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윤동주가 가필한 ‘열정(熱靜)’이라는 단어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열정(熱情)’을 나타내는 글자가 아니라 ‘열(熱)’과 ‘정(靜)’을 조합하여 윤동주가 새롭게 만들어낸 조어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정지용의 시론 「시의 위의」에서 시의 지침으로 제시되었던 태도인 ‘안으로 열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라는 두 가지의 상반된 감각을 압축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으로 熱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란 一種의 生理를 壓伏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 다. 그러나 詩의 威儀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마지 않는다. (……)

詩人은 俳優보다 다르다. 슬픔의 模倣으로 終始할 수 있는 動作의 技師가 아닌 까닭 이다. (……) 人生에 恒時 正面하고 있으므로 괘사를 떨어 人氣를 左右하려는 어느 겨 를이 있으랴. 그러니까 울음을 俳優보다 삼가야 한다. (……)

讀者야말로 끝까지 쌀쌀한대로 견디지 못한다. 作品이 다시 振幅과 波動을 가짐이 다.225)

정지용의 시론 「시의 위의」가 단순히 감정을 노출하지 않아야 한다는 기법의 차원 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시인이 “슬픔”을 “模倣“하는 자가 아니며 ”人生에 恒時 正面하고 있”는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임은 시인과 배우의 차이에 관하여 이 어지는 대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감정’을 경험하고 처리하는 시인과 배우의 태도와 그 차이에 주목함으로써 정지용은 시인이 모방이라는 간접화된 방식이 아 닌 ‘슬픔을 항시 정면하고 있는 존재’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은 이처럼 인생에서 항시 슬픔을 정시하고 있는 시인이 “괘사를 떨”지 않고 오로지 작품 속 에 그러한 감정들을 응축시키면, 작품을 통해 드러난 “振幅과 波動”에 독자 또한

“쌀쌀”함을 넘어서 공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따라서 정지용의 시론 「 시의 위의」는 몸가짐으로서의 감정의 제어도 시의 기교 차원에 관한 지침도 아닌, 인생의 정면을 응시하는 시인과 독자가 작품 속에 응축된 감정을 통해 서로 매개 225) 정지용, 「시의 위의」, 문장 10, 1939. 11; 정지용, 지용문학독본 , 박문출판사,

1948, 196~198면.

될 수 있는 교감의 세계에 관한 일종의 감정론, 감정시론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윤동주가 ‘안으로 열하고 겉으로 서늘옵기’로서의 시인의 태도 혹은 그러 한 시인의 태도를 거쳐 작품 속에 진폭과 파동을 지닌 채 응축되어 있는 감정을

‘熱’과 ‘靜’의 두 글자로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정지용이 제시한 서늘함을 단지 감각적인 서늘함, 감정의 배제상태에 관한 표현이 아니라 “人生에 恒時 正面하고 있는 시”인의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의 의미로 이해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윤동 주의 ‘熱’은 정지용의 ‘熱하다’로부터 반복된 것이지만 정지용의 ‘서늘함’을 ‘靜’으 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윤동주가 정지용의 시론을 감정론, 김정시론으로 받아들 였으며, ‘서늘함’의 의미에 대한 표면적인 이해를 벗어난 깊은 이해의 수준에 도달 해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처럼 윤동주는 정지용의 감정론, 감정시론을 숙독하고 그 사유를 정지용시집 에 주석방식으로 적용해보며 ‘단권화하는’ 지속적인 이해와 대화의 과정을 거치면 서 시인에 대한 동반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는 두 시인의 관계가 작품 내적인 차원에서 단방향적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시인의 사유에 교감하는 방식 을 거치며 상호적으로 구축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상호성은 가필을 통 한 시집 단권화의 방식에서 보듯 작품을 창작하는 시인의 삶을 둘러싼 일상인으로 서의 삶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해방공간은 문장 폐간기까지 각각 문단의 전방과 후방에서 시인-독자/

문학청년 혹은 청년시인-소년시인으로 존재했던 두 시인의 관계 혹은 구도가 상호 영향관계로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해방공간의 기성 시인 정지용에 의해 윤동주가 발견되고, 윤동주의 시와 시인됨에 정지용이 격동됨에 따라 두 시인의 영향관계가 정지용→윤동주의 관계로 전도되고 확장되었으며, 이로써 해방을 전후로 두 시인 간에는 상호관계의 연속성이 형성된 것이다. 이 같은 전도에는, 윤동주의 죽음으로 인한 작고시인과 생존시인이라는 구도가 부가된 것 외에 본 절의 도입부에서 언급 한 것과 같이 해방 직후 정지용이 경험한 음영적 현실인 ‘창조적 무기력증’이라는 상황이 개재되어 있었다. 해방 직후 상황시 세 편을 내놓았을 뿐인 정지용이 시와 시인에 관하여 발언하게 되는 기점에 ‘윤동주의 일’이 있다.

윤동주 2주기(1947.2.16)를 앞둔 1947년 2월 13일, 윤동주 유고시편 중 하나인

「쉽게 씨워진 詩」를 세상에 알린 것이 정지용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1946년 10 월부터 경향신문 초대주간으로 재직 중이던 정지용은 같은 직장 내 조사반원이 던 강처중으로부터 윤동주 시고를 입수한 것이다.226)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시절 문우회 동기였던 강처중이 1942년 봄, 도일기의 윤동주로부터 우송받은 다섯 편의 226) 송우혜, 윤동주평전 , 서정시학,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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