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전후 정지용의 감정공동체와 ‘초혼적 글쓰기’
3.3. 문장 이후의 감정공동체와 ‘해방기 문장파’
본 절에서는 일제 말기 잡지 문장 의 방향 조정과 폐간을 둘러싸고 ‘집단감정’
을 경험한 문학인들이 해방 전후 문장 의 감정공동체로 결속되는 과정을 살펴본 다. 나아가 이 같은 문장 감정공동체의 토대 위에서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가
‘해방기 문장파’로 나아가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의 문장 재간행을 정부수립기의 주요한 문학적 실천의 의미로 재매김한다.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 은 1941년 9월 15일 문장사(文章社)에서 김연만을 저작 겸 발행인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는 문장사(文章社)를 발행소로 하던 잡지 문 장 이 1941년 4월 폐간되고 다섯 달 뒤의 일이었다. 백록담 이 출간되던 무렵을 해방공간의 정지용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前에 評論工夫를 한 履歷이 있었더라면 이제 와서 이 一文을 草하기가 수월하였을걸―
詩人 소리만 들어온 것이 늦게 여간 괴롭지 않고 (……)
이러한 괴로움이 日帝 發惡期에 들어 文章 이 廢刊 當할 무렵에 매우 심하였다. 그
무렵에 나의 詩集 白鹿潭 이 主題 街頭에 나오게 된 것이다.315)
백록담 이 ‘ 문장 폐간 무렵 主題에 街頭로 나오게 되었다’는 진술은 시집이 출 간된 시점이 문장 과 문장사(文章社)라는 문학의 기반이 사라진 상황이었다는 것, 그러한 상황에서 백록담 은 출간되었다는 역설을 말해준다. 백록담 은 잡지가 폐 간된 발행소를 장소화하면서 문장사(文章社)의 마지막 책으로 출간되었다.
문장사(文章社)를 장소화하며 출간된 시집 백록담 에는 따라서 한 사람의 개인 저작물, 한 권의 시집 단위를 초과하는 공동체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 함의는 백록담 이 작품집의 형태로나마 폐간된 문장 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념호마다 작품집 형태를 취한 문장 의 잡지로서의 개성과 긴밀히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316) 백록담 을 예비하는 성격의 「신작정지용 시집: 도굴」( 문장 1941. 1) 또한 소시집의 형태로 발표된 것이었다. 이처럼 문 장 을 선행 발표지면으로 주로 삼았던 정지용의 백록담 준비기라는 맥락에 비추 어볼 때, 백록담 은 개인시집인 동시에 작품집 형태의 문장 이라는 공동체적 의 미를 함께 내포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작정지용시집」을 비롯하여 백록담 제1부의 근작 15편 가운데에서도 13편이 모두 문장 에 발표된 작품들이었다는 사실이 문장 과 백록담 의 직접적인 연관 성을 말해준다. 정지용은 1939년 3월 「장수산 1·2」(1939.3)에서부터 「신작정지용 시집」(1941.1)에 이르는 백록담 제1부 시편의 기초를 문장 에서 마련해 나갔던 것이다. 이는 정지용에게 문장 이 시부문 추천위원으로서의 활동 무대였을 뿐 아 니라 백록담 을 준비하는 시공간이었음을 말해준다.317)
백록담 출간이 갖는 또 하나의 공동체적 의미는 백록담 이 문장사(文章社)의 이름으로 마지막에 출간된 조선어문학 서적출판물이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특히 그것은 아래의 <표 4>에서와 같이 이병기의 가람시조집 (1939)과 이태준의 문장 강화 (1940)를 이으며 출간되었다. 문장 은 폐간되었으나 ‘ 문장 파’ 3인이 조선 문단에 대하여 지도 역할을 했던 시조, 산문, 시를 중심으로 한 문장 의 흔적과 명맥은 백록담 까지의 완간으로 이어졌다.
315) 지용, 「조선시의 반성」, 문장 3권 5호, 1948. 10(강조-인용자).
316) 문장 1939년 임시증간호 「創作三十二人集」, 2주년 기념호 등의 기획이 그러한 것이 다.
317) 이 시기에 정지용은 「신작정지용시집」과 긴밀한 관련을 보이게 되는 평양·의주·선천·오 룡배 여행을 떠나는데, 정지용이 북선기행의 현장에서 보낸 편지가 문장 편집부로 도 착하여 그것이 여묵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이는 「장수산」과 「백록담」-북선기행- 문장 -「신작정지용시집」이 매우 긴밀한 관계로 연결된 채 정지용의 백록담 을 향해 가고 있 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 문장 파’ 3인의 저작집 완간 과정: 발행소 문장사(文章社)의 출간 목록을 중심으로>
이처럼 정지용의 백록담 은 개인시집의 의미를 넘어서 문장사(文章社)와 문장 의 명맥을 유지하는 공동체로서의 상징적인 의미가 확인되는 시집이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또 하나의 정황적 근거는 일제 말기의 출판 상황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폐간을 석 달 여 앞둔 문장 1941년 신년호에는 문장사(文章社)의 동경지부가 설 치되었다는 사고가 실렸다.318) 같은 해 9월 백록담 을 끝으로 문장사(文章社)의 이름으로는 더 이상 서적출판물이 간행되지 않은 데 반해 동경의 ‘日本文章社’라는 곳에서는 전시 문학 출판물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319) 日本文章社가 문장사(文章 社)의 이름이나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거나 탈취한 단체였는지의 여부는 자료 의 확인을 거쳐 고증될 필요가 있을 것이나, 문장사(文章社)의 동경지부가 설치된 시점이 문장 의 폐간을 불과 석 달 여 앞둔 무렵이었고, 日本文章社의 소재지가 동경이었다는 두 가지 사실은 체제 순응을 거부하고 폐간을 결정한 문장사(文章社) 의 운명과 日本文章社의 등장을 인과관계로 바라보게 한다. 내선일체라는 하나의 길 앞에서 백록담 은 문장사(文章社)라는 이름을 유지한 채 없는 길을 내며 출간 된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320)
이처럼 시집 백록담 이 문장 도 문장사(文章社)도 사라지며 조선어문학 활동을 위한 기반이 상실된 지점 위에서 문장사(文章社)를 발행소로 출간되었다는 것은 문 장사(文章社)의 명맥을 ‘街頭에’ 얼마간 되살린 일이 된다. 또 그것은 암흑기의 더 318) 「여묵」, 문장 3권 1호, 문장사, 1941. 1, 196면.
319) 문장 의 폐간으로 문장사(文章社)가 시효를 다한 이후 일본 동경에서는 日本文章社라 는 이름의 출판사가 일시적으로 등장하여 前本一男 편, 麥の穗ずれ (1943)와 藤の花:
傷痍軍人創作集 (1943) 두 권의 단행본을 출간하였다. 日本文章社가 문장사(文章社)의 이름이나 정체성을 의식적으로 모방하거나 탈취한 단체였는지 등의 여부는 관련 1, 2차 자료의 확인을 거쳐 고증될 필요가 있다. 다만, 문장사(文章社) 동경지부가 설치된 시점 이 문장 의 폐간을 불과 석 달 여 앞둔 무렵이었고, 日本文章社의 소재지가 동경이었다 는 두 가지 사실은 일본 총독부의 체제 순응에 대한 종용을 거부한 데 따른 문장사(文章 社)의 소멸과 日本文章社의 등장이 우연적이지만은 않은 관계로 엮여있는 것이었음을 방 증한다고 볼 수 있다.
320) ‘없는 길’을 낸 것, 이는 일제 말기 중일발발 이후 ‘시대적 우연의 수리’를 비판한 이효 석의 사유에 비견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이효석의 「哈爾瀕」에 나타난 현실 인식 의 태도에 대해서는 방민호, 「이효석과 하얼빈」, 현대소설연구 35, 한국현대소설학회, 2007, 62면.
연도 1938 1939 1940 1941
단행본 저자명 박태원 김상용 이병기 이태준 정지용
저서명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망향 가람시조집 문장강화 백록담
정기간행물 문장 (1939.2. 창간 ~ 1941.4. 폐간)
짙은 어둠 속으로 나아가기를 자처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분위기와 달리 간행을 미루지 않았고 사라진 문장사(文章社)를 장소화하는 방식으로 백록담 을 출간함으 로써 정지용은 암흑기로 가속화되는 더 가파른 경사면에 자신의 시세계를 위치시 켰다.
백록담 의 출간을 보류하지 않고 암흑기의 더 깊은 심부로 밀어넣은 것은 여러 가지 위험을 무릅쓴 한 개인의 시대적 극기이면서, 문학사적으로는 윤동주와 정지 용을 일제 말기의 동보적인 시간 속에서 서로 함께, 또 각자 문학적으로 운신하게 한 결과로 이어졌다. 본고의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병원」을 기점으로 시작된 윤 동주의 후기시는 정지용의 백록담 준비기 시편의 ‘최저낙원’의 기호와 함께 ‘白 鹿’, ‘白樺’, 그리고 ‘흰 그림자’의 환유 관계로 이어지는 ‘흰 빛’의 심상을 내면화 하고 있다. ‘흰 빛’의 시세계를 대표하면서 백록담 이 간행됨으로써 어둠 속에서 음각적으로 드러나는 ‘흰 빛’의 심상을 공유한 윤동주의 ‘흰 그림자 시편’과 백록 담 의 세계 사이의 거리는 시간적으로 좁혀질 수 있었다. 따라서 문학의 기반이 상 실된 이후에 출간된 백록담 으로부터 읽어내게 되는 것은, 시대착오성이 아니라 문장 의 명맥이며 특수한 예외적 개인과의 문학사적 감정공동체가 새롭게 생성되 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잡지의 폐간에 따른 문학적 활동 기반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정지용이 시집을 출간함으로써 문장 과 문장파 3인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특수한 예외적 개인 윤동주와의 문학사적 감정공동체를 아로새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으로 가능 하였는가. 이는 정세의 변화에 따라서 작은 형태로 유연하게 축소되고 응집되는 문장 파 내부의 여러 관계망에 의해 가능했던 것이라고 본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백록담 의 저작 겸 발행인의 이름에는 문장사(文章社)의 사주 김연만의 이름이 다 시 등장하고 있다. 잡지 문장 위에서 문장 파 3인과 사주의 관계라는 넓은 형 태로 존재했던 문장 의 네트워크가 정지용-김연만의 형태로 축소된 것이다. 이처 럼 관계망이 축소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개인 작품집 형태의 출간물이라는 특수한 정황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것이다. 그러나 ‘主題 街頭에 어렵게 나온’ 백록담 을 ‘폐간되지 않은 문장 ’이라는 운명의 의미로 바라본다고 한다면, 이는 넓은 형 태의 관계를 작은 형태로나마 보전함으로써 명맥을 유지하고 문학적인 운신을 도 모한 경우가 된다.
해방 이후 문장 재간행을 도모한 이병기-이태준의 관계321) 또한 작은 문학 집 321) 이병기,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144면; 방민호, 「해방 공간과 6.25전쟁 속의
가람 이병기」, 서정시학 25권 4호, 서정시학, 2015, 189면 재참조. 방민호는 1946년 2 월 이태준이 이병기를 찾아가 문장 재간행과 주요 문헌의 출판을 상의한 일을 문장 파 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봐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