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정지용 내면화의 역사와 감정공동체의 지류들
4.1. 분단 이후 정지용 후속 시단의 한 전개
4.1.2. 정지용-조지훈과 ‘슬픔’의 동위
앞서 3장에서 살펴본 해방 전후의 정지용 시단 가운데에서도 정지용과 동류적인 감정을 바탕으로 감정공동체를 형성한 두 시인은 윤동주와 조지훈이라고 할 수 있 다. 이들은 모두 사숙과 추천의 방식으로 정지용의 세계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세계 를 조정하고 굴절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또한 앞서 3장에서 정리한 해방 전후로 확장된 ‘정지용 시단’ 가운데 특정한 유파로 분류되지 않는 ‘특수한 예외적 개인들’이라 할 수 있다.
윤동주 후기시의 기점이 되는 「병원」은 문장 을 통해 발표되고 있었던 정지용 의 백록담 준비기 시편들과 동보적인 관계를 보이고 있었다. 조지훈은 세기말적 인 탐미주의의 시풍을 벗어나 정지용이 언표화해준 ‘신고전’의 세계를 개척해 나갔 다. 조지훈은 「고풍의상」이 이전의 시풍과 완전히 다른 것이었으며, 이후 정지용에 의해 추천이 완료되기까지 ‘신고전’의 세계에 부합하는 시를 창작하기 위해 고심했 음을 회고한 바 있다.510) 윤동주와 조지훈의 이 같은 자기 조정의 기록은 두 시인 이 백록담 준비기의 정지용과 동보적인 관계에서 시를 써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509) 송하춘·이남호 편, 1950년대의 시인들 , 나남, 1994.
510) 조지훈, 「나의 역정」, 고대문화 1, 1955. 12. 5.
방증한다.
이들이 선배시인에 대하여 동보적인 관계를 구축한 것은 비단 창작의 측면에서 만이 아니었다. 윤동주와 조지훈은 정지용의 백록담 준비기와 그것의 결실이라고 할 시집 백록담 , 그리고 문장 이 폐간되는 것을 차례로 지켜보았다. 이들은 문 장 의 폐간 소식을 접하고 후배시인으로서의 절망감을 표출하였다. 문장 의 폐간 이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릿쿄대학, 도시샤대학으로 진학한 윤동주는 암흑기 현실에 대한 정지용과의 동보적인 감정관계 속에서 후기시를 창작하였다. 조지훈이 문장 폐간을 대하고 경험한 절망감은 월정사 외전강사 시절을 회고한 해방 후 산문을 통해 확인된다.
한암(漢岩) 노승정(老僧正)―이번 동란중에 입적하셨다―의 선연(禪筵)에 참(參)해 있 을 때 《문장》지 폐간호를 받았었다.
술이 두꺼운 그 폐간호에는 졸시 <정야>(靜夜)가 실려 있었다.
한두 개 남았던 은행잎도 간밤에 다 떨리고 바람이 맑고 차기가 새하얀데
말 없는 밤 작은 망아지의 마판 꿀리는 소릴 들으며 산골 주막방 이미 불을 끈 지 오랜 방에서
달빛을 받으며 나는 앉았다 잠이 오질 않는다 풀버레 소리도 끊어졌다
라는 시. 폐간호에는 너무나 부합하는 시였다.
그러나 이 시는 《문장》 폐간호를 위하여 써 보낸 시가 아니요, 그 잡지에 투고했다가 낙선된 작품이었다. 폐간호를 꾸미기 위해서 원고 청탁을 두 번이나 보내도 어디 간지 소식이 없으니까 몰서(沒書)한 원고 뭉텅이에서 이 시를 골라 실은 모양이었다.
그저 가슴이 아플 따름이었다. (……)
나는 이 방우산장에서 일본의 진주만 폭격도, 그리고 싱가포르 함락의 소식도 들었 다. 실의의 청년은 이제 실신(失神)의 인(人)이 되었다.511)
조선어학회 검거 사건 이후 조지훈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머리 긴 중으로 학승들을 가르쳤다. 이처럼 문장 폐간 즈음의 조지훈은 속세를 떠나 있었으므로 잡지의 폐 511) 조지훈, 「속(續) 방우산장기」, 1953, 조지훈전집 4: 수필의 미학 , 나남, 1996, 42~43
면.
간이 결정된 무렵 문장 사에서 보내온 편지를 받아볼 수 없었다. 월정사의 조지훈 이 받아본 것은 문장 폐간호였으며, 폐간호를 통해서야 조지훈은 정지용에게서 일종의 ‘편지-시’를 수신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위에 인용된 시 「정야」로, 이는 자신이 오래 전 정지용에게 보냈다가 낙선된 작품이었다. 조지훈에게 그것은 일제 말기 제국의 승전소식과 함께 실의와 낙담의 요소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깊은 슬픔 끝에 찾아온 것은 ‘잊었던 시’에 대한 마음의 회복이었고, ‘슬프지 않은 시’를 쓰겠다는 기약이었다.
앞서 2장에서 살펴본 윤동주-정지용 사이의 편지-시의 내용과 이를 종합하여 볼 때,512) 일제 말기의 백록담 과 문장 이후 정지용-윤동주-조지훈 사이에서는 일 종의 ‘편지-시’가 오갔다고 할 수 있다. 해방공간의 정지용이 수신한 것이 윤동주 의 ‘흰 그림자 시편’이라면, 조지훈은 문장 폐간 이후 자신의 낙선작인 「정야」를 일종의 ‘편지-시’로 전달 받았다. 이처럼 실질적인 문학 활동의 기반이 상실된 이 후에도 시인들 사이에 형성된 감정적 관계망, 곧 감정공동체는 시인들의 시가 유동 하고 순환하는 장소였다.
무명의 윤동주와 머리 긴 외전강사 조지훈은 일제 말기 문단의 후방에서 정지용 의 시적 공백을 대리보충하고 있었다. 이처럼 정지용에게 ‘시가 없어지는’ 기점이 라고 할 백록담 이후 일제 말기 시단에 정지용의 부재, 결핍을 보충하는 새로운 시세계가 정지용 시단에 의해 전개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백록담 의 시인 정지용이 일제 말기 종교보국논리에 따른 국민문학을 일시적으로 창작하였을 때, 선배시인의 음영적 현실의 다른 한켠에서는 조지훈과 윤동주가 각각 오대산 월 정사와 교토에서 이전 시세계와 구분되는 시의식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윤동주와 조지훈은 모두 정지용의 「장수산 2」에 바탕을 둔 ‘슬프지도 않은 시’를 바라서 쓰고자 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정지용의 「장수산 2」와 시론 「시의 위의」에 바탕을 둔 시인의 ‘올연함’, 곧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의 태도를 말한다. 그 러나 이들은 정지용의 백록담 준비기와 완전히 보조를 맞추어서 자신들의 존재 의 지반을 확보함에 따른 흔들림 없는 장수산의 세계513)로 곧바로 들어서지는 못 했다.
이들이 ‘슬프지 않은 시’로 나아가는 데에는 시차가 동반되었다. ‘슬프지도 않음’
이라는 시인의 존재론은 두 시인에게 미결된 시인의 감정으로 남아 있었으며, 정지 용과도 같은 ‘슬프지도 않은 시’를 쓰고자 했던 이들의 감정적 이해가 밑바탕이 되 어 이들은 백록담 이후 각자의 시간 속에서 ‘흰 그림자’ 시편과 청록집 이후의 512) 본고의 2장 2절 1항을 참조.
513) 신범순, 앞의 글, 220면.
시세계로 도달할 수 있었다. 조지훈에게 그것은 조지훈시선 (1956)과 역사 앞에 서 (1959)로 이어졌다.
백록담 이후 ‘흰 그림자’ 시편 창작기의 윤동주의 시세계가 자신을 ‘시인’으로 인식하는 지점까지 가파르게 상승하고,514) 조지훈이 문장 폐간에 오열한 월정사 외전강사 시절 ‘슬프지도 않은 시’를 쓰기 위해 기교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장 면이 그러한 이행의 과정과 선배 시인에 대한 대리 보충적 지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전변된 시의식은 정지용의 ‘슬프지도 않은’ 시인의 존재론을 계승한 것이라 고 할 수 있다.
조지훈은 정지용과 마찬가지로 마흔 여덟 해를 살았다. 전쟁이 나자 아버지와 문단의 아버지를 동시에 잃었다. 조지훈 부친의 납북정황은 정지용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문장 의 폐간 소식을 접한 조지훈의 슬픔은 수평적 세대로서는 윤동주의 슬픔이기도 하다. 윤석성은 조지훈이 경험한 현실을 “견딜 수 없는 내상”으로 설명 한다. 1950년의 조지훈은 조부와 부친, 그리고 정지용을 한꺼번에 상실하였다. 식 민지시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전쟁기를 경험하면서 몰살에 가까운 일가의 상실을 경험한 조지훈은 누이동생에게 우리의 상실은 누구의 잘못이라기보다 너무 절망했 던 까닭이라 고백한 바 있다. 그렇게 말한 조지훈의 내면풍경은 일제 말기 암흑기 이후 음영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정지용의 형상과 겹쳐진다.
이제 제난 일을 뉘우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만 대구에 와서 비로소 후회한 것은 씨나 전해야 한다고 처자까지 정처없이 떠나 보내고 부자가 생사를 운명에 맡기려고 의논했 던 것이 잘못이라기보다는 너무 절망했던 까닭인가 한다. 석 달 뒤 전세가 좋아져서 내 가 군대를 따라 서울에 들어갔을 때의 아픈 심경을 너는 알아줄 것이다. (...) 누이야, 나는 더 쓰지 않으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의리 때문에 오늘의 길을 취하셨고 나마저 섣부른 의리에 몸이 매어 부조에게 죄를 짓게 되었구나. (...) 나는 지금도 소식 없는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영 단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가신 이나 남은 이가 오랜 동 안을 그리움에 고통이 있을 뿐이라 믿는다.515)
따라서 조지훈은 ‘청록파’라는 유파 단위로부터 분리되어 정지용과의 감정공동체로 독해될 가능성이 충분한 시인이다. 정지용과의 관계에서 조지훈은 청록3인으로서 514) 윤동주의 ‘시인자격’은 윤동주 사후에 유족들과 정지용에 의해 ‘시인’이라고 명명되었
을 때에 부여된 것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에 관해서는 정우택, 앞의 글. 그런데 이에 앞서 유고·편지-시 「쉽게 씌어진 시」(1942)의 시적 화자가 자신의 시인됨을 자각하는 시 적인 문맥 속에서도 윤동주의 ‘시인자격’은 부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윤동주의 ‘시인 자격’, 곧 시인됨은 이처럼 시인의 안팎에서 여러 계기들을 거치며 부여되고 보증된 것이 라 할 수 있다.
515) 조지훈, 「누이 이실에게」, 조지훈 전집 4: 수필의 미학 , 나남, 1996, 491~49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