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전후 정지용의 감정공동체와 ‘초혼적 글쓰기’
2.2. 해방 전후 정지용과 윤동주의 감정공동체
2.2.2. 역설적 창조로서의 ‘초혼적 글쓰기’
형태를 띠고 있다. 이들의 유사성은 여러 개의 직선을 활용해 빛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러나 이는 연습화의 단계에서 시도된 것이며, 이정의 연습화는 완성본과 비 교할 때 형상이나 채색의 방식과 같은 기본적인 부분에서부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정의 판화가 후쿠자와 사쿠이치의 화풍을 비자각적으로 수용한 결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는 초판본 윤동주 시집의 자켓 표지화를 후쿠자와 사쿠이치에 대한 취향을 바탕으로 새로운 화풍을 시도한 결과로 바라볼 수 있는 이유가 된다.
257) 윤동주 초판본 시집의 표지화가 당대 전위시인들의 시집처럼 목판화로 제작되었다는 것은 당시 초판본 시집 편집자들에게 윤동주가 어떤 계열의 시인으로 배치되었는지를 보 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하다. 정우택은 정음사의 출판목록을 바탕으로 윤동주가 조 선문학가동맹 시인들과 나란히 시집이 출간된 점에 주목한 바 있다(정우택, 앞의 글). 정 지용과 (비)직접적인 배움의 관계에 있었던 신진시인들, 가령 김상훈이나 상민의 개인시 집 표지화 또한 목판화로 제작되었다.
258) 윤동주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의 본래 제목이 ‘병원’이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뿐만 아니라 윤동주는 「병원」 등 3편을 창작한 1940년부터 도일 직전까지 집중적 으로 시를 썼으므로, 윤동주의 후기시는 병원 이라는 시집으로 묶일 만한 부피의 것이 었다.
259) 신범순, 한국현대시사의 매듭과 혼 , 민지사, 1992, 231~232면.
해방공간의 기성 시인 정지용은 동세대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던 일종의 세대적 증상으로서의 ‘창조적 무기력증’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원고를 생산해야 했던 생활 조건에 처해 있었다. 이 두 가지의 음영적 현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해방공간 정지용의 산문은 그 문면에 ‘창조적 무기력증’과 함께 자조 의 감정이 그대로 표출되는 자기고백적인 스타일을 갖게 된다. 본 소절에서는 이러 한 음영적 현실 속에서의 정지용이 작고시인과 신진시인들에 대한 자화상적 감정 과 형제의식260)을 바탕으로 지기(知己)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창조해낸 양식이 ‘초혼적 글쓰기’임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것이 역설적 창조의 지점인 까닭 은, 정지용 문학의 한 본령인 우정, 지기(知己)라는 감정이 음영적 현실과 교차되 면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견고하게 양식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초혼적 글쓰기’의 가장 이른 형태는 전국문학자대회의 작고시인 추도사 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261) 파상력이 구축으로 이어지는 것이듯, ‘초혼적 글 쓰기’는 작고시인과 신진시인 사이의 단층을 해방공간의 기성 시인이 매개하는 방 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해방공간에는 작고시인에 대한 회고는 물론이고, 신 진시인의 창작집에 대한 서·발문을 제공하거나 출판을 주선하는 등 기성 시인의 감 정적 결속 관계 아래에서 세대를 격한 시인들 간의 관계망이 형성되었다. 그 중심 에는 비카프출신 조선문학가동맹의 기성 시인 오장환, 정지용, 김기림이 있었 다.262) 신진에게 추진체가 되고 있는 이들의 활동은 시간상으로는 해방 직후의 기 행(奇行) 혹은 ‘개인적 진실성’을 표출하는 형태로 조직의 창작노선과 불화한 이후 의 것이며, 조직 차원의 신진육성사업과도 일정한 차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 다.263) 오장환과 김소월, 정지용과 윤동주, 그리고 김기림과 김철수·조병화 사이의
‘초혼적 글쓰기’에 기반한 감정적 결속구도는 조선문학가동맹 기성 시인들이 조직 으로부터 외곽화된 시점인 해방 후반기에 구축되었다. 기성 시인들은 작고-신진시 인들에 대한 ‘감정인 되기’를 수행함으로써 두 세대를 매개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 발견에 이르기도 하였다.264) ‘초혼적 글쓰기’가 시 비평의 차원에서 비평 대상에 260) 정지용, 「나의 시」, 조선중앙일보 , 1949. 1. 30.
261) 작고시인들에 대한 각별한 애도의 표시는 김기림, 「우리 시의 방향」, 조선문학가동맹 편, 최원식 해제, 건설기의 조선문학 , 1946. 6, 온누리, 1988, 62면; 김기림, 「 전위시 인집 에 부침」, 김기림 전집 2 , 심설당, 1988, 149면.
262) 정지용은 윤동주를, 오장환은 소월을 발견하며, 김기림은 출판사 산호장을 중심으로 식 민지시기의 서정시 혹은 모더니즘 계보를 이을 만한 신진시인을 발견한다. 신진을 신진 으로서 발견한 김기림은 물론이거니와 정지용과 오장환이 발견한 두 시인은 해방공간의 맥락 속에서 소환된 것이다.
263) 이는 해방 직후 김오성이 당의 차원에서 제시했던 신인육성사업과는 시간적으로나 방 법면에서나 차이를 보인 신인의 발견이었다. 김오성, 「계몽운동의 전개와 신인의 육성」, 조선문학가동맹 편, 최원식 해제, 앞의 책, 141~143면.
대하여 감정적으로 결속되는 형태의 글쓰기, 곧 감정인되기로서의 글쓰기의 양상으 로 나타났다면, 오장환, 설정식 등 해방공간의 조선문학가동맹 시인의 시의 차원에 서 그것은 자기 자신의 감정, 감각, 기호 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존재연속성으 로서의 개인의 서정성을 돌올히 드러내는 양식으로 나타나고 있었다.265)
윤동주의 ‘흰 그림자’ 시편에서부터 시작된 정지용의 시 비평과 시인됨의 발견 과정 또한 이처럼 해방 후반부에 조선문학가동맹 기성 시인들에 의해 주도된 집단 화된 현상 가운데 위치된다. 해방공간의 정지용은 ‘윤동주의 일’을 해나갔던 1947 년을 기점으로 시인에 대한 초혼의 감정을 추천과 서문의 형태로 양식화하였다.
‘윤동주의 일’이 정지용에게 ‘초혼적 글쓰기’의 기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이유 는, 이때를 기점으로 정지용은 월트 휘트먼에 대한 심정적 재해석과 이수형, 설정 식 등 동생 시인들에 대한 시 비평에 주력해 나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장 (1939~1941)의 폐간 경위에 관한 수필 「알파 오메가」(1948) 또한 일제 말기와 해 방공간으로 나뉘어진 두 시간의 때를 간극 없이 잇는 것이라는 점에서 해방공간 정지용의 ‘초혼적 글쓰기’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해방 이전의 시론과 산문인 「시와 언어」와 「비」를 해방공간의 시론인 「조선시의 반성」(1948)과 함께 나란히 산문집 으로 재수록한 것은 파편화된 자기 존재연속성에 대한 회복과 구축으로서의 ‘초혼 적 글쓰기’가 작가적 수행의 차원으로 나타난 지점이다.
정지용에게 ‘초혼적 글쓰기’는 조금 더 적극적인 차원에서 의미화되고 있었다.
정지용에게 그것은 “정성과 우정의 기쁨”266)에서 쓰인, 그러하므로 남에 대해 글이 지만 결국 나의 글이 된다는 하나의 장르 인식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지용은 파상 력(破像力)에 입각한 이 새로운 스타일의 글들을 모아 자신의 두 번째 산문집인 산문 (1950) 제4부에 수록하였으며, 산문 의 서문에서는 이 같은 ‘초혼적 글쓰기’
에 대하여 자신의 분명한 장르의식을 밝혀두기도 하였다. ‘초혼적 글쓰기’를 산문 (1950) 속에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분류하고 정착시키기까지 정지용의 이 역설적 창조로서의 새로운 글쓰기는 1947~195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초혼적 글쓰기’는 윤동주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일회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정지용의 해방공간 문학에서 내적 연속성을 가지고 전개된 것이다.
문학사적인 맥락에서 바라볼 때 정지용을 비롯한 해방공간 기성 시인들의 ‘초혼 적 글쓰기’ 혹은 초혼의 감정에 입각한 문학사 연속론적 사유와 그 작업들은 남한 264) 때로 그 발견은 대상 안에서 ‘자기의 없음’을 발견하는 식이기도 했다. 가령, 오장환은
소월과 예세닌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그들과의 거리를 ‘자아의 형벌’을 내리 지 않은 것에서 찾는다.
265) 오장환과 설정식의 해방공간 시에서는 변화된 현실 속에서 표변하지 않는 자아의 모습 과, 청산되지 않는 개인적 서정성의 불수의적인 표출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266) 지용, 산문 , 동지사, 1949.
의 단정수립을 전후로 문학 의 공백기를 메워오던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의 활 동 거점마저 상실됨에 따라 유일하게 가능해진 글쓰기양식이 문인 간의 상호적·회 고적 비평일 수밖에 없었던 문학사, 문단사적인 현상과 엄밀히 분리되지 않는다.
정지용의 ‘초혼적 글쓰기’가 시 비평과 예술적 동반자들에 대한 비평의 차원에서 양식화되는 시점인 해방 후반부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해소로 인한 문단 공백기였고, 문장 의 두 번째 폐간으로 거점을 상실한 정지용을 비롯한 ‘조선문학가동맹 잔류 파’를 중심으로 문인비평이 이루어진 것이다. 정지용 등 기성 시인들에게서 연속성 을 갖고 이루어지고 있던 양식이 해방 후반부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잔류파’의 문학 활동 거점의 상실이라는 새로운 조건과 맞물리면서 문단사, 문학사적 현상으로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가령, 문장 의 ‘두 번째 폐간’ 이후 비평을 포기한 김동석은 여전히 ‘나’의 자의 식을 없이할 수 있는 장르인 소설을 쓰겠다고 1949년 새해 벽두에 다짐하였으며, 월북하기까지 셰익스피어 시극의 산문성을 탐구하였다. 그 성과를 엮은 두 번째 평 론집 부르조아의 인간상 의 신간평에서 정지용은 김동석에 대해 “나는 이 사람의 사람을 잘 안다. 참 좋은 사람이다.”라고 썼다. 이 같은 진술의 사사로움이, 상아 탑 이나 문장 과 같은 현실적인 공동 문학의 기반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있는 문 학 기반으로서의 감정공동체를 보여준다.
이처럼 해방 후반기 문학의 기반이 상실된 이후의 비평의 사사화에 경향에 대하 여, 단정수립기를 전후하여 대타적 정치담론이 상실되면서 급증한 것이 문인 간의 상호비평과 회고비평이며, 이는 비평정신에 저위하는 수준이라는 평가가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문인비평과 문학의 사사화 현상에 대한 평가는, 문학의 현실적인 기 반 회복에 대한 상징이자 문장 파에 대한 지기(知己) 감정의 수행 결과로 속간된
문장 마저 사라진 지점에서 ‘소문의 벽’에 갇힌 자들로 하여금 글쓰기를 연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을 동반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본 장의 2절 도입부에서 해방공간 정지용이 경험한 음영적 현실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해방 직후의 음영적 현실이었던 기성 시인으로서의 ‘창 조적 무기력증’을 극복하게 한 것이 윤동주를 향한 자화상적 감정과 ‘초혼적 글쓰 기’, 그리고 그것의 작가적 수행으로서의 문장 의 속간이라고 할 때, 그것이 좌절 된 이후 정지용은 글쓰기가 불가능해지고 또한 전향장치 속에서만 글쓰기가 가능 해졌던 두, 세 번째의 음영적 현실을 경험하였다. ‘초혼적 글쓰기’는 그러한 두, 세 번째의 음영적 현실에서 새로운 문학의 운신을 위한 장소로 기능하였을 뿐 아니라, 음영적 현실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상승의 힘으로 작용하였다.
「수수어-혈거축방」267)은 문장 의 두 번째 폐간기에 정지용이 처한 음영적 현실 과 정지용의 내면풍경을 보여주는 수필이다. 가장 큰 책임범위를 가지고 문장 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