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질화된 분쟁(intractable conflict)7)은 분쟁의 당사자 중 어느 한쪽이 승리하지 못했거나 평화적 합의를 위해 당사자들이 적극적으 로 협력하지 않은 상태가 장기간 지속되는 분쟁으로 개념화된다.8) 장기화된 분쟁(protracted conflict), 숙적관계(enduring rivalries), 악의적 분쟁(malignant conflict), 뿌리 깊은 분쟁(deep-rooted conflict) 등의 선행연구를 바탕으로9) Bar-Tal은 7개의 특징을 제 시하였다.10)
첫째, 고질화된 분쟁은 장기적(protracted)이다. 고질화된 분쟁 은 적어도 한 세대(25년) 이상 지속된 분쟁이다. 다시 말해 적어도 한 세대는 분쟁 상황에서 출생했으며 사회화되었다는 것이다. 분쟁 상황에서 출생한 세대는 적대 집단에 대한 반감과 분노를 포함한 분 쟁의 삶이 일상화, 습관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분쟁 상 황에서 출생·성장한 세대는 분쟁의 삶 이외에 다른 삶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삶, 평화의 삶은 구체성과 현실성이 결여 된 추상적 상상의 삶으로 치부되기 쉽다.
7) Intractable conflict는 고질화된 갈등, 해결하기 힘든 갈등, 다루기 어려운 갈등, 난해 한 갈등 등으로 지칭되고 있지만 본 연구에서는 고질화된 갈등으로 용어를 통일한다.
8) Louis Kriesberg, “Intractable Conflicts,” Peace Review, vol. 5, no. 4 (1993), pp.
417~419; Daniel Bar-Tal, “Sociopsychological Foundations of Intractable Conflicts,” American Behavioral Scientist, vol. 50, no. 11 (2007), pp. 1430~1431.
9) Edward E. Azar, The Management of Protracted Social Conflicts: Theory and Cases (Hampshire: Dartmouth Publishing Company, 1990), pp. 3~28; Gary Goertz and Paul F. Diehl, “Enduring Rivalries: Theoretical Constructs and Empirical Patterns,”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vol. 37, no. 2 (1993), pp. 147~171.
10) Daniel Bar-Tal, “Sociopsychological Foundations of Intractable Conflicts,”
pp. 1432~1435.
둘째, 고질화된 분쟁은 폭력적(violent)이다. 고질화된 분쟁은 전 면전, 국지전 및 테러 등 군인 및 민간인의 사망과 부상 등 물리적 폭력을 수반한다. 특히 사망과 관련한 사건은 적대 집단에 대해 강 력한 정서적 반응을 유도한다. 공동체는 생명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사회 구성원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을 정치권에 상기한다. 또한 개인과 집단의 안보 유지를 위한 위협과 복수에 대한 사회적 의지와 실현 방안에 대한 압력이 공동체 전반에 작동하게 된다.
셋째, 고질화된 분쟁은 총체적(total)이다. 분쟁은 분쟁 중인 공동 체와 개인의 존재 이유와 직결된다. 공동체의 생존, 유지를 위한 사 회적 목표와 요구, 공동체 및 개인의 가치 형성, 참전 및 입대 등 삶의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넷째, 고질화된 분쟁은 개인과 집단의 삶에 있어 중심적(central) 인 역할을 한다. 개인은 분쟁과 관련된 사건과 이슈에 항상 노출되 어 있기 때문에 분쟁과 관련된 생각들이 현저화(salient)되어 쉽게 접근이 가능한 심리적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분쟁의 현저성은 개인 의 인지과정(cognitive process)과 동기화(motivational process) 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분쟁과 관련된 정보에 보다 많은 초점이 주어지며, 분쟁과 관련된 정보를 중심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의사결 정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문제를 접근 하는 방식 역시 분쟁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리더십을 포함한 거의 모든 사회 제도와 기관 역시 분쟁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공공 의제에 영향을 미친다.
다섯째, 고질화된 분쟁은 제로섬 관계(zero-sum relation)이다.
분쟁의 당사자는 타협이나 절충, 양보를 허용하지 않는, 승리가 아 니면 패배라는 양자택일의 관계인 경우가 많다. 제로섬 관계는 상대
의 손해와 이익으로 나의 이익과 손해를 결정하게 되는 경향을 강화 한다. 결과적으로 제로섬 인식에서는 윈-윈(win-win)의 협상은 불 가능하다.
여섯째, 고질화된 분쟁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irresolvable) 분쟁이다.
분쟁의 당사자는 평화적 해결보다는 상대의 굴복을 통한 해결을 선 호한다. 하지만 승리가 가능하지 않게 때문에 패배하지 않는 분쟁 관리에 집중하게 되며 장기간의 분쟁에 대비한 전략 및 사회구조 변 화를 유도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고질화된 분쟁은 많은 자원을 소모하는(demand extensive investment) 분쟁이다. 군, 기술, 산업 전반, 심리적 자 원 등 대규모의 사회적 자원이 분쟁 관리 및 분쟁에 승리하기 위해 투여된다.
남북한의 관계, 그리고 한국의 북한에 대한 심리적 지향은 고질화 된 분쟁의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북 분단은 70년을 넘게 지 속되고 있다. 남북한은 분단 이후 한국전쟁이라는 전면전을 치렀으 며 분단의 역사는 테러와 국지전으로 점철되어 있다. 1953년 휴전협 정 이후 전쟁은 공식적으로 종식되지 않았다. 한국의 헌법은 암묵적 으로 북한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 붕괴, 북한 흡수에 의한 통일이 지난 70년을 지배했던 분쟁을 해결하는 방 식이었다. 체제 경쟁이라는 명목으로 경제적‧사회적 자원이 동원되 었으며 남북 분쟁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동원과 결속의 명분으 로 작동하였다. 북한에 대한 인식은 한국사회에서 좌‧우, 진보와 보 수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변수로 작동해왔으며 대북정책 선호에 대 한 남남갈등은 세대 갈등, 지역 갈등을 넘어서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갈등으로 악화되어 왔다. 따라서 남북한의 관계를 고질화된 분쟁으 로 분류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고질화된 분쟁 속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고 질화된 분쟁이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에 미치는 영향력을 파악하는 것은 고질화된 분쟁의 해소와 전환의 밑바탕이다. 전쟁, 테러, 갈등 과 같은 분쟁 상황은 공포감, 위협감, 적개심, 분노, 불확실성, 스트 레스, 고통, 정신적 외상(trauma), 결핍 등 삶의 모든 차원에서 극 도의 부정적 경험을 동반한다. 분쟁을 종식시킬 수 없는 상황에서 부정적 경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개인과 공동체는 생존을 위해 부 정적 상황에 적응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고질적인 분쟁에 처한 개인은 생존을 위한 적응을 도모하며 이는 물리적인 적응뿐만 아니라 심리적 적응을 포함한다. 고질적인 분쟁 상황에 대한 심리적 적응은 적어도 세 가지 목표를 만족시켜야 한 다. 첫째, 분쟁 상황에서의 박탈된 기본적 욕구(needs), 생리적 욕 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의 욕구, 존중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 구 등을 만족시켜야 한다. 둘째, 갈등상황이 유발하는 다양한 종류 의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특히 죽음과 부상 등 물리적 폭력이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갈등 상황은 정신적 외상을 비롯한 다 양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따라서 갈등 상황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집단적 수준과 개인적 수준에서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적대 집단과 갈등을 성공적으로 종식시키는 적응이어야 한다. 즉, 적대 집단을 굴복시키거나 적어도 적대 집단 에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는 적응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고질적인 분쟁 속에서 사람들은 기본적 욕구의 충족, 스트레스 관 리, 그리고 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서 정보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프리즘을 만든다. 이러한 프리즘은 분쟁의 기원, 분쟁의 책임, 그리 고 적대 집단의 의도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분쟁에 대한 인식론적 질문은 정보 해석의 기초를 제공한다. 다시 말해 분쟁
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사건, 사람, 상징 등의 정보를 해석하고 정보를 조직화한다. 분단과 6‧25 전쟁의 기원과 책임, 그리고 북한의 의도에 대한 판단이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주요 갈등의 원인이 었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분쟁에 기반을 둔 프리즘은 정 보의 획득, 선택, 해석, 일반화하는 사회-인지적 틀(social-cognitive framework)로 고착된다.
일반적으로 사회-인지적 틀은 객관적으로 작동하기보다는 편향 (bias)되어 있다. 분쟁 상황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사회-인지적 틀 은 분쟁 상황이 야기하는 강력한 자기 보호(safe)와 집단 안보에 대 한 동기로 인해 분쟁 유지의 방향으로 강하게 편향되어 있다.11) 구 체적으로 사회-인지적 틀이 정보를 처리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 다.12)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로운 관계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정보 들이 국민들에게 쉽게 수용되지 않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 분쟁에 관한 단서가 있다면 분쟁을 지지하는 신념(belief)이 자 동적으로 활성화된다.
∙ 분쟁을 지지하는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 며 기억된다. 분쟁 유지에 반하는 정보는 많은 경우 무시된다.
∙ 애매하거나 불확실한 정보는 분쟁을 지지하는 증거로 해석된다.
∙ 분쟁을 지지하는 정보만을 탐색한다.
11) Daniel Kahneman and Amos Tversky, “Conflict Resolution: A Cognitive Perspective,” in Preference, Belief, and Similarity, ed. Eldar Shafir (London: MIT Press, 2003), pp. 729~746; Robert H. Mnookin and Lee Ross, “Introduction,”
in Barriers to Conflict Resolution, eds. Kenneth Arrow et al. (New York: Norton
& Company, 1995), pp. 2~25; Lee Ross and Andrew Ward, “Psychological Barriers to Dispute Resolution,” in Advances in Experimental Social Psychology, vol. 27, ed. Mark P. Zanna (New York: Academic Press, 1995), pp. 255~304.
12) Daniel Bar-Tal and Eran Halperin, “Socio-Psychological Barriers to Conflict Resolution,” in Intergroup Conflicts and their Resolution: A Social Psychological Perspective, ed. Daniel Bar-Tal (New York: Psychology Press, 2011), pp. 227~228.
∙ 분쟁을 지지하는 정보에 대해서는 정보의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 분쟁과 관련된 사건을 판단, 결정, 평가, 원인의 추론 등을 할 때 분쟁을 지지하는 신념만을 사용한다.
∙ 적대 그룹의 행동과 경험 등 분쟁과 관련된 일에 대해 예측을 할 때 분쟁을 지지하는 증거만을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분쟁이 지속되거나 악화되는 방식으로 미래를 예측한다.
∙ 개인과 집단의 행동 역시 분쟁을 지지하는 신념에 의해 이루어 진다.
분쟁의 강도가 강할수록 분쟁의 사회-인지적 틀과 개인‧집단의 안보에 대한 동기와의 결합 강도는 더욱 강해지면서 편향의 강도 역시 강해진다. 또한 갈등의 기간이 길어지면서 선택되고 축적된 정보는 신념으로 강화된다. 고질화된 분쟁 속의 분쟁이 초래한 사회-인지적 틀을 공유하는 개인들이 많아질수록 편향되고 왜곡된 신념은 분쟁 사회를 유지하는 일종의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가 된다.
분쟁 상황, 특히 고질화된 분쟁 상황에서 심리적‧문화적 인프라 스트럭처는 집단 생존을 위해 사회와 국가에 대한 충성심, 개인의 희 생, 사회적 결속을 강조하며 분쟁의 승리를 위해 용기, 집요함, 투 지, 통일성을 강요하면서 사회적 동원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안정화 된다. 또한 고질화된 분쟁 사회의 인프라스트럭처는 사회적 규범에 반영되고 교육, 제도에 투영되어 구성원의 분쟁의 심리적 틀을 다시 강화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분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응기제로 시작된 사회-인지적 틀 그리고 이를 통해 형성된 심리적‧문화적 인프라스트럭처는 고질화된 분쟁 속에서 구성원들 의 생존에는 도움이 되지만 고질화된 분쟁을 해결하기보다는 강화 하는 것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