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실현을 위한 역사적 진전 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반도 평화 실현을 위한 정치적, 제도적 틀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역사적인 남북, 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실무급 회담 등 정부 간 협상과 협력이 지속되고 있다. 한반도를 둘 러싼 협상과 협력의 핵심 목표는 종전 선언, 평화협정, 평화체제, 체제보장, 비핵화 등 안보적 과제에 대한 합의를 통해 제도화된 한 반도 평화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대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담론은 관련국 간 합의(agreement)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이행방안과 로드맵에 집중되어 있다.
한국 전쟁을 공식적으로 종식하고, 남북, 북미 간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합의가 한반도 평화 실현에 미치는 역사적 영향을 부정하 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안보 과제, 외교 관계에 대한 정부 간 합의는 평화 실현의 필요조건(necessary condition)이지만 충분조건(sufficient condition)은 아니다. 다시 말해 종전선언, 평 화협정 및 평화체제, 북미 수교 등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반드시 요 구되는 조건이지만 그것들이 실현된다고 해서 평화가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Johan Galtung) 의 용어를 빌리자면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가 적극적 평화 (positive peace)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등과 분쟁 중인 국 가들이 갈등과 분쟁의 근본적 원인을 해소하지 않은 상황, 즉 적대 적 인식과 증오감을 유지하면서도 각자의 필요와 이익에 의해서 분 쟁을 중지하거나 종식하는 협정(conflict settlement)은 가능하다.1)
1) Herbert C. Kelman, “Reconciliation from a Social-Psychological Perspective,” in The Social Psychology of Intergroup Reconciliation, eds. Arie Nadler, Thomas Malloy, and Jeffrey D. Fisher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pp. 22~23.
다시 말해 남북 간 깊은 상처의 치유 없이도 한반도의 평화협정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 실현을 위해서는 안보 위 협의 해소와 경제적 이익 담론을 넘어서는 남북, 북미관계의 본질적 변화가 요구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14일 NSC 전체회의 발언에 서 언급한 새로운 시대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이제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은 보다 포괄적인 시각으로 접근해 야 합니다. 북한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라는 안보 과제를 넘어 한반 도 평화와 남북 공동번영이라는 새로운 시대정신을 받아들여야 할 때입니다.”
안보문제를 넘어서는 지속가능한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시대정신 은 무엇인가? 많은 연구들이 갈등과 분쟁을 겪고 있는 공동체의 인 식 변화를 바탕으로 평화 문화 형성이 핵심적 과제라고 주장한다.2) 그렇다면 70년 분단의 역사 속에서 남북한 주민, 더 좁힌다면 한국 인들의 인식이 어떤 평화적 지향을 가져야 하는가? 한국의 평화 담 론은 거대 평화 담론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연구와3) 평화체제에 대 한 연구를4)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반면 한국인의 평화의식에 대한 연구는 극히 소수이다.5) 하지만 이 연구들조차 소극적 평화와
2) 평화문화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John Paul Lederach, Building Peace: Sustainable Reconciliation in Divided Societies (Washington, D.C.: United States Institute of Peace, 1997).
3) 이상근, “‘안정적 평화’ 개념과 한반도 적용 가능성,” 한국정치학회보, 제49권 1호 (2015), pp. 131~155; 장영권, “평화의 새로운 발명과 확장: 남북 ‘평화지대론’을 중심 으로,” 국제정치논총, 제51권 3호 (2011), pp. 105~134.
4) 김연철, “동아시아 질서와 한반도 평화체제 전망,” 경제와 사회, 제99권 (2013), pp.
12~35; 장용석, “한반도 평화체제와 평화협정: 개념, 쟁점, 추진방향,” 통일문제연구, 제22권 1호 (2010), pp. 123~152; 황지환, “한반도평화체제 구상의 이상과 현실,”
평화연구, 제17권 1호 (2009), pp. 113~136.
5) 이호재 외, 한국인의 평화의식과 통일관, (서울: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1989), pp. 21∼33.
적극적 평화의 거대 담론의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으로 남북관계의 맥락에서 평화에 대한 인식을 직접적으로 조사한 연구는 전무하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화의 실현을 위한 첫걸음이자 필요조건으 로서 평화의 제도화에 대한 관심과 논의는 당연해 보인다. 반면 지 속가능한 평화의 근본적 동력인 국민들의 평화인식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것은 설명이 필요해 보인다.
먼저 기존의 국민 인식 연구들이 ‘평화’가 아닌 ‘통일’을 위주로 진 행되어 왔던 점을 들 수 있다. 기존의 연구들은 국민들이 생각하는 통일의 입체적 성격을 규명하기보다는 통일을 지지하는지,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는지 등의 ‘통일 공감대’ 연구에 초점을 두었다.
이러한 연구 지향성이 지속된다면 국민들이 생각하는 평화의 내용 보다는 평화적 남북관계의 정당성 여부를 확인하는 수준에서 평화 인식 연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분단과 전쟁이 초래한 갈등과 분쟁 상황에 장기간 노출 되면서 비평화 상태가 일상화, 습관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 해 ‘평화로운 비평화 상태’에 장기간 노출되면서 현재의 비평화 상태 가 불편하지 않으며 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 성적이고 장기적인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추상적, 무형적, 유토피아적인 상상의 수준에서 평화를 인식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평화를 달성하는 방식 및 내용이 부족하다. 특히 분쟁 상황에서 성장 한 세대는 분쟁의 삶 이외에 다른 삶에 노출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새 로운 삶, 평화의 삶은 구체성과 현실성이 결여된 추상적 상상의 삶으 로 치부되기 쉽다. 결국 구체적이고 현실적, 그리고 일상의 삶과 유 리되지 않는 평화의 삶에 대한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6)
6) Daniel Bar‐Tal, “From Intractable Conflict through Conflict Resolution to Reconciliation: Psychological Analysis,” Political Psychology, vol. 21, no. 2 (2000), pp. 357~360.
마지막으로 평화를 위해 한국 국민들이 변해야 할 필요가 그리 크 지 않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분쟁의 시작과 책임은 북한에 있 으며 한국 국민은 피해자이며, 한국은 북한에 대해 항상 선의를 가 지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경제적 부담은 감수할 수 있지만 평화 로운 남북관계를 위해서는 북한(주민)의 변화만이 요구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이후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러한 내집단 중심성, 한국 중심적인 사고는 분단과 갈등의 삶의 결과이며 지속가능한 평화를 저해하는 핵심적 태도이다.
결국 지속가능한 평화를 위한 국민의 인식, 평화의 심리적 토양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분단과 분쟁의 삶이 초래하는 심리적 지향을 파 악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회 심리학의 전통적 테제를 인용한 다면 상황(분단)이 개인의 행동과 심리에 미치는 영향력은 강력하지 만 사람들은 상황(분단)의 힘이 강력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으며,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따라서 무엇을 모르고 있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개인적 신념, 태도, 정서, 기억, 사고 등을 지배하는, 그러나 한국인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분단의 폭력성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러한 ‘분단이 야기한 심리적 비정 상성’을 변화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필요하다.
본 연구의 목표는 한국인과 북한이탈주민의 평화 지향성, 새로운 남북관계에 대한 심리적 정향의 현주소를 파악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고질화된 분쟁(intractable conflict) 연구를 바탕으로
‘분단의 심리’를 탐색하고, ‘분단의 심리’의 전환을 위해 ‘화해 (reconciliation)의 심리’와 ‘지속가능한 평화(sustainable peace)’
의 틀에서 제시하는 ‘평화의 심리’를 탐색하였다. 이러한 선행연구의 고찰을 바탕으로 한국인과 북한이탈주민의 평화 지향성과 화해를 위한 심리적 지향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인식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림 Ⅰ-1> 조사의 이론적 틀
출처: 저자 작성
인식조사는 크게 (1) 평화와 전쟁에 대한 인식, (2) 북한에 대한 인 식(적에 대한 인식), (3)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관계에 대한 인식), (4) 한국에 대한 인식(나에 대한 인식)으로 구분될 수 있다. 먼저 평화와 전쟁에 대한 태도에서는 평화와 전쟁에 대한 심리적 표상(mental representation)을 개방형 질문으로 해보았다. 평화와 전쟁에 대한 태도에서는 평화와 전쟁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평화를 달성 하는 방식(군사력 의존 vs. 협력적 방식)에 대해 일반적 수준과 한반 도 수준에서 질문하였다. 또한 전쟁의 원인에 대해 개인적 차원, 지 도자 차원, 국가적 차원, 국제관계 차원에서 질문하였다.
북한에 대한 인식에서는 북한에 대한 전반적 이미지, 화해의 대상 으로서 북한, 용서의 대상으로서 북한에 대한 인식을 질문하였다.
남북관계에 대한 인식에서는 분단에 대한 경쟁적 피해자 의식 (competitive victimhoodness), 남북관계를 제로섬 관계로 인식하 는 경향, 통일에 대한 태도, 통일의 명분, 과정으로서의 통일 인식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문항을 포함하였다. 마지막으로 개인 차원의 가치 영역에서는 남한 정체감과 민족 정체감, 그리고 개인주의와 집 단주의, 권위주의와 사회지배경향성, 개인의 성격과 가치지향성을 측정하였다.
<그림 Ⅰ-2> 설문조사 문항의 개념
출처: 저자 작성
그동안 다양한 기관에서 통일에 대한 국민여론조사를 실시하였으 나 평화에 대한 심층적인 국민여론조사는 본 연구가 최초로 실시하 였다. 평화는 결과이자 과정이다. 본 연구는 지속가능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기초자료로서 의 의의를 가질 것이다. 더 나아가 근본적으로는 분단에 의한 심리 적 결핍과 왜곡된 심리적 지향의 현주소를 파악하고 남북의 공존과 번영, 그리고 장기적으로 제도의 통일을 넘어서는 심리 문화적 통일 을 위한 과제를 파악하는 의의를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