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역학연구결과에 의한 법적 인과관계 증명
역학자는“어떤 요인이 질병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할 뿐이고, “어떤 요인이 실제로 원고의 질병을 발생시켰는가”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즉, 역학은 인구 집단을 대상으로 하여 특정 요인과 질병 사이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역학연구 결과는 본질적으로 인구집단을 대상으로 한 통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 반적으로 인구집단에 대한 연구결과로부터 개별적 사안에 적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154)
즉, 역학연구결과의 본질은 확률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과관계의 사실인정 수단 으로 활용되는 역학일지라도, 우리 법체계에서 오로지 사실인정을 확률에 근거해서 만 판단하는 것은 아니므로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인 것이다.
우리의 대법원도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가해행위와 손해 발 생 사이의 인과관계는 존재하거나 부존재 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이고, 이를 비율적 으로 인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른바 비율적 인과관계론은 받아들일 수 없다”155)고 판시하였다.
결국, 법률적 인과관계 문제를 확률의 문제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법적인 의미에 서의 인과관계는 법관이 판단해야 한다.156)
대법원은 일찍이 “불법행위 성립요건으로서의 인과관계는 궁극적으로는 현실로 발생한 손해를 누가 배상할 것인가의 책임귀속의 관계를 결정짓기 위한 개념이므로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말하는 인과관계와는 달리 법관의 자유심증에 터잡아 얻어지 는 확신에 의하여 인정되는 법적인 가치판단”157)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153) 이승현, “미국의 법 영역에서 문제되는 인과관계와 역학적 인과관계의 관계에 대한 고찰”, 『법학연 구』 제21집, 2018, 315~316쪽.
154) 이연갑, 앞의 논문, 136~137쪽.
155) 대법원 2013. 7. 12. 선고, 2006다17539 판결.
156) 역학적 연구결과는 당해 위험인자가 질병의 원인이 되는지에 대한 일반적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추 고 있는 것임에 반하여, 개별 사안에서 업무상 질병을 판정하기 위해서는 특정 개인의 질병원인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구체적 인과관계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역학적 관점에서 인과관계를 긍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집단을 기초로 한 위험성에 관한 조사결과이지 당연 히 개별적ㆍ구체적 인과관계를 긍정하지 않는다. 즉, 역학적 인과관계를 어떻게 활용할지 여부는 오로지 법원의 법적 판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승현, 위의 논문, 310~312쪽.
157) 대법원 1984. 6. 12. 선고, 81다558 판결.
특히, 업무상 질병은 업무상 요인과 업무외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경우, 업무상 요인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경우에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 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법적 평가의 문제로 귀결된다.158)
또한 현대적 직업병은 증상에 특이성이 없는 경우가 많고, 업무상 질병인정기준 을 정함에 있어서 특이성만을 기준으로 착안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산업의 발 달로 새로운 직업병이 생겨도 의학적 식견으로 이를 인지하는 것은 항상 뒤늦기 마 련이다. 이러한 이유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증명책임의 분배(완화)가 중요한 쟁 점이 되었던 것이다.159)
요컨대, 업무상 질병 심의과정에 있어서 의학적 관점으로부터 검토가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고, 의학적 판단 자체를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판단지표인 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업무상 질병의 인정은 산재법 제도에 근거한 법적판단이므 로, 의학적 판단이 주가 되어서는 안 되고 모든 제반 요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정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나아갈 방향 역시 어느 범주까지 법의 보호영역에 둘 것인가를 정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야한다.
첨단 산업에서는 새로운 직업병이 나오더라도, 이를 인지하고 의학적으로 입증하 는 것은 시간적 괴리가 발생한다는 것을 앞서 살펴보았다. 그러한 이유로 최근 대 법원의 전향적인 판례도 나오는 추세라는 점에서, 의학적 근거가 핵심에 있다고 본 다면 애초에 근로자보호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결국 의학적 인과관계는 근로자 보호라는 산재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그것이 주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피력한 것이다. 이러한 연구자의 견해는 종전에 검토한 독일의 중요조건설과 일정부분 궤를 같이 한다.
그렇다고 해서 업무상 질병 심의과정상 역학연구결과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비 약 역시 금물이다.
소송에서 역학조사결과는 증거능력이 문제될 것이 없고, 오로지 증거력만의 문제 로 귀결되는데, 그 역시 법관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160) 또한, 구 체적 인과관계를 다루지 않는 당연인정기준 정립과정에서, 역학연구결과가 매우 유 용한 일반적 인과관계 기준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2) 업무상 질병 심의과정상에서 역학조사 의뢰
산재법 시행규칙 제22조(업무상 질병에 관한 자문)에 따르면 “공단이나 판정위원 회는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정할 때 그 질병과 유해ㆍ위험요인 사이의 인과관계 등 의 자문이 필요한 경우”, 한국 산업안전공단법에 따른 “한국산업안전공단”또는
“그 밖에 업무상 질병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관”에 자문을 할 수 있다고 규정 하고 있다. 또한 산업안전보건법 제141조(역학조사)와 같은 법 시행규칙 제222조(역
158) 이달휴,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질병의 업무상 판단”, 『중앙법학』 제15집 제4호, 2013.12, 348쪽.
159) 이달휴, 앞의 논문, 348쪽.
160) 이연갑, 앞의 논문, 138쪽.
학조사의 대상 및 절차 등)에 따라 근로자의 질병과 작업장 유해요인의 상관관계에 관한 직업성 질환 역학조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학조사는 한국산업안전보건공 단에 의뢰하여 시행하는데, 그 역학조사 결과는 다시 근로복지공단에 통보된다. 이 후 근로복지공단은 위 역학조사를 토대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결 과를 심의하여 판정하는데, 그동안 사실상 역학조사 결과를 기계적으로 수용하는 결과가 이뤄져 온 것이 사실이다.
(3) 역학조사결과와 법원의 입장
원래 역학조사를 하는 목적은 질병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질병 발 생을 막기 위해서다. 그런데 현재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역학조사는 이처럼 추가적 인 질병 발생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로복지공단 업무의 일환으로 해당 근로 자의 업무가 질병을 일으켰는지, 작업환경에 유해요인ㆍ위험요인이 있는지를 확인 하기 위해 시행되고 있다. 이는 의학적인 사실 확인보다는 보험급여를 받아도 되는 지에 대한 법적인 가치판단이 주된 것이다.
따라서 “업무상 재해 보상이라는 조사의 취지에 맞게 근거 법령의 목적과 내용, 최종적인 법령해석기관인 법원의 태도까지 숙지한 상태에서 업무관련성을 조사하고 평가해야 한다. 또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때에는 단순한 의학적 사실 확인만이 아닌 재해보상의 필요성이라는 가치판단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161) 그러나, 현재 역학조사를 담당하는 실무자들은 업무상 재해법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162)는 점에서 괴리가 발생하고 있다.
더 나아가, 삼성반도체 사례에서 드러난 역학조사의 문제점을 살펴보면, 당시 수 행된 공정 자체가 사라지거나, 설비가 몇 년 사이에 바뀌고, 환기장치나 보호구도 변경된 경우가 많아서 제대로 된 작업환경을 반영한 개별역학조사가 불가능한 경우 가 있다는 점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반도체 제조공정 같은 첨단산업의 경우, 기술진보가 너무나 빨라 사용하는 화학물질도 수시로 변경되어 현재 작업환 경측정결과나 산업안전보건법상의 규정만으로는 유해ㆍ위험요인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는 것이다.163)
최근 이슈가 된 ‘대법원 2017.8.29. 선고, 2015두3867 판결’에서는 종래 판결에 서 볼 수 없는 3가지 요소를 제시하였는데, 첫 번째는 첨단사업현장에서는 그에 관 한 연구결과가 충분하지 않아, 현재 의학과 자연과학으로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 하는 경우, 그러한 경우에 인과관계를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 “사업주의 협조 거부 또는 행정청의 조사거부나 지연 등으로 작업환경상
161) 박영만, “S전자 근로자 집단 백혈병 사건”, 『한국산업보건학회지』 제22권, 2012, 29쪽.
162) 매일노동뉴스, 산보연의 역학조사는 ‘과학적 판단’이 준거, 김은아, 2011.12.08.
<http://www.labor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8082> 인터넷판 참조(검색시점 : 2020.10.06.).
163) 김재완, “반도체산업 노동자의 암 발병과 직업병 인정을 위한 법적 방안”, 『민주법학』 제44권, 2010, 25~27쪽.
의 유해요소들의 종류와 노출 정도를 구체적으로 특정할 수 없었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다면 상당인과관계를 인정하는 단계에서 근로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다.164)
셋째, “작업환경에 여러 유해물질이나 유해요소가 존재하는 경우 개별 유해요인 들이 특정 질환의 발병이나 악화에 복합적ㆍ누적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간과해서 는 안된다”라는 점이다.165)
위 ‘대법원 2017.8.29. 선고, 2015두3867 판결’은 종전에 한국산업안전공단 역학 조사결과를 기계적으로 수용하여 판단하던 관행을 이겨내고 판단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한국산업안전공단 역학조사결과에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전제 한 뒤, 법적 가치판단을 함에 있어서 근로자의 증명책임을 완화하는 세 가지 보완 법리를 제시한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5. 업무상 질병인정기준 정립 근거로서의 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