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절에서는 북한 기업지배의 성격을 구명하고, 개혁 수준을 평가함 에 있어서 비교 대상으로 삼고자 체제전환기 중국의 기업지배에 대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중국을 비교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양국 정치·경 제체제와 기업지배 시스템이 유사한 변화 양상을 보여 왔으며, 앞으로 도 북한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을 참고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의 2000년대 초반까지의 변화를 살펴보되 체제 전환기, 특히 1980년대에 주목한다. 이는 북한 기업지배의 개혁 수준 이 이 시기 중국의 변화 양상에 상응한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후술 하듯이 중국은 1990년대 접어들면서 국유기업의 주식회사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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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색하게 되는데, 북한은 아직 이러한 단계에 접어들지는 못한 상태이다.
가. 개혁개방 이전 중국의 기업지배: 국가 지령 수행기관으로서의 기업
개혁개방 이전 중국 역시 북한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를 구축하고 있었다. 빅 푸쉬(Big Push) 공업화 전략을 선택한 중국은 중공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이 부문에 자원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 1949년에서 1956년 사이 구소련을 모방하여 중앙 집권적 계획경제체제를 형성하였다.67) 이와 함께 모든 생산수단의 공 유를 원칙으로 하는 사회주의체제를 수립하는 작업 역시 1956년경 마무리되어 대부분의 기업이 국유화되었다.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하에서 국유기업은 독자적인 경영 활동을 하기보다는 말단 행정기구와 같이 국가의 지령을 수행하는 역할에 충 실할 것을 요구받았다.68) 국가계획위원회에서 결정한 총생산액, 주요 산품 산출량, 직원노동자의 총수, 노동생산성, 비용저하율, 임금총액, 이윤 등 열두 개 항목에 대한 생산계획지표가 각급 정부의 주관부서를 통해 산하 국유기업에 하달되었고, 기업은 이 계획에 따라 생산해야 했다. 생산한 제품도 정부가 정한 가격에 따라 판매해야 했다.
기업이 생산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물자는 정부의 물자공급 부서에 서 공급해 주었다. 석탄, 석유 등 에너지 자원 역시 물자관리 부서에서
67) Barry Naughton, 이정구·전용복 역, 중국경제: 시장으로의 이행과 성장(서울:
서울경제경영, 2010), pp. 73~74.
68) 개혁개방 이전에는 몇 차례에 걸쳐 기업에 대한 관리 권한을 중앙정부에서 지방정부 로, 다시 지방에서 중앙으로 이전하는 조치가 취해졌을 뿐, 정부가 기업의 생산 활동 전반에 대한 통제·관리 권한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통일적으로 조달하여 국유기업에 분배했다. 기업의 설비투자 자금과 운영자금은 국가의 재정자금으로 충당했으며, 예산 편성에 포함되지 않았거나 예상치 않았던 단기성 운용자금을 조달해야 하는 경우에만 은행 부문(인민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69) 생산 및 판매 를 통해 벌어들인 이윤 전액과 감가상각비는 국가에 일괄적으로 상납 해야 했고 기업 내에 유보할 수 없었다.70) 반대로 손실이 발생할 경우에 는 국가에서 보조를 받았다. 따라서 국유기업이 파산할 가능성은 존재 하지 않았고, 이는 기업의 비효율성을 낳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동자의 경우, 노동인사부 산하 도시노동국에서 국가 직장배치제를 운영하면서 자의적으로 인원을 배치했다. 따라서 기업은 인력을 선택 할 권한을 갖지 못해 원하는 인력을 끌어올 수도, 원하지 않는 인력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평생보장제도가 실시되어 노동자들은 일단 작업 장에 배치되면 작업 성과와 상관없이 평생 고용되었다. 이는 노동자 규율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요인이 되었다. 국가임금체계가 모든 국유기업에 적용되어, 노동자들은 국가가 정한 통일적 기준에 따라 임금을 지급받았는데, 경영자에서 미숙련공에 이르기까지 직급 간 임금격차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노동자들은 기업 경영 성과 혹은 개인의 기여 정도와 상관없이 균등한 임금을 지급받았기 때문에 생산 의욕이 높지 않았고, 이는 국유기업의 생산성 저하를 낳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노동자는 임금 이외에 기업으로부터 주택, 교육, 의료복지, 연금 등
69) 조명철·홍익표, 중국·베트남의 초기 개혁·개방정책과 북한의 개혁방향(서울: 대 외경제정책연구원, 2000), p. 132; 그러나 명목상의 은행 대출에 대해서도 이자 및 원금 상환이 강제되지는 않았다. 김시중, 중국 국유기업 개혁의 전개와 전망
(서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1993), p. 42.
70) 이상의 내용은 주로 유희문, “계획경제의 경제개발과 구조적 특징,” 유희문 외, 현 대중국경제증보판 (서울: 교보문고, 2005), pp. 50~51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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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다양한 복지 혜택을 제공받았다.71) 기업은 단순한 생산경영조직에 그치지 않고, 주택, 병원, 학교, 유치원, 식당, 상점 등을 갖춘 생활공동 체였다. 문제는 고용증대정책에 따라 국유기업 내에 불필요한 잉여 인력이 많았고, 이로 인해 기업은 노동자 및 그의 가족들의 사회보장 및 복지를 위해 과다한 비용을 지출해야 했다는 점이다.
한편, 중국에서도 당 중심의 기업 내 의사결정권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72) 초기에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구소련의 ‘지배인 유일관리제’
를 참고하여 1953년 도입한 일장제(一長制), 즉 공장장책임제가 시행 되었으나, 1956년 폐지되고73) ‘당위원회 영도 하의 공장장 책임제’를 채택되었다. ‘당위원회 영도 하의 공장장 책임제’는 생산, 기술, 재무, 생활 등과 관련하여 기업 내 주요 사항을 결정할 때에는 모두 당위원회 가 집단적으로 토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에 따라 당위원회가 기업 운영에 관한 권한을 장악하게 되었는데, 실질적으로는 기업 당위 원회 서기가 기업 내 최종적인 의사결정권한을 쥐게 되었다. 이로써 기업은 당의 정책 및 방침에 따라 운영되고, 기업 내에서 효율성보다 당의 이데올로기가 우선시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74)
71) 박형중, 북한의 경제관리체계, p. 303.
72) 이와 관련해서는 장광호, “중국의 기업지배구조(상): 계획경제기,” 기업지배구조리 뷰, 제26권 (한국기업지배구조원, 2006)을 주로 참고하였다.
73) 일장제는 정착되지 못하였는데, 공장 경영을 책임지고 운영할 만한 전문 공장장이 부족하였다는 점, 공장장과 당 사이의 관계가 애매하여 공장장이 업무를 과감하게 추진하지 못하고 당에 일임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 그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조현태·이민형·김홍석, 중국의 국유기업 개혁과 시사점(서울: 산업연구원, 1994), p. 11.
74) 1966년부터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후 국유기업에 군대표, 혁명간부, 혁명적 대중이 참여하는 혁명위원회가 구성되고, 이 위원회가 기업의 정치운동과 생산을 일원적으 로 지도하는 집단적인 지도체제가 구축되기도 했으나, 1972년 이후 당위원회가 점 차 부활, 당서기가 혁명위원회 주임을 겸하게 되고, 당위원회가 혁명위원회의 실권 을 장악하게 되면서 생산관리에 관한 당위원회의 결정권이 다시 확대되어 갔다. 장 광호, “중국의 기업지배구조(상): 계획경제기,” p. 6.
그런데 당위원회 영도 간부들은 대부분 혁명 참가 유공이나 공산주 의 사상성 입증 등을 통해 영도적 지위에 오른 이들이었다.75) 따라서 이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거나 기업 관리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지도 못했다. 이러한 당간부들이 기업 경영을 책임진 결과, 기업 내 관료주의로 인한 문제가 증가하였으며, 경영의 비효율이 심화되는 등 의 문제가 파생되었다.
공장장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행정상의 권한과 책임을 지니지만, 공 장 당위원회의 지도와 감독하에서만 주어진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장은 노동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봉급 차이가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임면, 진급, 임금 등의 결정에 있어 실질적 권한을 지니지 못한 탓에, 권위를 지니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공장 장은 기업의 효율적 운영을 위해 적극 나서지도 않았다. 공장장 역시, 앞서 언급했듯이 이익이 발생하면 국가가 회수하고, 손실이 발생하면 보조를 받아 경영 성과에 대해 책임지지 않아도 됐던 만큼, 기업 경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유인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격이 시장의 수요-공급과 무관하게 국가의 정책적인 판단에 따라 설정되고, 공장장 이 실질적인 권한을 지니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던 만큼, 국가가 공장장 에게 경영 성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도 어려웠다.
한편 1957년 ‘당위원회 영도 하의 직공대표대회(종업원대표자회 의)’ 제도가 도입되어 종업원이 기업관리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 받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효율적인 감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지는 못하였으며, 형식상 공장장으로부터 기업의 생산계획 등에 관해 정기 적으로 업무 보고를 받는 데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76)
75) 조명철·홍익표, 중국·베트남의 초기 개혁·개방정책과 북한의 개혁방향, p. 87.
76) 장광호, “중국의 기업지배구조(상): 계획경제기,”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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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개혁개방 초기 중국 기업지배의 변화: 방권양리(放權讓利)중국은 1978년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개혁개방을 통한 경제 발전을 당면과제로 채택한 이후,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기존 체제 하에서는 경제관리 권한이 중앙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고, 기업 경영 진과 노동자에 대해서는 적절한 경제적 유인이 제공되지 않고 있었는 데, 이러한 요인들이 국유기업의 효율성을 떨어뜨림으로써, 궁극적으 로 중국 경제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고 변화를 모색하게 된 것이다.
개혁개방 초기 기업개혁의 기본 방향은 방권양리(放權讓利)로 요약 될 수 있다. 정부의 통제를 완화하여 기업 경영의 자주권을 확대하고 (放權) 기업 내 이윤 유보를 허용하여 기업 자체의 이익을 도모하도록 허용하는(讓利) 방향으로 개혁개방이 추진된 것이다.77)
기업 경영의 자주권 확대와 관련해서는 계획지표의 수가 줄어들고 계획에 의거해서 생산하는 부분의 비중이 축소된 대신 계획 외 생산과 판매가 허용되며, 생산·판매 과정에서 기업의 의사결정권이 확대되는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또 공장장에게 임금, 보너스에 대한 결정권이 부여되었고, 기업 내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거나 중하층 간부를 임면할 수 있는 권한도 주어졌으며, 비공식적으로 기업에 요구되어 온 준조세 적 부담을 경감하는 조치도 이루어졌다.
계획 부문의 비중이 줄어듦에 따라 모든 생산요소를 국가에서 보장 해주던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종래에는 국가물자국이 계획에 의 거해 기업에 필요한 생산재를 공급해 주었지만, 개혁 후에는 국가에 의해서 통일적으로 배분되는 중요 물자에 대해서도 기업이 원재료 구
77) 개혁 조치는 사천성 내 기업에 시범적으로 실시된 후 점차 그 적용범위가 확대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