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idak ada hasil yang ditemukan

카챠 프링스하임: 토마스 만의 결혼과 시각예술

3. 토마스 만의 생애와 시각예술 체험

3.3. 카챠 프링스하임: 토마스 만의 결혼과 시각예술

토마스 만에게 있어서 시각예술의 세계는 ‘삶’, ‘시민적 의무’, ‘도덕적’인 것으로 생각했던 결혼을 통해서도 연결되었다. 뤼벡의 몰락한 상류 시민의 후예인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일가로 성공의 발을 내딛기 시작한 작가 로서 자신의 이전의 사회적 지위를 다시 회복하려고 했으며 결혼을 통한 신 분 상승도 이러한 그의 야심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뮌헨의 손꼽히 는 부호로서 수준 높은 교양을 가진 프링스하임 가문 출신의 카챠와의 결혼 을 통해 토마스 만은 어느 정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1905년 결혼 당시 22세였던 카챠는 뮌헨에서 여성에겐 공식적으로 허용되 지 않았던 김나지움 과정을 가정교육으로 마치고 뮌헨대학에서 수학과 물리 학을 전공하던 대학생이었다. 카챠는 토마스 만과 약혼할 당시인 21세 때 이미 박사 학위 논문을 계획할 정도로 뛰어난 학문적 실력을 갖고 있었다.

우아하고 쾌활하며 ‘소년 같은’, 혹은 ‘양성적인’ 유형으로서 토마스 만의 이 상적인 여성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카챠는 그의 시선을 끌 수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199) 그러나 만은 카챠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부의 측면에서 접근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과 카챠의 이러한 결합에 대해 그의 가족들은 자신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고 냉정한 프링스하임 가문 의 딸과 토마스 만이 결혼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으며 특히 형 하인 리히 만은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않을 정도였다. 토마스 만 자신도

198) 김륜옥 2016. 129-146. 참고.

199) 위의 논문. 140 쪽.

교양 있고 부유한 가문의 외동딸로 지적이고 독특한 매력을 가진 카챠는 뮌헨의 유명 인사들로부터 구애를 받고 있었던 유명한 여성이었으며 이 결혼을 위해서 사실 토마스 만 쪽에서 더 많은 공을 들였다. 토마스 만과 카챠의 결혼 과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Hermann Kurzke 2000. S. 132-174 참고.

이를 의식하여 결혼 후 약 1년 뒤 1906년 1월 17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자신의 결혼에 대해 “자유스럽지 못한 느낌”을 떨칠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200) 그는 형이 자신을 “비겁한 시민”으로 생각하는 것도 잘 알고는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자신에게 확실한 제도적 틀을 부여하 는 데에서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하면서 부유한 삶을 동경하며 현실적인 안 락을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201)

<그림 3> 프란츠 폰 렌바흐: 카챠 프링스하임 초상(1892)

유대인 출신의 프링스하임 가문은 카챠의 할아버지가 작센 지방에서 광산 철도 건설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으며 원래 베를린을 주요 근거 지로 하고 있었다. 카챠의 아버지, 토마스 만의 장인 알프레드 프링스하임 Alfred Pringsheim(1850-1941)은 당대 저명한 수학자로 뮌헨 대학 교 수였으며 뛰어난 감식안을 가진 예술애호가였으며 특히 열렬한 바그너 추종

200) Thomas Mann/Heinrich Mann: Briefwechsel 1900-1949. Hans Wysling (hrsg.). Frankfurt a. M. 1995. S. 114.

201) Ebd. S. 114.

자였다. 그는 또한 수준 높은 예술품 수집가이기도 했다. 뮌헨의 프링스하 임 저택은 르네상스 풍의 건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내부엔 수많은 골동품과 그림들로 가득했다.202) 개인 주택이라기보다는 궁전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 했던 이 저택은 예술지상주의 도시 뮌헨에서 지식인, 예술인들의 살롱으로 서 문화계의 구심점역할을 하기도 했다. 카챠는 “아르치스슈트라세 집에 문 인을 포함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왔는데, 이들은 특히 음악가와 화가들이었 다 Es kamen sehr viele Leute in die Arcisstraße, auch Literaten, besonders aber Musiker und Maler”고 회고한다.203) 토마스 만이 카 챠를 만나게 된 것도 프링스하임 가와 가깝게 교류하던 뮌헨의 여류작가 엘 202) 뮌헨의 문화적 중심지 쾨니히스플라츠 옆 아르치스슈트라세 12에 위치했던 이 저택은 변형된 르네상스 양식 풍의 건물로 ‘프링스하임 궁 Palais Pringsheim’

이라 불릴 만큼 화려한 장식과 예술품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1933년 나치에 의 해 몰수되어 건물은 멸실되었으며 내부를 장식했던 예술품들은 각지로 흩어졌다.

프링스하임 저택의 자리에는 나치의 본부 ‘휘러바우 Führerbau’가 건설되었으며 전후에는 ‘아메리카 하우스’가 되었다가 현재에는 뮌헨 국립 음대와 뮌헨 대학 고 고학과 건물로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독일 문화계의 노력에 힘입어 프링스하 임 가문이 소장했던 예술품의 소재와 상태가 상당수 확인되었다. 2014년에는 이 노력을 바탕으로 뤼벡에서 열린 <토마스 만과 시각예술 Thomas Mann und die bildende Kunst>전시에 다시 찾은 프링스하임 가의 예술품들이 일부 전시 되기도 했다.

프링스하임 저택의 굴곡진 역사에 대해서는 Alexander Krause: Arcisstraße 12. Palais Pringsheim-Führerbau-Amerika Haus-Hochschule für Musik und Theater München. München 2015 참고.

프링스하임 가문이 소장하고 있었던 예술품들의 내용과 현재 소재와 상태에 대해 서는 Dirk Heißerer: Die wiedergefundene Pracht. Franz Lehnbach, die Familie Pringsheim und Thomas Mann. Göttingen 2010 참고.

다시 찾은 프링스하임 가의 예술품 전시에 대한 내용은 Dirk Heißerer/Helmut Hess: Kunst im Hause Pringsheim, Kunst im Hause Mann. München 1890-1933. In: Bastek, Alexander/Pfäfflin, Anna Marie.(hrsg):

Thomas Mann und die bildende Kunst. Katalog zur Ausstellung im Museum Behnhaus, Drägerhaus und Buddenbrookhaus Lübeck, 13. 9.

2014 bis 6. 1. 2015. Petersberg 2014. 55-71.참고.

203) Katja Mann 2004. S. 14.

이어 카챠는 당시 아르치스가의 저택에 음악가 리햐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하여 뮌헨의 유명 화가였던 프리츠 아우구스트 카울바흐, 렌바흐와 슈툭 등 많은 문화 예술계 인사들이 찾아왔었다고 회상한다. 그녀에 따르면 프링스하임 가는 수학자 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학문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여기에 음악에 대한 관심이 더 해진 분위기였다고 말한다. 문학에 대해서는 아버지가 그리 많은 관심을 갖고 있 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아버지와는 달랐었다고 카챠는 증언한다. Ebd. S. 14.

자 베른슈타인 Elsa Bernstein(1866-1949)를 통해서였다. 1904년 2월 토마스 만은 하인리히 만에게 보낸 편지에서 프링스하임 가를 방문했을 때 의 인상에 대해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나는 사교 모임에 들어가게 되어 베른슈타인 가, 프링스하임 가를 방문 했습니다. 프링스하임 가는 정말이지 나를 만족시킨 (굉장한) 경험이었 습니다. 진정한 문화로 가득 한 동물원이라고나 할까. 금으로 된 시가 상자를 갖고 있는 대학교수 아버지, 렌바흐 미인 어머니, 음악가 막내아 들, 그의 쌍둥이 여동생 카챠는 [...] 기적과도 같았는데, 뭐라 묘사할 수 없는 기묘한 것, 값비싼 그 무엇, 놀라운 피조물로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15명의 작가, 30명의 화가의 문화적인 행위에 필적하 는 존재감을 주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유대인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문화뿐이었습니다.

Ich bin gesellschaftlich eingeführt, bei Bernsteins, bei Pringsheims. Pringsheims sind ein Erlebnis, das mich ausfüllt.

Tiergarten mit echter Kultur. Der Vater Universitätsprofessor mit goldener Cigarettendose, die Mutter eine Lenbach- Schönheit, der jüngste Sohn Musiker, seine Zwillingsschwester Katja [...] ein Wunder, etwas unbeschreiblich Seltenes und Kostbares, ein Geschöpf, das durch sein bloßes Dasein die kulturelle Thätigkeit von 15 Schriftstellern oder 30 Malern aufwiegt ... Kein Gedanke an Judenthum kommt auf diesen Leuten gegenüber; man spürt nichts als Kultur.204)

204) Thomas Mann/Heinrich Mann: Briefwechsel 1900-1949. Hans Wysling (hrsg.). Frankfurt a. M. 1995. S. 97f.

<그림 4> 프링스하임 저택 서재

토마스 만은 프링스하임 가를 처음 방문했을 때 매우 화려하고 값비싼 물 건과 시각예술품들로 인해 시각적으로 압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링스하 임 가의 서재 사진에서는 토마스 만이 경탄한 화려한 실내 장식과 예술작 품, 값비싼 물건들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사진에서 벽난로 옆에 걸려 있 는 여성 초상화는 당시 뮌헨 제도권 미술을 주도했던 화가 프란츠 폰 렌바 흐 Franz von Lenbach(1836-1904)가 카챠의 어머니 헤트비히 프링스 하임 Hedwig Pringsheim(1855-1942)을 그린 것으로서, ‘렌바흐 미인 Lenbach Schönheit’이라는 이름으로 상당히 알려져 있는 그림이었다.205)

205) 프링스하임 가와 면한 쾨니히스플라츠 건너편에 위치한 토스카나 풍의 르네상스 양식 저택 렌바흐 빌라에 거주하고 있었던 렌바흐는 당대 뮌헨의 르네상치스무스 예술경향을 주도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상업적 목적으로 르네상스 회화를 모방한 회화를 다수 양산해 내었는데, 제도권의 주도적 예술가로서 그의 이러한 비도덕 적인 태도는 동시대 젊은 미술가들로부터 많은 반감을 사기도 했다. 렌바흐의 폐 해는 뮌헨의 예술계에서 반제도권 미술운동 ‘분리주의 Secession’ 운동을 낳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유겐트슈틸 예술운동도 이러한 움직임의 하나였다.

렌바흐 빌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Barbara Eschenburg: Lenbach Villa.

그는 당대 뮌헨의 최고의 미술가로서 9살 카챠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림 3).

그러나 토마스 만은 이러한 당대 최고의 예술가를 통해 제작된 시각예술 작품과 값비싼 골동품, 궁전처럼 화려하게 장식된 프링스하임 가의 공간을 동경하면서도 “진정한 문화의 동물원 Tiergarten mit echter Kultur”206) 이라고 조롱하며 한편으로는 경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러한 표현 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유대인들의 과도한 예술 문화 취미에 대한 조롱으로 해석될 수 있는 위험한 표현이었다. 토마스 만의 작품에 들 어 있는 민족 표상을 분석한 바 있는 야야 엘자게 Yahya Elsaghe는 “동 종 교배 Inzucht, 기독교에 대한 경멸 Verachtung des Christentums 경제 민족 Wirtsvolk, 맹수와도 같은 동물성 raubtierhafte Animalität, 과도한 문화적 근면성 outrierte Kulturbeflissenheit, 사악과 교만 Malice und Arroganz 등 유대인들과 관련된 진부한 반 유대적인 표현들 이 토마스 만의 초기작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고 말한다.207) “진정한 문화 의 동물원” 역시 위와 같은 유대인에 대한 경멸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 으로서 이 단어는 실제로도 만의 유대인 처가와 연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이중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만 부부가 결혼 하던 해 1905년 가을 동부 해안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방문한 카챠의 친척 유대인 은행가 헤르만 로젠 하임의 저택이 동물원을 뜻하는 베를린 ‘티어가르텐’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토마스 만이 이 여행에서 돌아와 바로 창작한 밸중족의 혈통 (1906/1921)은 그의 작품 중 유일하게 베를린을 무대로 하고 있으며, 작 품 속 ‘티어가르텐’ 지역에 위치한 유대인 아렌홀트 가족의 호화로운 저택 묘사에 이 때의 경험을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Helmut Friedel(hrsg.). München 1999 참고.

206) Thomas Mann/Heinrich Mann: Briefwechsel 1900-1949. Hans Wysling (hrsg.). Frankfurt a. M. 1995. S. 97.

207) Yahya Elsaghe: Judentum. In: Andreas Blödorn/Friedhelm Marx (hrsg.): Thomas Mann Handbuch Leben-Werk-Wirkung. Stuttgart 2015.

246-248. S.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