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토마스 만의 시각예술관
2.4. 토마스 만의 예술관과 시각예술
토마스 만이 청각예술과 시각예술을 대립적으로 보는 이분법적인 예술관 을 형성하는 데에는 니체뿐만 아니라 쇼펜하우어, 바그너 그리고 실러로부 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비단 시각과 청각예술의 문제뿐만 아니라 예술 일반에 대한 토마스 만의 표상 및 관점을 형성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 할을 했다. 그러나 예술을 대하는 만의 태도에는 이들과 일치하지 않는 독 자적인 성격 또한 포함되어 있는 바, 양극단 사이에서 갈등과 극단의 지양 이라는 특유의 ‘이로니 Ironie’가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토마스 만의 시각예술관을 바라보면 그만의 독자적인 성격이 드러난다. 토마스 만은 시 각예술을 니체의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에서는 자연 모 방적이고 현실적인 아폴론적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시각예술에 대한 토마스 만의 관점은 늘 그렇듯이 어느 한 쪽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양 극단 사이의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어느 한 쪽의 긍정도 부정도 아닌 이로니적으 로 양 쪽을 오가는 모호한 입장에 있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일반적으로는 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시각예술로부터도 자신이 원하는 창조적이고 역동 적인 힘을 추출하는 것처럼 선택적으로 시각예술을 수용하기도 한다.
시각예술을 대하는 토마스 만의 특유의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예술 일반에 대한 관점에서 시각예술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해볼 필 요가 있다. 이는 예술과 예술가라는 주제에 대해 토마스 만이 가졌던 미묘 한 입장을 전제로 하는 바, 그의 예술관을 간략하게라도 기술하는 것이 필 수적으로 요구된다.
사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정신세계에서 예술이라는 주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예술관은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였다. 그는 이른 시기부터 준비해온 자료를 토대로 1909년에서 1912년 사이에 예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정신과 예술 Geist und Kunst」(1909-1912) 이라 는 대규모 논문으로 제시하고자 시도한 바 있었다.125) 그러나 만은 예술이 라는 문제가 갖는 복잡하고 자기모순적인 성격 때문에 결국은 논문의 집필 을 포기하고 만다. 이 구상은 152개의 파편적인 메모만을 남기고 중단되고 말았으나 이 메모들은 예술에 대한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 료로서 후일「예술가와 문인 Der Künstler und Literat」(1913), 비정치 인의 고찰 Betrachtungen eines Unpolitischen」(1918),「괴테와 톨스토 이 Goethe und Tolstoi」(1922)와 같은 중요한 글들의 토대가 된다.126)
125) 토마스 만은 이 메모에 116번까지는 직접 번호를 매겨 정리하였으나 나머지 부 분은 번호를 붙이지 않은 채 놔두었다. 이후 나머지 152번까지는 토마스 만 아 카이브 연구소장 한스 뷔슬링이 번호를 붙여 정리하였다. 뷔슬링은 이 문서 전체 를 해석하고 편집하여 Thomas-Mann-Studien 창간호에 소개했다.
Hans Wysling: «Geist und Kunst». Thomas Manns Notizen zu einem
«Literatur-Essay». Editiert und kommentiert von Hans Wysling. In:
Paul Scherrer/Hans Wysling(hrsg.): Thomas-Mann-Studien.
Quellenkritische Studien zum Werk Thomas Manns. Bern/München 1967.
126) 토마스 만은 비록 자신이 원래 계획했던「정신과 예술」을 현실적으로는 완성하 지 못했지만 바로 이어서 쓴 베니스에서의 죽음(1912)에서 주인공 구스타프 아셴바흐를 “「정신과 예술」에 대한 열정적인 논문을 쓴 작가”로 소개하면서 이 글의 완성을 가상의 작가에게로 미루고 있다. 그는 또한 “이 논문의 논리 정연한 힘과 반박의 유창함으로 인해 진지한 그들(비평가들: 필자)이 이 논문을 실러의
소박문학과 감상문학에 대하여 바로 곁에 놓을 수 있었다 ﹥Geist und Kunst﹤, deren ordnende Kraft und antithetische Beredsamkeit ernste Beurteiler vermochte, sie unmittelbar neben Schillers Raisonnement über naive und sentimentalische Dichtung zu stellen”고 묘사하면서 소
토마스 만이 자신의 예술관을 집대성할 방대하고 야심찬 계획을 중단한 것은 우선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를 정의하는 문제부터 스스로 난관에 부딪 혔기 때문이었다. 그는 니체와 쇼펜하우어, 바그너와 실러 등 자신이 존경 하는 사상가들로부터 물려받은 이분법적인 예술 개념의 기초 위에서 자신 의 예술 개념을 새로이 정립하려 하였으나 이 이분법적인 개념들이 서로 충돌하며 모순적인 성격을 드러내어 자가 당착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정신과 예술」을 위한 메모 124번에 예술이 갖는 대립적인 속성들을 다 음과 같이 정리, 나열해 놓고 있다.
<124.> Gegensätze: 대립들
Geist und Natur 정신과 자연 Geist und Kunst 정신과 예술 Kultur und Natur 문화와 자연
Kultur · (Zivilisation) · und Kunst 문화 · (문명) ·그리고 예술 Wille und Vorstellung 의지와 표상
Naiv und sentimental 소박과 감상
Realismus und Idealismus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Heidentum und Christentum 이교도와 기독교 Plastik und Kritik 조형과 비평127)
쿠르츠케가 언급한 것처럼 이 대립쌍들은 니체의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 니소스적인 것을 비롯해서, 하이네의 영적(靈的)인 기독교 정신과 관능적 인 이교도 정신, 실러의 소박과 감상, 쇼펜하우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 톨스토이의 개념인 조형과 비평을 의미한다.128) 그런데 이 대립쌍들에서 각각의 상대 개념들은 해당 대립쌍 안에서는 서로 대립할 수 있지만, 다른 대립쌍으로 넘어가면 서로 치환이 안 된다는 문제점이 있 다. 즉, 니체의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립이 실러의 소박과 설의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은근히 실러와 같은 위상으로 올려놓고 있다. Der Tod in Venedig(1912) GW VIII 450.
127) Thomas Mann: Literatur-Essay. Hans Wysling(editiert und kommentiert von). In: TMS I 1967. S. 169.
128) Hermann Kurzke 2010. S. 91.
감상의 대립적 개념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이를 두고 뷔슬링은 “토 마스 만이 니체의 아폴로적인 «거리두기 Distanziertheit»를 실러의 감성적으 로 의식된 거리두기 «sentimentalisch-bewußte Distanziertheit»와 나란히 둘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한다.129) 그런데 니체의 아폴로적인 것은 오히려 실러의 소박문학 쪽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대립적인 개념들을 다른 개념쌍과 연결시켜 설명하려는 토마스 만의 시도는 개념들 이 서로 다른 편으로 엇갈리며 얽히게 되어 아무리 유연성을 허용한다 해 도 만 자신도 이러한 대립적인 개념들의 구도를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불 가능한 헤어날 수 없는 혼동에 빠지고 말았다. 이와 같은 혼돈의 상태는 훗날 마의 산 Der Zauberberg(1924)에서 한스 카스토르프의 고백으 로 문학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 정신, 로고스, 이성, 열정, 객체, 자아, 예술, 비평 – 그러나 여 기에는 질서도, 명확함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모든 것은 서로 대 립할 뿐만 아니라 모두 뒤섞였는데, 단지 서로 논박하는 둘 사이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도 모순이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법칙과 양상 들은 계속 싸움의 장으로 들어와서 내적인 모순이 넘쳐났다 ... . 그 것은 보편적으로 서로 교차하고 제한하는 것, 대혼란이었다... . Natur, Geist, Logos, Vernunft, Passion, das Objekt, das Ich, Kunst, Kritik – aber dabei war keine Ordnung und Klärung, nicht einmal, [...] denn alles ging nicht nur gegeneinander, sondern auch durcheinander, und nicht nur wechselseitig widersprachen sich die Disputanten, sondern sie lagen in Widerspruch auch mit sich selbst. [...] Ach die Prinzipien und Aspekte kamen einander beständig ins Gehege, an innerem Widerspruch war kein Mangel [...]. Es war allgemeine Überkreuzung und Verschränkung, die große Konfusion [...].130)
그러나 이러한 복잡한 혼란 속에서도 그가 메모 124번에서 열거했던 다양
129) Thomas Mann: Literatur-Essay. Hans Wysling(editiert und kommentiert von). In: TMS I 1967. S. 139.
130) Der Zauberberg(1924) GW III 643f., 646.
한 이름을 가진 예술의 대립적인 힘들은 ‘정신과 삶 Geist und Leben’라는 개념으로 포괄적으로 수용되고 대략적인 정렬이 가능해진다. 원래 니체를 통 해 배운 ‘정신과 삶’이라는 대립적 예술개념은 토마스 만 작품의 전체 형식뿐 만 아니라 내용의 분석을 위해서도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 체와 토마스 만의 ‘정신과 삶’의 개념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니체에게 서 ‘정신’은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절대적 이상주의 철학으로서 창조적인 에너지인 ‘삶’을 위해 해체되어야할 부정적인 대상이었다. 반면 니체에게 ‘삶’
은 감각적인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생물학적인 것을 넘어 현실 을 초월한 창조적 에너지의 근원을 의미했다. 이러한 ‘삶’의 대변자가 다름 아닌 초인 ‘짜라투스트라’였으며 삶은 “권력으로의 의지”를 위해 필수적인 것 으로서 “삶 자체가 권력으로의 의지”라고 할 수 있었다.131)
그러나 토마스 만에게서 ‘정신’은 차갑고 냉담한 이성적인 것, 합리적이고 지적인 것으로서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플라톤에서 헤겔에 이르는 절대적 이상주의 철학은 만에게는 배척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독일적 정신의 표상으 로서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다. 반면 만에게 있어서 니체적인 ‘삶’은 이성적 인 정신에 반하는 ‘감각적’이고 ‘동물적’인 것, 자연에 속하는 것으로서 경멸과 경계의 대상이었다. 토니오 크뢰거의 주인공이 남쪽의 지나치게 아름다운 자연과 감각적인 환경, 동물적으로 생기가 넘치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북쪽으 로 떠나는 것132)은 토마스 만의 ‘삶’에 대한 이러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에 대해 쿠르츠케는 “그(토니오:필자)는 현실의 순수함, 삶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정신을 추구한다 er sucht nach «Wirklichkeitsreinheit», nach dem reinen, vom Leben unbeschmutzten Geist”133)고 말한다. 같 은 맥락에서 쿠르츠케는 “«정신», «예술», «예술가», «문필가», «문학»은 모 두 같은 편에 속하며 이들 모두에 대립하는 상대편은 «삶»이다 «Geist»,
«Kunst», «Künstler», «Literat», «Literatur» stehen in der Tat alle
131) Theo Meyer 1993. S. 19f.
132) Tonio Kröger GW VIII 305.
133) Hermann Kurzke 2010. S. 102.
auf der gleichen Seite. Ihr gemeinsames Gegenteil ist «Leben».”라 고 단정한다.134)
토마스 만은 자신이 창조한 인물들 중에서 토니오 크뢰거가 자신과 가장 가깝다고 보았으며 이 작품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장 비슷 하게 서술했다고 밝힌 바 있다.135) 쿠르츠케는 토니오 크뢰거의 ‘정신과 삶’으로서 이중적인 존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Geist, Erkenntnis, Analyse
정신, 인식, 분석 Leben
삶 Künstler
예술가 Tonio 토니오 Mutter 어머니
(musikalisch, liederlich) (음악적, 태만한) Zigeuner im grünen Wagen 초록마차의 집시
Süden, Italien 남쪽, 이탈리아
München - Schwabing 뮌헨 - 슈바빙
Fixativ 고착
Magdalena Vermehren 막달레나 페어메렌
Hamlet, Don Carlos, Immensee 햄릿, 돈 카를로스, 임멘제
Bürger 시민 Kröger 크뢰거 Vater 아버지 (korrekt) (올바른)
Konsul Krögers Sohn 크뢰거 영사 아들
Norden, Dänemark 북쪽, 덴마크 Lübeck
뤼벡
Frühlingsarom 봄향기
Ingeborg Holm 잉에보르크 홀름 Pferdebücher 말 책
<표 2> 쿠르츠케에 의한 토니오 크뢰거의 이중성 분석136)
134) Hermann Kurzke 2010. S. 101.
135) 김륜옥:.토마스 만의 삶과 작품에서 ‘결정적인 순간, 결정의 순간’. “P. E.와 토니오 크뢰거 시절”의 성역할을 중심으로. 헤세연구 36. 2016. 129-146. 130 쪽. 참고.
136) Hermann Kurzke 2010. S. 103f. 표 삽입은 본 논문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