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토마스 만의 생애와 시각예술 체험
3.2. 파울 에렌스베르크: 토마스 만의 사랑과 시각예술
파울 에렌스베르크(P. E.)173)는 토마스 만이 뤼벡 김나지움 시절의 동성 친구 아르민 마르텐스 Armin Martens(A. M.), 빌리람 팀페 Williram Timpe(W. T.)에 이어 세 번째로 경험했던 동성애적 감정의 대상이었 다.174) 클라우스 호이저 Klaus Heuser(K. H.)는 P. E. 이후의 또 다른 인물이다. 1900년에서 1905년 사이 부덴브로크 일가를 마무리하여 성공 적으로 문단에 이름을 알리고 후속 단편작품으로 막 도약하고 있었던 젊은 신진 작가로서 토마스 만이 감각적인 예술의 도시 뮌헨에서 P. E.에게 느 낀 동성애적 감정은 학창 시절의 다른 인물들이나 이후의 K. H.를 향한 것 보다 매우 강렬하고 직접적이었다. 토마스 만은 P. E.에게서 느꼈던 감정 을 30여 년이 지난 1934년 5월 6일의 일기에서 이전의 다른 인물들과 비 교하여 회고하며 그가 자신의 삶에 중심이 되었던 이 체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K. H.에게 느꼈던 것은 더 완숙하고, 강렬하고, 행복한 것이었다. 그러 나 이 “난 너를 사랑해 – 맙소사 - 난 너를 사랑해!” P. E. 시절 각인 된 뚜렷한 목소리에서 오는 것과 같은 압도란, ... 초년의 A. M.과 W. T.에게서 느꼈던 체험은 이와는 훨씬 반대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
172) 오한진: 근대독일의 문명작가와 문화작가. 홍성사 1981. 137 쪽. 표 맨 위 칸의 토마스 만, 하인리히 만 표기는 본 논문 필자.
173) 파울 에렌스베르크 Paul Ehrensberg는 토마스 만 자신과 연구자들에 의해서 P. E.로 표기된다. 본 논문에는 문맥에 따라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하겠다.
174) Dirk Heißerer: Im Zaubergarten. Thomas Mann in Bayern. München 2005. S. 62.
는 것이었으며, K. H.는 삶의 온화함으로 가득 찬 성격의 뒤늦은 행복 을 의미했으나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이런 강렬한 감정, 하늘을 날듯하 고 깊이 전율을 느끼게 했던 내 스물다섯의 심적 체험은 이미 없었다.
Das K. H.-Erlebnis war reifer, überlegener, glücklicher. Aber eine Überwältigung wie es aus bestimmten Lauten der Aufzeichnungen aus der P. E.-Zeit spricht, dieses „ich liebe dich – mein Gott, - ich liebe dich!‟, [...] Die frühen A. M.- und W. T.-Erlebnisse treten weit dagegen ins kindliche zurück, und das mit K. H. war ein spätes Glück mit dem Charakter lebensgütiger Erfüllung, aber doch schon ohne die jugendliche Intensität des Gefühls, das Himmelhochjauchzende und tief Erschütterte jener Herzenserfahrung meiner 25 Jahre.175)
토마스 만은 이 때의 P. E.를 향한 감정을 “내 스물다섯 살의 중심적 심 적 체험 zentrale Herzenserfahrung meiner 25 Jahre”176) 이라고 규 정하며 여러 번에 걸쳐 언급한 바 있다. 김륜옥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금 발과 푸른 눈의 순진한 인간, 밝고 활기에 찬 인간, 행복한 인간, 사랑스럽 고 평범한 인간인 한스 한젠과 잉에 홀름의 모델이 된 것은 바로 P. E.였 다”고 하면서 토마스 만이 파울 에렌스베르크와 토니오 크뢰거의 시기에 겪 은 것들은 그의 전체 삶, 그리고 작품에서 가장 ‘결정적’이고 원초적인 감정 체험이며 이 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고 주장한 다.177)
토마스 만이 1900년 경 드레스덴 출신의 화가 파울과 그의 형 칼 에렌스 베르크 Carl Ehrensberg(1878-1962)를 알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망 후 뮌헨으로 이주한 만의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자택에서 주선했던 사교 모임을 통해서였다.178) 파울은 당시 뮌헨 미술아카데미에서 동물 화가로 유명했던 175) Thomas Mann: Tagebücher 1933-1934. Peter de Mendelssohn(hrsg.)
Frankfurt a. M. 1977. S. 411f.
176) Hermann Kurzke: Thomas Mann. Das Leben als Kunstwerk. München 2000. S. 137.
177) 김륜옥 2016. 132 쪽 참고.
178) Dirk Heißerer: Im Zaubergarten. Thomas Mann in Bayern. München
하인리히 폰 취겔 Heinrich von Zügel(1850-1941)의 제자로 그림을 공 부하고 있었으며 그의 형 칼은 작곡가로 쾰른 음악학교 교수였다. 특히 P.
E.는 바이올린을 탁월하게 연주해서 음악가와 화가의 길 사이에서 고민을 했으나 결국 화가로 진로를 정했다. 에렌스베르크 형제는 차가운 이성, 인 식, 정신의 세계에 있었던 토마스 만에게 감각적인 삶의 행복을 일깨워준 인물들이었다. 토마스 만은 에렌스베르크 형제와 지내던 시절의 구체적인 장면을 30년 후 약력에서 회상하며 당시 이들과의 관계가 자신에게 주었 던 인간적인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의 동생(파울)이 내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그(칼)는 감탄스러울 정도 로 잘 이어지는 듣기 좋은 소리의 솜씨로 우리들에게 트리스탄을 연주 해 주었다. 내가 바이올린을 약간은 할 줄 알았기에 우린 다 같이 그의 트리오를 연주하기도 했으며,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슈바빙의 농부무도 회를 가기도 했다. 또는 내 집 혹은 그들의 집에서 셋이서 기분 좋은 저녁식사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아니면 내가 경험할 수 없 었을 이 우정의 체험을 제공해 준 그들에게 감사해야만 한다. 교양 있 는 천진함으로 이들은 나의 멜랑꼴리, 수줍음 그리고 민감함을 긍정적 인 것으로, 그리고 그들이 존중했던 (나의:필자) 재능에 동반되는 부수 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극복했다. 좋은 시절이었다.
Während sein Bruder mein Porträt malte, spielte er uns in seiner bewunderswert gebundenen und wohllautenden Art Tristan‹ vor. Wir führten, da auch ich etwas geigte, zusammen seine Trios auf, fuhren Rad, besuchten im Karneval miteinander die Schwabinger ›Bauernbälle‹ und hatten oft, bei mir oder den Brüdern, die gemütlichsten Abendmahlzeiten zu dritt. Ich hatte ihnen das Erlebnis der Freundschaft zu danken, das mir sonst kaum zuteil geworden wäre. Mit gebildeter Harmlosigkeit überwanden sie meine Melancholie, Scheu und Reizbarkeit, einfach indem sie als positive Eigenschaften und Begleiterscheinungen von Gaben nahmen, die sie achteten. Es war eine gute Zeit.179)
2005. S. 62.
179) 「Lebensabriß」(1930) GW XI 107.
P. E.가 토마스 만에게 주었던 가장 큰 기쁨은 상냥하고 사교적이며, 개 방적이고 말을 잘 하고 명랑하고 활기찬 성격이었다.180) 파우스트 박사 (1947)에 등장하는 레버퀸의 상냥한 친구이자 유쾌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루디 슈베르트페거는 P. E.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다.181) 작가 초기 ‘정 신과 삶‘의 대립 구도에서 정신을 추구하기로 방향을 정한 토마스 만이지만 그는 이성적, 정신적인 예술 속에서 공허함을 느끼고 삶이 주는 ‘따뜻함과 밝음’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과 교제하던 당시 남긴 토 마스 만의 사랑의 시는 정신적 예술로 인해 쇠진한 토마스 만이 이들로 인 해 느낀 삶의 따뜻함을 노래하고 있다.
생생한 느낌의 나날들이다!
너는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꽃피우듯 - - 오, 귀 기울여 봐, 음악! -- 내 귓가에 들리는 음의 전율이 환희에 넘쳐 불어온다 -
고마워, 나의 구원자!. 나의 행복! 나의 별!
무엇이 그리 길었던가?
무감각, 공허함, 차가움. 그리고 정신! 예술!
여기 나의 마음이, 그리고 여기 나의 손이.
사랑해! 맙소사 ... 널 사랑해!
사람으로 산다는 것이 이리 아름다고 달콤하고 사랑스럽다니?
Dies sind die Tage des lebendigen Fühlens!
Du hast mein Leben reich gemacht. Es blüht - - O horch, Musik! -- An meinem Ohr
Weht wonnenvoll ein Schauer hin von Klang - Ich danke dir, mein Heil! mein Glück! mein Stern!
Was war so lang? -
Erstarrung, Öde, Eis. Und Geist! Und Kunst!
Hier ist mein Herz, und hier ist mein Hand Ich liebe dich! Mein Gott ... Ich liebe Dich!
Ist es so schön, so süß, so hold, ein Mensch zu sein?182) 180) Hermann Kurzke 2000. S. 141.
181) 김륜옥 2016. 132 쪽. Katrin Bedenig Stein 2001. S. 74.
182) Thomas Mann: Notizbücher. Edition in zwei Bänden. Hans Wysling/
김륜옥은 초기 토마스 만에게 미쳤던 P. E.의 영향관계를 분석하면서
“무감각, 공허함, 차가움. 그리고 정신! 예술이라니! Erstarrung, Öde, Eis. Und Geist. Und Kunst!” 라며 내적 소외감에 절망하는 토마스 만 이 하는 사랑의 독백 내지는 고백은 분명 파울 에렌스베르크를 향해 있었 다고 밝힌바 있다.183) 바로 이 싯귀가 만의 자전적 작품 토니오 크뢰거 에도 그대로 나온다는 사실은 초기의 토마스 만이 이 인물로부터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토니오는 덴마크 해변의 호텔의 무도회장에서 잉에를 다시 보게 된 후 어린 시절 느꼈던 사랑의 감 정을 상기하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한다.
그가 그렇게 되는 그 모든 시간 동안에 그는 무엇이었던 것이며 지금은 무엇이란 말인가? - 무감각, 공허함, 차가움. 그리고 정신! 예술이라니!
Was aber war gewesen während all der Zeit, in der er das geworden, was er nun war? - Erstarrung, Öde, Eis, Und Geist! Und Kunst! 184)
이와 같이 청년 토마스 만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P. E.였지만 그러나 만은 그를 화가로서 진지한 예술가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P.
E.는 토마스 만의 초상화를 포함 그를 위해 적어도 네 점의 그림을 그린 것 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만과 어머니 율리아 만의 초상화와 ‘몰이사냥 Hetzjagd’과 ‘옷깃 주름 Halskrause’ 이라는 제목을 가진 두 점을 포함 총 네 점의 그림들은 토마스 만이 초기에 3년 동안 형과 함께 지냈던 이탈리아 에서 1898년 돌아와 1905년 결혼 전 까지 거주했던 그의 작업실들, 소위
“슈바빙의 은신처 Schwabinger Verstecke”라고 불렸던 곳들에 걸려 있었 다.185) 그러나 토마스 만은 “이 그림들을 보면서 날마다 기쁨을 느낀다”186)
Yvonne Schmidlin(hrsg.): Frankfurt a. M. S. 46.
183) 김륜옥 2016. 132 쪽.
184) Tonio Kröger(1903) GW VIII 336.
185) 이 그림들은 모두 소실되어 현재는 볼 수 없다. 다만 ‘몰이사냥’만이 토마스 만의 작업실 사진으로 희미하게 확인된다. Alexander Bastek/Anna Marie Pfäfflin(hrsg.): Thomas Mann und die bildende Kunst. Katalog zur Ausstellung im Museum Behnhaus, Drägerhaus und Buddenbrookhaus
고는 했지만 그의 그림을 진지한 예술로서 정신적인 면에서 높이 평가하는 글이나 발언은 전혀 남기지 않았다. 만은 오히려 그의 그림을 조롱하는 듯한 언급을 한다.
성공과 승리가 너의 창작에 있기를! 그 다음은 무엇? 무시무시한 소?
너는 그렇다고 말했지. 넌 나에게서 소떼로 넘어가려고 했지.
Heil und Sieg Deinem Schaffen! Was wird es dann? Eine ungeheure Kuh? Du sagtest ja, Du wolltest von mir zum Rindvieh übergehen.187)
<그림 2> 하인리히 폰 취겔: 힘든 노동(1908)
Lübeck, 13. 9. 2014 bis 6. 1. 2015. Petersberg 2014. S. 155. Abb.
40. 참고.
186) Dirk Heißerer/Helmut Hesse: Kunst im Hause Pringsheim, Kunst im Hause Mann München 1890-1933. In: Bastek, Alexander/Pfäfflin, Anna Marie.(hrsg): Thomas Mann und die bildende Kunst. Katalog zur Ausstellung im Museum Behnhaus, Drägerhaus und Buddenbrookhaus Lübeck, 13. 9. 2014 bis 6. 1. 2015. Petersberg 2014. 55-71. S. 58.
187) Hermann Kurzke 2000. S. 142. Brf. 1901 5. an Paul Br. III. S. 445.
토마스 만이 파울의 그림 창작에서 소를 언급하는 것은 뮌헨 미술 아카데 미에서 그가 동물 그림으로 유명한 취겔의 제자라는 점을 암시하며 조롱하 는 것이다. 취겔은 독일 인상주의의 중요한 화가의 한 사람으로 뮌헨 분리 파와 독일 예술가 연합의 초창기 멤버였다. 그는 40여 년 이상 힘든 일을 주제로 하여 노동을 하는 말과 소의 역동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다(그림 2).
토마스 만은 이러한 배경에서 P.E.의 그림을 소와 관련지어 언급하고 있으 며 취겔의 제자로서 그의 그림은 토니오 크뢰거에서 한스 한젠이 말 사진 을 좋아 했던 것처럼 만에게는 말과 소의 화가가 그린 밝은 생명력이 넘치 는 삶의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만 연구 자 페터 데 멘델스존은 “파울은 토마스 만의 시각예술세계와 관련하여 볼 때 만을 처음으로 그림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 것은 맞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만이 시각예술의 세계에서 평생 앞으로 발전하지 않고 보수적인 데 머물게 된 것은 삶의 화가로서의 파울로부터 받은 영향 탓일 수도 있다”
고 말한다.188) 베데니히 슈타인 또한 여기에 동의하면서 “파울이 토마스 만 과 시각예술과의 관계에 특별히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주장 한다.189) 그녀에 따르면 “토마스 만은 처음부터 자신과 파울 사이에는 다루 는 매체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한 표상 또한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190) 베데니히 슈타인은 “만의 눈에 파울 에렌베르크는 예 술로 가는 심오하고 정신적인 통로가 아닌 실용적-직접적인 통로를 제공해 주는 예술가로 보였다”고 하면서 P. E.의 역할을 삶의 측면으로 제한한 다.191) 이러한 배경으로 미루어 볼 때 토마스 만이 그에게서 본 것은 삶의
‘따뜻함과 밝음’이며 그로부터 기대한 것은 예술가로서의 ‘진지한 정신’이 아 니라 천진한 인간으로서의 삶의 ‘가벼움 Leichtigkeit’이었다고 할 것이다.
188) Peter de Mendelssohn: Der Zauberer. Das Leben des deutschen Schrifstellers Thomas Mann. Frankfurt a. M. 1995(überarbeitete und erweiterte Neuausgabe der 1975). S. 582.
189) Katrin Bedenig Stein 2001. S. 75.
190) Ebd. S. 75.
191) Ebd. S.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