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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의 미켈란젤로 수용

4. 토마스 만의 시각예술 수용 양상

4.3. 토마스 만의 미켈란젤로 수용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토마스 만은 시각예술을 ‘정신’과 배치되는 ‘삶’의 예술로 간주하며 남쪽의 시각예술 문화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토마스 만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더 큰 반감을 갖고 있었는 바, 이는 니체가 자신의 ‘초인’의 모델로서 특별한 애정을 갖고 다루었던 르네상 스시대의 무인 체자레 보르지아를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서 비난하는 것에서 도 분명히 나타난다.276) 그러나 만은 르네상스 시대를 주도했던 시각예술 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다 빈치는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시각 예술과 르네상스 문화에 대한 그의 여타의 태도와는 다른 차별성을 드러낸 다.277) 이 거장들에 대한 만의 이와 같은 수용태도는 다소 예외적인 것으 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예술가들에 대한 토마스 만의 호의적인 관점은 근 대 이후 독일인들의 두 예술가에 대한 해석과 수용, 이들에게 가졌던 독일 인들의 전통적인 특별한 표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만은 이 예술가에 대한 독일 문화에서의 전통적인 해석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특히 미켈란젤로의 회화 작품을 통해서 자신이 원하는 표상, 즉 정신과 삶 사이 에서 고뇌하는 예술가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추출해내어 문학 작품 창작에 활용하였다. 또한 만은 자신의 인간적인 감정, 곧 1950년 75세의 노인으 로서 19세 소년에게 가졌던 동성애적 감정의 부끄러움을 정당화시킬 수 있 는 통로를 미켈란젤로의 시에서 발견하면서 예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인간적

276)Tonio Kröger(1903) GW VIII 302. 르네상스 문화 수용과 관련하여 니체와 토마스 만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본 논문 5.2. 참고.

277) 니체의 라파엘로와 ‘드레스덴의 시스티나 성모’ 예찬과 토마스 만의 이 그림 수용 에 대해서는 본 논문 2.2. 참고

인 측면에서도 미켈란젤로와 자신을 일치시켰다. 이렇게 보면 토마스 만이 시각예술 전반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입장은 그의 시각적 수용 능력의 부족 이라기보다는 실러와 같은 의지적인 측면 외에 자신의 입장에 따라 선별적 으로 시각예술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의적인 해석과 수용 태도에 따른 것 이라고 할 수 있다.

a. ‘정신’으로서의 미켈란젤로 수용

토니오 크뢰거가 자신의 정체를 찾아 북쪽으로 떠난 것과는 달리 현실의 토마스 만은 20대 초반 남쪽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근원과 지향점을 찾기 위해 분투하는 시간을 가졌다.278) 또한 토니오는 남과 북 사이에서 방황하 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작가 토마스 만은 처음부터 자신의 북쪽 성향을 고수 하였으며 독일정신에 뿌리내린 그의 보수적인 입장은 몇 번의 변화가 있긴 했지만 일생 동안 대체적으로 같은 방향을 향했다고 볼 수 있다.279) 토마 스 만은 1895년 7월 로마로 가서 이미 이탈리아에 와 있었던 형 하인리히 를 만나 로마와 근교 팔레스트리나에서 10월까지 같이 지낸 것을 처음으로 평생 30여 회 이상 이탈리아여행을 하였다.280) 토마스 만은 1930년 약 력에서 작가 초년 시절을 회상하며 바티칸의 시스티나 예배당에서 미켈란 젤로의 작품을 보았던 때의 강렬한 체험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그 도시(로마:필자)가 제공하고자 하는 역사적-미학적인 인상들을 나는 경외심을 갖고 받아들이긴 했으나, 이것들이 내 것이며 이들이 나를 직 278) 만 형제의 막내 동생 빅토르 만은 형들이 이탈리아에 체류하는 동안 이그림책

만들어 와서 뮌헨의 어린 동생들에게 선물했던 1896년 무렵 그들의 유쾌한 분위기 를 회상하면서 자신은 형들이 그 시기에 이탈리아에서 그들의 근원과 지향점을 찾 아 심각하게 분투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증언한다. Viktor Mann 1949. S. 47.

279) 빅토르 만은 위의 두 형들이 지향점을 남과 북, 동과 서, 전 세계라는 물리적인 위치와 관련지어 설명한다. Ebd. S. 47-49.

280) 토마스 만 초기의 이탈리아 체류에 대한 상세한 묘사와 이탈리아가 토마스 만 문 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요나스의 책 Ilsedore B. Jonas: Thomas Mann und Italien. Heidelberg 1969 참고. 특히 이 책의 11-16 쪽에는 토마스 만 의 이탈리아 여행 행선지와 체류 기간, 작품 집필, 동행자 등에 대한 정보가 도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접적으로 추동할 수 있으라는 바로 그 느낌을 갖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 다. 바티칸의 고대 조각은 르네상스 회화보다 내게 많은 것들을 말해주 었다. 최후의 심판은 철저히 염세적으로-도덕적이며 반쾌락주의적인 내 정서에 부합하는 극상으로서 나를 전율시켰다.

Die historisch-ästhetischen Eindrücke, welche die Stadt zu bieten hat, nahm ich ehrerbietig auf, nicht eben mit dem Gefühle, daß sie meine Sache seien und mich unmittelbar zu fördern vermöchten. Die antike Plastik des Vatikans hatte mir mehr zu sagen als die Malerei der Renaissance. Das Jüngste Gericht erschütterte mich als Apotheose meiner durchaus pessimistisch-moralischen und antihedonistischen Stimmung.281)

토마스 만은 기본적으로는 이탈리아 로마의 찬란한 문화유산에 대해 경외 심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쪽의 문화에 속한다고 간주한 시각예술, 특히 이탈리아의 시각예술을 기본적으로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 며 이 예술이 자신의 창조성을 촉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282) 그러나 만 은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만큼은 이 작품이 자신에게 전율을 불러일으킨다고 하면서 르네상스 회화예술에 대해 가졌던 그의 부정적 입장 에 배치되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만에게 미켈란젤로는 단지 이탈리아 르네상스화가 중 뛰어난 대가들 중 한 명이 아니었다. 20세의 젊은이였던 토마스 만이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벽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던 것은 정확히 400년 전 태어난 르네상스의 대가에게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예술가로서 자신과 비슷한 감정과 가치체계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받은 전율적인 인상을 바탕으로 토마스 만의 예술가 미켈란젤로에 대 한 숭배에 가까운 애정은 그의 말년까지 계속되었다.283) 만은 파우스투스 281)Lebensabriß(1930) GW XI 103.

282) 토마스 만은 이탈리아의 전통적인 시각 문화유산에 기본적인 존경심은 갖고 있지 만 실러처럼 이탈리아 시각예술의 세계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1954년 케레니 에게 보내는 서신에서도 쓴 것으로 보아 남쪽의 시각적 문화 유산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생각은 끝까지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83) 토마스 만과 미켈란젤로의 관계를 다룬 최신 연구는 Michael Thimann: Thomas Mann und das Michelangelo-Bild der Deutschen. In: Katrin Bedenig Stein/Thomas Sprecher/Hans Wysling(hrsg.): Thomas Mann Jahrbuch.

박사(1947)에서 주인공 레버퀸의 오라토리오 대지앙 Apocalipsis의 내 용에 대해 서술하면서 20세에 보았던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에서 느꼈던 전율을 50여 년 후에 다시 소환한다.284)

레버퀸의 음으로 울리는 회화는 단테의 시로부터 나온 것을 많이 갖고 있었다. 무수한 사람들의 육체로 넘쳐나는 벽, 여기서는 천사가 멸망의 나팔로 몰려들고, 저기서는 카론의 나룻배가 죽은 자들을 내려놓고, 죽 은 자들이 부활하고, 성인들이 찬양을 올리고, ... - 요컨대, 최후의 심판의 그룹 별 구성, 그리고 장면 구성에 관하여.

Von Dante’s Gedicht hat Leverkühns tönendes Gemälde viel, noch mehr körperstrotzend übervölkerte Wand, auf weicher Engel hier in die Posaunen des Untergangs stoßen, dort Charons Nachen sich seiner Last entlädt, die Toten auferstehen, die Heiligen anbeten, [...]- kurzum, von dem Gruppen- und Szenenaufbau des Jüngsten Gerichts.285)

이와 같이 미켈란젤로에 대한 토마스 만의 애정은 무엇보다 미 자체를 숭 배하는 예술가, 예술의 도움으로 자연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고 분투하여 승리한 선배 예술가로서의 존경심에서 근거하는 것이었다.286)

토마스 만이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직접 본 이후에 그를 더욱 심층적으로 탐구하게 된 것은 1907년의 프리츠 크납 Fritz Knapp(1870-1938)과 1919년 오스발트 슈펭글러 Oswald Spengler(1880-1936)의 저서287)

Bd. 26. Frankfurt a. M. 2013. 39-52.

284)파우스투스 박사의 ‘대재앙 Apocalipsis’ 장에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과 함께 로마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천정벽화 ‘천지창조’의 일부를 그대로 묘사한 부분 이 있어서 토마스 만이 초기에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에게서 받은 깊은 인상이 매우 강렬했으며 말년에까지 지속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Doktor Faustus(1947) GW VI 676. 참고.파우스트 박사에서 만이 미켈란젤로 그림을 참고한 사실에 대해서는 Hans Wysling/Ilsedore B. Jonas 1975. 391-393 쪽 참고.

285)Doktor Faustus(1947) GW VI 476. 인용 내 강조는 본 논문의 필자.

286) Katrin Bedenig Stein 2001. S. 90.

287) Fritz Knapp(hrsg.): Michelangelo. Des Meisters Werke in 169 Abbildungen. 2. Aufl., Stuttgart/Leipzig 1907., Oswald Spengler:

Der Untergang des Abendlandes. Umrisse einer Morphologie der Weltgeschichte. Bd. 1. Gestalt und Wirklichkeit. Wien/Leipzig 1918.

통해서였다. 특히 만은 예술사학자 크납의 책 서문에서 미켈란젤로가 색채 보다는 선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나신(裸身)을 탁월하게 묘사했다는 점, 미 켈란젤로 그림이 정신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부분에 많은 줄을 치고 메모 를 남겼다.288) 선적인 것은 미켈란젤로에 대한 만의 애정에서 중요한 요소 였다. 색채와 비교했을 때 선이 갖는 이성적인 성격에 관한 논의는 르네상 스 시대에 이미 드로잉 중심의 피렌체 미술과 색채를 중시하는 베네치아 미 술을 비교한 ‘디세뇨와 콜로레 disegno e colore’ 논쟁으로 시작되었 다.289) 바사리를 비롯한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아이디어와 구상과 관계되는 피렌체의 디세뇨 미술이 즉흥적인 베네치아 화파의 콜로레 회화보다 우세하 다고 생각하였으며 이런 맥락에서 예술사에서는 선적인 것이 색채보다 이성 적이고 창의적이며 정신적이라고 간주되어왔다. 피렌체 미술에 근거를 두었 던 미켈란젤로는 디세뇨 개념이 적용되는 세 가지 예술, 회화와 조각, 건축 모두를 아우르며 이들 모두를 한 차원 높은 경지로 올려놓은 예술가로서, 이전에는 수공업자로 간주되던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지위를 이성적인 지 식인으로 격상시킨 예술가였다. 그는 정신적인 것을 손으로 구현한 지적인 예술가로 생전에 이미 높이 추앙되었다. 토마스 만이 선을 기초로 한 디세

프릿츠 크납과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통한 토마스 만의 미켈란젤로 수용에 대해서 는 Katrin Bedenig Stein 2001. S. 98-100. 참고. Michael Thimann 2013의 논문도 토마스 만이 미켈란젤로를 독일 정신사의 전통선상에서 수용한 과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288) Katrin Bedenig Stein: 2001. S. 99.

289) ‘디세뇨 콜로레’논쟁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회화에서 드로잉과 채색 사이의 우위 에 관한 것이었다. 회화에서 드로잉은 예술가의 아이디어 고안을 뜻하는 것으로, 자연을 모방하여 실제로 채색을 하는 그림 그리기의 실행과정과 대조되는 것이었 다. 사실 이 논쟁은 16 세기 이탈리아 회화의 두 전통적인 화파, 피렌체를 중심 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와 베네치아 중심의 이탈리아 북부 화파 사이의 대립과 우 위에 관한 것이었다. 피렌체에서는 화가들이 주로 드로잉과 준비를 위한 연구과 정에 중점을 두었다면 베네치아에서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직접 캔버스에 그 려서 더 즉흥적이고 표현적인 그림을 창착하였다. 두 가지의 상이한 회화 창작 접근법은 조르지오 바사리 Giorgio Vasari(1511-1574)와 로도비코 돌체 Lodovico Dolce(1508-1568)에 의해 상세히 논의되었다.

Claire Pace:http://www.italianrenaissanceresources.com/glossary/disegno-e-colore.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1. 27. 9시 41분 접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