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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부구조
조직생활사회는 1970년대 중반에 본격적으로 정착했지만, 그를 가능하게 한 역사적 배경이 존재했고, 그것이 성립하고 기능하는 데 필요한 하부구조가 건설되어야 했다. 그 핵심은 네 가지이다. 첫째, 경제적으로 동원경제와 식량배급제, 둘째 ,제도적으로 대안의 사업 체계, 셋째, 사상적으로 주체사상, 넷째, 조직생활사회를 유지하는 정치․치안적 하부구조이며, 이는 주민등록, 대규모 소개와 추방, 여 행증 제도, 조직생활에서 포상과 징벌을 포함한다. 이러한 하부구조 는 분단 이후 점진적 단계적으로 구비되어 오는 가운데, 1970년대 중반 ‘총체적 통제’ 의지가 현격히 강화됨에 따라 그 제도의 체계와
255) Balint Balla, Kaderverwaltung: Versuch zur Idealtypisierung der “Bürokratie”
sowjetisch-volksdemokratischen Typs (Stuttgart: Ferdinand Enke Verlag, 1972) 참조.
운영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 여기서 언급하는 네 개의 하부 구조는 별개로는 존재할 수 없고, 개별 하부구조는 다른 하부구조의 존재를 전제하는 식의 복합체이다. 따라서 이 중 어느 하나에 중대 한 변화가 발생하면, 다른 개별 하부구조도 과거와 같은 동일한 양 상으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다음으로 3절은 조직생활사회가 가 장 성숙해 있던 1970년대 중후반을 기준으로 그 제도와 운영 방식에 대해 서술한다.
가. 경제적 하부구조 - 동원경제와 식량배급제
경제적 하부구조는 기본으로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동원경 제, 둘째, 식량배급제이다.
(1) 동원경제
북한 경제 운영의 중요한 특징은 동원경제라는 것이다. 북한 경제 는 동원경제로 시작하여 동원경제로 지속되고 있다. 조직생활은 한 편에서는 충성 강화를 통한 정치안정의 기제이지만, 그 충성 강화는 생산 증대를 통해 즉 동원경제에의 열성적 참여를 통해 일차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즉 조직생활은 정치적 안정과 생산 증대라는 이중 목적의 성취에 기여해야 한다.256) 1절에서 서술하였 듯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총체적 통제’에의 추가적 동력은 비현실적 으로 목적을 높이 설정하고 온 사회와 조직과 개인을 이러한 목표를 향해 강제적으로 추동할 때 발생한다. 이러한 시도는 불가피한 혼란 을 초래하는데, 그 혼란을 제어하고 목표를 달성하려면 강압적 개
256) Balint Balla, “‘Bürokratie’ oder ‘kader’-Verwaltung? Zur Idealtypisierung der Bürokratie-volksdemokratischen Typs,” Zeitschrift für Soziologie, ja. 2, heft 2 (1973), pp. 101~127.
입, 위로부터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 의무, 이를 위한 절대적 조직규 율, 그리고 사상적 반주음악이 필요해진다. 즉 언급된 사항들이 기 능하게 만들자면, 사상예술적 효과음악과 장치로써, 대내외적 적들 과의 실제적 그리고 ‘환상적’ 또는 사상적 투쟁의 분위기, 그리고 수 령의 무오류성과 절대적 권위에 대한 굳은 신념, 그 권위의 확실성 그리고 권위에 절대적 복종을 보장하는 일련의 연성/경성 강제체계 가 필요하다.
북한식 동원경제의 원형은 1946년 설립된 조선 임시 인민위원회 가 주도한 ‘건국사상 총동원 운동’이었다. 1950년대 후반의 전후 인 민경제복구건설 과정도 그 겉모습은 ‘3개년 인민경제 계획’이나 ‘5개
년계획’이라는 식으로 계획경제에 기반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
으로는 노선/세력 갈등과 관련한 반종파투쟁의 정치적 분위기를 배 경음악으로 펼쳐진 ‘혁명적 대고조 운동’, 즉 대중동원 운동의 양상 을 띠었다. 주요한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까치 법칙이 든 까마귀 법칙이든 우리는 모른다”면서 공칭능력을 타파한 천리마 의 고향 강선에서 ‘강철 증산운동’, 덕천과 기양에서 ‘자동차 뜨락또 르 생산운동’, 평양시 복구에서의 ‘평양속도 창조운동’, (함경북도 경성군) 주을에서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인민군대가 동원된 함 흥의 ‘2.8비날론 공장 건설운동’ 등이다. 이와 같이 북한 스스로가 평가하는 바의 ‘기적적’ 대중동원경제에서는 합리적 경제학적 관리 방식은 설 자리가 거의 없었다. 남북 분단 직후부터 시작되었던 북 한 지역에서의 동원경제는 그 기본구조를 유지한 채, 상황의 변화에 따라 점차로 성숙한 양태로 진화했다. 동원경제는 1970년대 그 절정 에 이르렀다. 1970년대는 남북 간의 경제적 격차가 남측에 유리하게 변화하던 시기이자 조직생활이 절정에 이르던 시기였다.
북한에서 동원경제의 특징은 여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수령의 현지지도이다. 북한은 수령의 권위를 극대화했고, 그 극대화 된 권위를 동원경제의 추동력으로 삼았다. 이러한 양태의 시발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이 1960년대 초에 있은 평안남도 강서군 청산리에 대한 수령의 현지지도였다. 이 현지지도는 “위가 아래를 도와주고 늘 현실에 들어가 모든 것을 정치적 방법, 당적 지도 방법으로 해결” 한다는 ‘청산리 정신, 청산리 방법’을 정립했다. 주민을 강제 동원하 는 것에 기초하는 동원경제가 유지되고자 하는 한, 수령의 권위와 교시 집행체계의 효과성이 높아지고 유지되어야 했다. 다시 말해 동 원경제와 수령독재는 동전의 양면이었다. 수령의 권위를 강화하고 절대화하고자 하는 시도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 유일사상 10대 원칙으로 정식화되었다.
둘째, 동원경제는 혁명투쟁, 계급투쟁, 사상투쟁을 추동력으로 하 여 근로대중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것에 의거했다. 북한은 이를
‘주체형의 경제건설’ 방식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투쟁식 군중
노동동원은 세 가지 측면의 특징을 가졌다. 먼저 이것이 가능하려면 사회적으로 늘 긴장되고 동원된 태세가 유지되어야 했으며, 그것이 자연적으로 불가능할 때 인위적으로 조장되어야 했다. 다음으로, 혁 명투쟁, 계급투쟁, 사상투쟁을 추동력으로 하는 경제방식은 무보수 노동을 추진하며 또는 노동에 대한 보수를 최저한으로 억누르며, 사 회 전체 소비수준을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 다. 다음으로, 혁명투쟁, 계급투쟁, 사상투쟁의 강조와 일상화는 개 인이 자율성을 버리고 전체의 대의에 따라 전체가 요구하는 것에 절 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요 또는 설득하는 효과적 장치였다.257) 셋째, 동원경제는 중장기적으로 생산력 감퇴를 불가피하게 했는
257) 정치도덕적 자극, 전투적 노력동원운동의 정치와 경제에 관하여 박형중, 북한적 현상의 연구: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정치경제학 , pp. 126~189.
데, 이를 동원의 강화를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생산력 감퇴를 야기 하는 동원경제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생산력 감퇴에 대응하는 방법 은 다름 아니라 동원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동원경제가 생산력 감퇴를 야기하는 이유는 동원경제가 경제적 합리성을 무시하는 단 기 충격적인 노력집약적 방식이었고, 선진적이고 합리적인 생산기 술이나 방법을 도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사회 동원에서는 통계나 경제과학적 노동관리, 원가관리, 생산관리, 기술 관리보다는 수령의 권위, 반제투쟁, 계급투쟁, 사상선전과 정치도덕 적 평가 등이 중시된다. 특히 정치적 방식, 사람과의 사업으로 운영 되는 동원경제의 과정과 결과에 대해 기술․경제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동원경제 방식에는 계획-집행-평가분석- 재계획의 인간활동 기본주기조차 구조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그 런데 생산력 감퇴의 이유 때문에 동원경제를 포기하는 일은 불가능 했다. 그 이유는 동원경제는 수령의 권위체계, 혁명투쟁/계급투쟁/
사상투쟁이 함축하고 있는 대내정치적 안보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동원경제를 해체한다는 것은 언급된 두 가지 사항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넷째, 조직생활의 강화는 투쟁식 군중노동동원에서 청년들을 주 력군으로 동원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청년들은 1970년대 초 부터 청년기 인생의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는 10년 동안 국가를 위해 무보수 노동을 제공하도록 강요받았다. 나아가 이들은 그것을 (강제 에 의해 억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발적으로 긍정하고 수용하는 겉모습을 보여야 했는데, 조직생활의 강화가 이를 가능하 게 만들어야 했다. 조직생활의 강화시기도 1970년대 초였고, 청년들 이 전투원이라기보다는 무보수 노동제공자로서의 10년 동안 군복무 를 해야 했던 시기도 1970년대 초반부터였다. 북한이 조직생활 사회
로 전환되기 시작하던 1970년대 초, 사회동원의 종류로는 <충성의 야간돌격대>, <생산현장 지원>, <대건설 동원>, <모내기>, <김매 기>, <가물막이전투>, <추수전투> 등이 이미 존재했다. 그런데 이에 추가하여 1970년대 초부터는 당과 수령의 지도하에 청년노동력은 내각(당시 정무원)에서 분리되어 인민군대와 청년동맹으로 편제되 었다. 이러한 신 편제하에서 북한 청년들은 <돌격대>, <군인 건설 자> 등의 정치적 미명하에 각종 정치적 노동력으로 10년 동안 근무 했다. 이 시기부터 북한 인민군대의 가치는 군사력보다는 오히려 노 동력 원천으로서의 비중이 더 컸다. 1970년대 초반, 당이 외화벌이 를 시작하고 국가 계획경제의 내용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120 여만 명에 달하는 인민군대도 업적쌓기 및 외화벌이에 진입했다. 이 를 알리는 첫 신호탄이 인민군대의 서해갑문건설(1981~1986)이었 다.258) 군대는 (국가 예산의 지원없이 자체 자금으로 또한 단기간 에) 서해갑문을 건설하겠다는 데 대한 허락을 받아 내었다. 그런데 그 허락에는 그 자체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대가 외화벌이 사업도 행할 수 있다는 허락도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 ‘부식물 자체생산’
이라는 부산물도 따라 붙었다. 인민군대는 이때부터 명실 공히 군사 력보다는 노동력으로서 그 질과 가치가 바뀌었다. 백년대계 교육의 시점에서 보면 한창 공부할 10대 후반에 인민군대에 나가 10여 년 간 변변한 책 한 권 읽지 못하고 이치를 따지는 말 한마디 듣지 못한 채 오로지 명령체계에 따라 ‘백두의 혁명정신’ ‘혁명적 군인정신’을 부르짖으며 하루 12~15시간 육체노동에만 종사했다.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학령기, 혼령기 다 놓치고 체력도 쇠진해 결국 단순 노동력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1980년대 이와 같이 군인 노동력
258) 특수기관 외화벌이, 그리고 그에 의한 계획경제 침식과 장마당 번성에 관하여, 박형 중․최사현, 북한에서 국가재정의 분열과 조세 및 재정체계 (서울: 통일연구원, 2013), pp. 5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