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상상'의 전개과정에 대한 비교연구를 통해 '재난'이 환상으로 표현되는 문학적 의미를 살펴보았다. '재난에 대한 상상'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신체와 관련하여 구현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4장에서는 김사과가 한국소설에 등장하는 '재난의 상상'을 논한다.
서론
재난의 환상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다양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문제는 재난의 환상이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 시점에서 재난의 환상은 단순히 새로운 가능세계일 뿐이다.
파국과 파국의 상상력
한편, '재난'은 연극이라는 예술 분야에서 단어 자체가 탄생한 초기부터 사용되어 온 단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6) '재난' 개념과 관련하여 모리스 블랑쇼는 『혼돈을 쓰다(L'écriture du désastre)』에서 데자르트와 묘법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다가 실제로 이런 위험이 부작용으로 발생하면 '재난'이라고 할 수 있다. '재난'이다. '보험'이라는 용어도 중요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재앙이 현실이 되기 전에는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재앙의 현실 자체가 재앙을 보편적으로 만든다.26)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명서교, 카타스트로후카라노 哲학 잼=피에이르・. “비극에서 군주와 순교자는 내재성을 벗어나지 않는다(Immanenz).40”라는 벤야민의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일본적 파국의 상상력
그렇다면 재난으로 인한 각성을 통해 현실이 드러나는 순간, 다와다 씨는 어떤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것은 요시로뿐 아니라 그의 아내 마리카도 마찬가지다. 마리카는 요시로, 무메이와 함께 살지 않고 고아원의 원장으로서 부모 없는 아이들을 돌본다63). 이러한 해석으로 볼 때, 무메이와 수이렌의 만남은 무메이에게 다가올 재앙의 징조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와다 요코가 보여주는 재앙의 상상력은 다각적인 특징을 지닌다. 소설 속에 참사 자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동일본대지진의 참사를 실제로 경험한 일본인으로서 작가 다와다 요코가 가지고 있는 위치의 좌표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자 어머니는 즉각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이 작품들은 현실 세계에서 일종의 한계나 종말, 파국의 기운을 느낀 작가가 문학작품이라는 가상세계를 통해 다가올 파국을 상상적으로 실험한 결과이다. 물론 제니뿐만 아니라 이씨에게도 자신과 평범한 사람들 사이의 격차는 그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이 홍수는 소년과 그의 어머니의 눈에 포착되면 재앙적인 상황으로 나타난다.
앞서 2장에서 언급했듯이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이 재앙이라면 대상 자체를 공격할 만큼의 힘을 발휘하는 것도 재앙이 된다. 두 사람에게 있어서 파국은 아버지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생존의 측면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어려움이다. 현재 '재앙'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점에서 포착된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산불과 모래의 이미지가 어떻게 파국적으로 보이는지 살펴보자. 이런 맥락에서 앞으로 다가올 재난은 세 사람 모두에게 똑같이 재난이 될 것이며,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국적 파국의 상상력
결론
이러한 틀을 이용하여 한국과 일본의 문학과 영화에 등장하는 재난 환상에 대한 비교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므로 일본에서 발생한 재난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상상력은 방사능 오염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편, 한국은 2장에서 정의한 재난이나 일본과 같은 재난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없다.
한편, 재난 이미지는 개인의 재난을 재앙적 이미지로 승화시키려는 시도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상으로서의 파국은 각성의 우화이자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기회로 나타난다. 한국은 실제로 일본과 같은 재난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실험일 수 있다.
이 파국적 상상력은 파국 없는 세상의 파국을 그려내고, 새로운 세계, 인류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적'이라고 할 수 있다. 본 비교연구를 통해 드러난 일본과 한국의 '재난 상상'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현실의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일본의 '재난 상상'에는 현실의 주체가 경험한 사건과 무관한 재난이 존재할 수 없다.
한편 후자에서는 재앙을 재설정하려는 욕구가 초래한 종말로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