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年代 上海 ‘新女性 談論’의 企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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申報
와
晨報
의 영화평과 독자평을 중심으로-李 浩 賢 (仁荷大)
Ⅰ. 머리말
Ⅱ. 다양한 신여성담론의 제기와 논란
Ⅲ. 1920,30년대 상해 주요 여성영화
Ⅳ.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평과 독자평
Ⅴ. 맺음말
Ⅰ. 머리말
일본인이 운영하는 서점, 프랑스 빵집, 러시아인의 발레교습소, 다양 한 국적을 갖은 사람들의 출입으로 성행중인 까페 등등 근대 상해는 전형적인 화려한 도시의 모습이었다.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상해에 존재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뒤엉켜 있었다.
거리 곳곳에 있던 환전소,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눈요기, 오락거리가 그 어느 곳보다 넘쳐났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전, 그 절정은 1920년대 말부터 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였다. 이 시기는 남경국민정부가 정부로서의 기능을 다져나가기 시작한 때였으며, 국민당과 공산당의 분열과 대립이 극심한 때이기도 헸다. 또한 일본의 만주침략(9.18사변), 상해사변(1.28사변)으로 시작된 반제분위기가 상해지역을 휩쓸던 시기 이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상해 지역의 모습, 성격은 그 다양성 만큼이나 정치
적 움직임과 논쟁도 치열했다. 특히 5·4신문화 운동가들이 전통에 대 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요구한 이후, 1930년대는 계몽에 대한 관심을 재촉진시켰던 시기이기도 했다. 5·4신문화 운동가들은 자신들의 세력 을 다시 조직화하여 새로운 계몽운동을 시작하고자 했고, 특히 좌익계 열 조직들이 문학을 중심으로 30년대 초 결성되면서 이들 중심의 적극 적인 ‘계몽’의 열풍, 교육적 열정이 일어났고 물론 영화계도 예외는 아 니었다.
영화는 화려한 대도시 상해와 가장 어울리는 매체였다. 근대의 대표 적 ‘시각’매체이자, 서구적 근대를 자연스럽게, 심지어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든 영화의 영향력에 곧 중국 지식인들도 주목했다. 이미 문학쪽 언어에서 시작된 계몽의 바람은 언어보다 더 쉽게, 더 많은 대 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계몽의 도구로서 활용하고 자 했으며, 점차 영화적 완성도에서도 놀라운 발전을 보여 주었다.
당시 영화의 소재는 다양했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은 즐겨 다루어 지는 테마였으며, 다양한 의미에서 ‘여성’은 영화 속 소재로 다루어졌 다. 특히, 여성을 새로운 관점에서 재조명함으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여성’에 대한 관심이 영화의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또한 당 시 신여성에 대한 관심은 이후 연구에서도 특별한 주의를 끌었다. 그 러나 중국사 연구자들은 ‘근대 중국 여성사’라는 큰 틀에서 주로 영화 보다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정책 차원 속에서, 혹은 특별한 개인을 중 심으로 다루어 졌고, 그 중에서도 ‘근대’, ‘국민(형성)’, ‘동원’ 등의 관점 에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1) 이러한 연구들은 근대 여성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식민지, 반식민지 사회적 상황이 근대 여성에 대해 어 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와 연관된 논리 속에서 나온 것이며, 중국사 뿐 만 아니라 한국사 연구자들도 관심을 갖는 주제였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구나 일본과는 다른 근대적 경험을 겪은 한국 1)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이선이, 한국의 중국 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여성 과 역사 6, 2007)와 천성림, 한국의 중국여성사 연구: 현황과 과제 (동양사 학회 2010년 추계연구발표회 발표문)을 참조.
의 경우, 식민지 내부의 저항적 민족주의의 기획이 남성 엘리트 중심 의 패권주의적 태도를 가정에서부터 관철시켜 나가는 논리로 이어졌으 며, 이것이 교육과 가정개조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도 실질적인 여권의 신장과 무관한2) 계몽의 대상으로서 인식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여 성의 사회참여 부분, 취업과 같은 구체적인 여성 자립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논의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논거의 증거를 삼고 있 다.3) 물론 여성연구는 서양사나 문학, 사회학 쪽에서 더 활발하게 연 구가 진행되고 있다. 중국 문학 쪽에서는 이미 영화자료를 이용한 신 여성 연구가 진행된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김정구는 ‘신녀’라는 영 화를 통해 신여성의 성격을 이야기 하고 있다.4) 그는 근대 중국 여성 이 전통적 여성상에서 근대의 ‘타자’로 재규정되면서 ‘신’여성이 되어야 하는데, 이는 여성 스스로 자신을 인식하고 주체화한 것이 아니라 남 성에 의해 ‘발견’되고 호명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고, 따라서 남성 에 의해 해방된 ‘신여성’은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실체가 아닌 기호로 서 존재하게 되었다고 규정하였다. 결과적으로 남성 주도의 여성 해방 이데올로기라는 아이러니로 인해 ‘신여성’ 담론이 결국 해방의 서사가 아닌 억압의 서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분야의 연구들은 신여성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도와 주고 있다. 그러나 여성사쪽에서도 근대 경험이 다른 지역들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차이를 어떻게 역사화 할 것인가 가 과제로 남아 있는 지금,5) 차이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들이 더욱 보 2) 한편으론 이러한 ‘신여성’이 강력한 여성운동의 경향을 보이지 않고, 여성 ‘문 명화’를 목적으로 했다는 점이 현실적으로 당시 잡지들이 엄격한 검열을 피해 가며 존속할 수 있었던 정치적 기반으로서 역할했음을 지적한 논문도 있다(김 수진, 신여성담론 생산의 식민지적 구조와 ‘신여성’ , 경제와 사회 2006년 봄호).
3) 김미영은 이러한 논리를 ‘동아일보’의 기사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1920 년대 계몽적 남성 지식인의 여성 담론 연구 , 국학연구 4, 2004).
4) 김정구, 1930년대 상하이 영화의 근대성 연구 -여성의 재현 양상을 중심으로 (2004년 영화진흥위원회 우수논문공모선정논문집, 영화진흥위원회, 2004).
5) 정현백, 여성사 다시 쓰기 -여성사의 새로운 재구성을 위하여 (당대, 2007),
강, 보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기존 연구의 보충, 보완의 의미로서 기존 연구성과에 드러난 ‘신여성’ 연구에 대한 특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이러한 신여성 연구가 중국의 실제 사료 속에 등장한 논의들과 어떠한 점에서 차이가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 히 서구와 다른 식민지, 반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과의 차이, 그 리고 남성주도의 논의로 인한 담론의 왜곡, 한계성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신여성 담론’의 한 무대를 형성하 고 있었던 영화를 자료로 삼아, 영화 속 여성의 서사나 이미지가 아닌 관중이나 영화평론가들의 입장에서 당시 ‘신여성’에 대한 인식, 담론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떠한 방향을 지향하였는가를 밝혀보고자 한다.6)
Ⅱ. 다양한 신여성담론의 제기와 논란
중국에서 ‘근대’라는 것은 외래적인 것의 수용과 번역의 형태로서 한 편으론 추구해야 할 지향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배제, 극복 의 대상이었다. ‘신여성’ 논란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신여성’에 대한 논란은 중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 현상의 하나였다라고 할 수 있 다. 신여성을 둘러싼 당시의 사회적 논란은 여성 교육제도, 여성 작가 와 지식인, 사랑과 성에 대한 가치관, 현모양처와 핵가족 이념 및 아동 에 대한 새로운 관념, 위생주의 같은 생활양식의 변동, 외모와 육체에 대한 감수성과 패션의 등장, 도시화와 새로운 여성 직업군처럼 근대적 인 사회문화적 변동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었다. 때문에 각 국가, 지역
pp.17-20.
6) 본 연구는 영화 서사를 분석 대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줄거리 는 본문 분량상 생략하고자 한다. 더구나 본문에서 다루는 영화평론가와 독자 들의 영화평은 영화 속 여성에 대한 의견, 논의들만을 다루기 때문에 영화이해 나 의미면에서 줄거리가 갖는 역할은 크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에 따른 사회적 현상, 문제들과 함께 ‘신여성’ 논의의 성격도 달리하고 있었다. 예컨대, 사회적 신여성 현상의 기원지인 영국의 ‘New Womam’이 가정 이데올로기에 대해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일탈을 하 는 일군의 집단을 일컬었다면 일본의 ‘신여자’(운동)은 메이지 여성 교 육이념인 ‘賢母良妻’주의에 대한 적극적 도전이자 참정권 등의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려는 여성운동을 일컬었다. 그러나, 신여성 개념은 식민 지 혹은 반식민지 사회에서는 훨씬 다양하고 중층적인 양상을 띠었 다.7)
사실, 신여성담론을 얘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논의가운데 하나가
‘모던 걸’과 ‘賢母良妻’론이다. 새롭게 등장한 여성을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 그들의 실태는 어떠한가? 어떠한 신여성상이 요구되는가? 라 는 문제는 당시에도 큰 논쟁거리 중의 하나였다. 이 때 그들을 호명하 고 논의지향점으로서 ‘모던 걸’과 ‘賢母良妻’가 가장 많이 거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 뿐만 아니라 일본, 한국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나 타났으며, ‘모던 걸’의 등장, 해석은 삼국 모두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즉 ‘신기한 풍속의 재현자로서, 혹은 수입제품을 시작으로 새로운 소 비재나 기호를 받아들이는 계층으로 파악’8)하거나 ‘잡지 가십거리의 대표적 단골 메뉴로 남성의 장식품이며 생산능력이 없는 소비자’로서 무용의 존재로 평가되었다.9) 이러한 기존 연구들에 대한 다양한 7) 관련 연구경향에 대해서는 김수진, 신여성, 근대의 과잉 -식민지 조선의 신여
성담론과 젠더정치, 1920-1934 (소명출판, 2009), pp.22-23 참조. 김수진은 신 여성 개념이 식민지 혹은 반식민지 사회에서는 훨씬 다양하고 중층적인 양상 을 띤 이유에 대해, 이는 신여성 현상의 사회적 차이가 서구와 비서구, 제국주 의와 식민지라는 위계적 관계가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역사적 유형의 매트릭스 위에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8) 일본의 오츠노미즈여자대학 젠더연구센터를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의 식민 지적 근대와 모던 걸’이라는 국제 공동연구 프로젝트 그룹은 이러한 기존의 연구경향에서 조금은 벗어나고자 한다. 아직 프로젝트가 완성된 단계는 아니지 만, ‘실체로서의 여성’, 국제적인 물류나 이미지의 유통, 여성의 삶에 관한 새로 운 현상이나 담론 편성, 즉 ‘표상으로서의 여성’으로 ‘모던 걸’을 정의하고 있 다 (신하영,
모던걸 -일본제국과 여성의 국민화
, 논형, 2009, pp.19-20) 9) 지현숙은 당시 ‘모던’의 이미지가 지나치게 협소하고 부정적으로 평가되었고,다른 시각들이 점차 연구성과10)로 나오고는 있지만, 여하튼 표 면적으론 ‘모던 걸’이 가십거리에 주로 등장하는, 서구의 유행이나 쫒 는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의 신여성을 비유했다면, ‘賢母良妻’는 신여성 담론의 일각에서 지향해야 할 여성상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근대 이후 새롭게 지향점으로 ‘賢母良妻’론이 등장한 이유 는 무엇인가? 먼저 한국이나 중국에게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 는 일본의 ‘賢母良妻’주의에 대해 살펴보자. 전미경은 일본의 경우, 현 모양처의 침투는 30년대 여자교육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가족국가 이 데올로기의 전략적 측면에서, 賢母良妻 교육의 필요성이 청일전쟁 이 후 고양된 국가의식 안에서 발아한 것으로 보았다. 즉 청일전쟁 후 일 본의 여자교육론은 아내와 어머니로서 가정 안에서 부여되는 여성의 역할에 높은 도덕성과 함께 국가적 시점에서의 가치가 덧붙여지게 되 고, 이는 곧 가사와 육아를 통해 국가에 공헌하는 구체적 국민으로 파 악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즉 여성이란 국민이 되기 위해서, 국민형성 과정에서 현모양처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경우도, 여성이 ‘남녀 동등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던 바탕은 ‘여성=어머니’란 등식이 있었기
중국에서 불린 ‘모던 여자’는 남경정부 주도세력이 강요한 신현모양처상에 비 주체적으로 저항하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남경국민정부 (1928-1937)의 국민통합과 여성 -신현모양처교육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3. pp.28-33).
10) 최근 신하영은 일본의 ‘모던 걸’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다. 그녀는 모던 걸 담론에는 ‘모던 걸이란 누구인가?’ ‘지식인은 그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만 하는가’라는 공통적인 쟁점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의 ‘예 술대중화논쟁’과 거의 같은 인식틀 속에 위치지어진다는 것이다. 즉 모던 걸이 나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들은 1920년대 일본에서 개인, 가정, 사회, 국가를 (재)해석하려는 지적 상황에서 생겨난 말들로서 일본이 1930년대의 군국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결국, '모던 걸' 담론이란 사회주의 운동의 ‘프롤레타리아’개념과 지배체제 측의 ‘황민’개념과 함께 각기 무정형의 대중을 해석하여 그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헤게모니적 경합과 정에서 형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또한 모던 걸의 담론 공간은 사회주의와 초 국가주의라는 강력한 정치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포괄되지 않은 매우 잡다한 (하지만 중요한) 쟁점을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신하영, 앞의 책, pp.19-20).
때문에 가능하였고, 신여성의 규범으로 제시된 현모양처 노릇을 통해 종래의 구가정을 탈피하여 신가정을 건설하고자 했다. 신여성에게 결 혼과 가정 이외 대안이 한정된 상황에서 현모양처는 신여성이 자신의
‘新’을 드러낼 수 있는 전문적 영역이었지만 동시에 현모양처는 신여성 이 반드시 짊어져야만 할 짊이었다. 즉, 고학력의 엘리트 신여성일수록 현모양처는 더욱 내면화해야 하는 규범이었으며, 신여성이 현모양처에 서 벗어나는 경우 사회의 혹독한 비난을 감내해야 했다고 지적하고 있 다.11)
중국의 경우, 한국,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차원에서 ‘新賢母 良妻’ 논의가 주로 1930년대 이후 국민당의 적극적 지지와 함께 크게 대두하였다.12) 그들은 ‘모던 걸’을 퇴폐적이고 비생산적이라고 비판하 면서 경제위기의 원흉으로 규정하고, 그 대안으로 자신들 주도의 근대 국가 건설에 필요한 여성상인 新賢母良妻像을 지지한다.13) 新賢母良妻 像은 ‘근대성 내의 전통’으로 이해될 수 있는데, 이것은 중국적 근대에 11) 전미경, 1920-30년대 현모양처에 관한 연구 -현모양처의 두 얼굴, 되어야만
하는 ‘賢母’, 되고 싶은 ‘良妻’- (
한국가정관리학회지
22-3, 2004). p.17.12) 신현모양처 논의는 1930년대 중반 장개석 남경정부의 신생활운동 제창과 관 련이 있으며, 이는 1930년대 ‘여자는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논쟁의 담론으로서 등장하였다. 당시 이 논쟁은 가정에서 ‘賢母良妻’가 되는 것은 여성의 천직이며 국가와 민족에 공헌하는 최선의 길이라고 제창되는 한편, 그것에 저항하는 반 론이 속출하여 논쟁이 가열되었다. 에가미 사치코는 이 논쟁에 대한 담론으로 서 현처양모파, 신현처양모파, 신현량파, 현처양모부정파로 분류해 기존 중국학 계의 일괄적인 현모양처론과 그 반대 담론으로 나눈 정설을 비판하며 현모양 처논의 사이의 그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에가미 사치코, 중국의 현처양 모사상과 ‘모던 걸’ -1930년대 중기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라’라는 논쟁에서 , 하야카와 노리요 외 지음, 이은주 옮김,
동아시아의 국민국가형성과 젠더 -여 성표상을 중심으로
, 소명출판사, 2007). 이는 대만학자인 許慧琦의 의견과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許慧琦,
娜拉 在中國: 新女性形象的塑造及其演變(1900s -1930s)
, 政治大學史學叢書, 台北: 政治大學歷史系, 2003).13) 이들을 新賢母良妻라고 표기한 이유는 1930년대 현모양처론자들이 전통적 여 성상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新’을 덧붙이기도 하고 현모양처상이 근 대 중국 사회에 저촉되지 않는 전통적 요소의 영향속에 형성된 근대적 여성상 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지현숙, 1930년대 中國의 ‘婦女回家’論爭과 南京 政府 ,
역사교육
88, 2003. p.56).저촉되지 않는 전통적 미덕과 근대적 가정관리와 육아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전통시대 여성의 가정관리와 육아는 가 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19세기 후반 중국에서 재구성된 현모양처에게 가정관리와 육아는 민족 혹은 국가적인 일이었고 민족과 국가의 구성 원으로서 담당해야 하는 임무로 인식되었다.14)
이러한 ‘신여성’에 대한 활발한 논의들은 존재하는 여성으로서 ‘모 던 걸’의 양상을 이해하건, 지향점의 하나로서 ‘賢母良妻’를 지적하건, 새로운 여성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당시 사회에서도 상당부분 이루어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논의는 당연히 각 여러 사회적 상황 과 맞물려 당대 여성, 신여성의 규정,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하는 논의 들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었고, 이는 영화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에 존재하는 한편으론 전통적이지만 그러나 한편으론 이전에는 존재 하지 않았던 새로운 의식과 외모를 지향하는 여성들의 다양한 존재양 태를 영화에서는 그대로 반영하였으며, 자신들의 지향성을 영화 속에 서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이러한 영화들에 대해 영화평론가와 독자들 도 다시 자신들의 의견을 신문, 잡지에 게재함으로써 그들의 신여성관 도 적극적으로 표현했으며, 더구나 급격한 사회 변화 속에서 ‘의식’있 는 영화들에 대한 영화평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申報
에 실린 蘼蕪의 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그는,
중국영화는 사회의식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중국 영화 속에는 항상 여성이 출현한다. 중국 영화 속에 출현하는 여성은 대개 다음과 같 은 몇 가지 전형적인 여성이다. 첫째, 봉건세력하의 피압박자로서의 여성 이다. 이런 여성은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노예나 부속품적 위치에 있 다. 그들은 깨어있지 않기 때문에 반항도 없다. 두 번째는 자본주의가 만 든 여성이다. 그녀들은 자신의 지위와 임무에 대해 조금도 깨어있지 않 다. 단지 좋은 환경하에서 즐기며 (봉건적) 예교 질서에도 벗어나 있다.
14) 신현모양처상과 신현모양처 교육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역사주체로서 중국 여성의 성장에 일조한 측면이 있음을 지현숙은 강조하였다 (지현숙, 앞의 논 문, pp.76-78).
생산에 종사하지 않는 기생적 존재로서 이상의 두가지 유형은 스크린 도 처에서 쉽게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회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여성 상이다. 세 번째는 소자산계급 여성으로 이러한 여성들도 몇 가지 유형으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脂粉市場’에서의 여주인공과 같이 그녀는 시 대의 변화속에서 점차 미래를 분명히 보고 진취적인 태도를 취한다. (2) 그러나 (그들 중에는 자신들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어, 결국
‘방종한 생활’로 빠지곤 한다. (3) 소자산계급 출신으로 허영에 빠져 결국 타락하는 여성들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연애지상주의자이다. 네번째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자신들의 주장을)외치는 여성’ 이다. 예를 들어 ‘女性 的呐喊’이란 영화에서 여주인공은 빈농출신으로, 생활상에서 여러 어려움 과 곤경에 처한 후 결국 세상에 대해 자신의 말을 하기 시작한다. 당연히 이런 예는 한가지 대략적인 사례에 불과하다. 위에서 이미 얘기하였듯이 영화예술은 사회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것은 사회에 대한 인식 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표현하는 것은 당연히 사회적 현실이다. 중국 여 성은 몇 천년 동안 압박을 당하여 그녀들은 모든 피압자들과 동일 운명 이다.15)
이러한 유형의 영화평은 1930년대 영화붐과 함께 급속히 출현하였 으나 이러한 영화붐은 1920년대 축적된 영화제작과 무관하지 않다. 따 라서 1930년대 영화는 20년대 영화와 더불어 그 연결선상에서 논의를 해야 함으로 다음 장에서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주요 여성영화16)의 흐름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1920,30년대 상해 주요 여성영화
1927년에서 1931년 사이 중국영화는 고전(사극)영화, 무협(귀신)영화 등이 주류였다. 여성영화는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 으며 5년간 이런 류의 총 작품수는 40여편에 달하였고 전체 영화의
15) 蘼蕪, 중국영화 속의 여성 탐구 (申報 1933.7.13).
16) 본문에서 언급하는 ‘여성영화’는 특별한 정의에 따르지 않고, 일반적인 중국 영화사에서 언급하는 여성영화범주에 포함되거나, 본 연구에서 다루는 상영 당 시 영화평에서 주로 여성문제를 언급한 작품을 지칭한다.
1/6정도를 차지하였다.17) 이 40여편의 작품 중 明星영화사가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여성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감독은 바로 鄭正秋였다.
당시 明星영화사 작품 중 鄭正秋가 감독한 것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였 다.
鄭正秋는 이미 1913년 張石川과 함께 難夫難妻 라는 혼인구습을 비 난하는 단편 무성영화를 제작하였다. 그 후 鄭正秋 영화의 주제 중 여 성문제가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鄭正秋와 張石川이 합작한 영화 중 여성을 소재로 한 영화는 玉梨魂 (1924), 上海一婦女 (1925), 最後之 良心 (1925), 早生貴子 (1925), 小情人 (1926), 掛名夫妻 (1927), 二 八佳人 (1927), 血淚碑 (1927) 등 9편 정도가 있었으며, 이러한 영화들 은 민며느리, 과부수절, 축첩, 기녀 등 여성문제를 주로 구혼인제도의 악습과 연관지어 구제도하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강조하고 있었 다.18)
사실, 그의 여성영화는 여전히 文明劇의 “가정극”테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작품 속 인물은 주로 과부, 첩, 민며느리, 장애가 있는 여 인들이 자신들의 선량한 심성과는 달리 불행한 운명을 겪는 과정을 관 객에게 보여줌으로써, 관중들의 동정을 사는 것이 주요 특징이었다. 동 시에 이를 이용하거나 계략을 꾸며 재산을 탐하는 악녀, 난봉꾼을 등 장시켜 선악의 상호 대비효과를 극대화시킬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불행 의 근원이 은근히 그들임을 암시하였다. 바로 그의 작품은 여성문제를 통해 봉건제도 악습 폭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19)
17) 聯華영화사의 작품은 제외한 수치이다. 酈蘇元, 胡菊彬, 中國無聲電影史 (中國電影出版社, 1996), p.244
18) 胡平生, 抗戰前十年間的上海娛樂社會(1927-1937): 以影劇爲中心的探索 (臺 北: 臺灣學生書局, 2002), p.217.
19) “不幸生爲女兒身”(1931년 12월 17일, 당시 잘 나가던 상해 중앙대극원에서는 程步高가 감독을 하고, 黃君甫, 王夢石이 주연한 영화)도 이런 류의 전형적인 영화였으며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흥행몰이를 한 작품이었다. 당시 영화광고를 보면, “예술적 수단을 써서, 30년 전의 사회제도, 가정의 상황을 스크린에 옮겨 놓아 ···”, “전국 여성 동포들이 나갈 길을 모색하기 위해 ···”, “본 영화 는 수 백년 이래 해결하지 못한 遺産문제를 해결한다. 부모형제들은 모두 그
1930년대 들어와 중국영화는 양적으로 엄청난 증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적인 것 보다 중요한 중국 영화가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질적 변화가 출현한 시기도 이 때였다. 여성영화도 그 흐름의 자장안에 있 었다. 각 영화사는 1932년에서 1934년 사이 모두 60여편의 여성영화를 제작하였고,20) 점차 창작의 폭이나 깊이에 있어 전혀 새로운 영화들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중국 영화의 상황은 만주사변과 상해사변 을 통해, 변화된 사회분위기 속에서 좌파계열의 영화제작이 활발해지 고, 또 이러한 영화들이 관중들에게 환영을 받는 상황이 여성영화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여성영화들이 이전 영화들과 차별성을 갖는 것은 아니었 다. 당시 가장 많은 영화를 제작한 영화사 중의 하나였던 명성영화사 의 작품 중, 失戀 (張石川 감독), 琵琶春怨 (李萍倩 감독), 道德寶 鑒 (王獻齋, 高梨痕 감독), 春水情波 (鄭正秋 극본/감독), 現代一女 性 (艾霞 극본, 李萍倩 감독), 姉妹的悲劇 (胡萍 극본, 高梨痕, 王吉 亭 감독), 殘春 (姚蘇鳳 극본, 張石川 감독), 香草美人 (馬文源, 洪 深 극본, 陳鏗然 감독) 등은 여전히 봉건제도 속 여성문제에 집착해 있었다. 예를 들어 琵琶春怨 은 봉건제도내 어린 과부의 고단함을 보 여주고 있으며, 春水情波 는 한 순진한 여공이 유학에서 돌아온 주인 집 도련님에게 농락당한 후 버림 받고, 심지어 막 낳은 아이 조차 사 회에서 무고하게 죽게되는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다. 그 밖에 천일영화 사에서 제작한 飛絮 와 飄零 의 경우도 봉건적 남존여비관념, 잔혹 한 민며느리제, 지주나 사장들의 여성들에 대한 농락 등을 묘사하며, 여주인공이 포악한 악습에 의해 죽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영 화들이 기존의 원앙호접파 여성영화에서 상투적으로 보여주었던 삼각 관계나 여성의 타락, 특히 才子佳人식의 패턴에서는 탈피해 있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1932년 제작된 三個摩登女性 (田漢 극본, 자녀를 데리고 와서 이 영화를 봐야만 한다.” 라며 광고를 하고 있다 (申報, 1931.12.17).
20) 酈蘇元, 胡菊彬, 앞의 책, p.345.
卜萬蒼 감독), 1933년 제작된 脂粉市場 (夏衍 극본/감독), 姊妹花 (鄭正秋 극본/감독), 그리고 1934년에 제작된 新女性 (孫師毅 극본, 蔡楚生 감독), 女人 (史東山 극본/감독), 桃李劫 (袁穆之 극본/감 독), 神女 (吳永剛 극본/감독) 등이 흥행이나 작품성에서 관객과 평 론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은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영화들 중에는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지는 봉건 악습에 의해 희생당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전제로 하는 작품도 있었지만, 이전과는 달리 단순히 그 원인을 ‘악인’
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책임을 묻는다는 점에서, 또한 어떠한 구체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나름 여인 자신이 독립적인 태도를 추구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진일보된 여 성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면, 흥행성과 작품성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작품들에 대한 영화 평론과 독자평을 통해 여성영화에 대한 당시 평론가, 독자들이 생각하 는 여성영화, 신여성들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Ⅳ. 여성영화에 대한 영화평과 독자평
일반적으로 중국 영화의 제1전성기로 여겨지는 1930년대 영화중에 서도 1932년에서 1935년은 최전성기의 절정에 있던 시기였다. 그 중에 서도 가장 환영받았던 영화가 사회고발성영화로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하는 여성영화라 할 수 있다. 苗埒가 “예술은 사회 상부구조 중의 하 나이며, 그 주요 특징은 현실사회를 반영한다는 점이고 동시에 현실사 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21)이나,
晨報
의 每日電影 편집자로 서 王鹿無22)가 바로 “사회환경상 1년여 동안(1933년) 여성을 주인공으21) 每日電影 (晨報 1935.2)
22) 좌익계열의 문인들은 신문의 영화컬럼난이나 전문적인 영화잡지를 통해 자신 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였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晨報 영화란
‘每日電影’이었다. 대표적 좌파영화계 인물이었던 夏衍과 阿英은 개인적 관계를
로 하는 폭로성 영화가 주류가 되었다”23)라고 말한 것처럼, 영화 전성 기는 곧 여성영화의 전성기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여성영화 붐을 이루 었다.24)
그러나 한편에선 여전히 1920년대 인기를 끌었던 신파성 멜로들도 제작되었고, 앞서 언급한 鄭正秋의 경우도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1930년대까지 그 맥을 잇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약자로서의 여성성을 부각시키는 영화들로, 예를 들어 일본 소설을 각색하여 인기몰이를 한 文明劇 貴人與犯人 를 다시 姊妹花 란 영화로 제작하였다. 이 영화 에서는 쌍둥이 두 자매의 서로 다른 운명을 보여줌으로써 시대의 희생 양이 된 여성의 처지를 통해 관객의 눈물샘을 자극하였다.25) 실제 정 통하여 ‘每日電影’ 편집자로서 王鹿無(鹿無라는 이름으로 자신도 다수 영화를 평하고 있다)를 들여보내, 좌익문인들의 영화비평을 주도하였다. 사실, 晨報 는 국민당 내에서도 우파로 불린 진립부가 운영하는 신문이었다. 그런데도 좌 파평론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산당과 국민당의 당 차원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인 관계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국민당과 공산당 의 관계를 단순한 정책적 차원에서만 다룰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이 문제에 관 해서는 拙稿, 근대 속 상해영화 :1930년대 좌익영화를 중심으로 (사총 66, 2008)를 참조.
23) 塵無, 評‘神女’ (
晨報 -每日電影
1933.12.3).24) 여성영화의 전성기는 영화적 속성과 당시 중국영화의 특징과 연관되어 있다 고 할 수 있다. 헐리웃 영화가 세계영화계에 이미 영향력을 행사했던 1930년 대, 상업적 영화의 다양한 전략가운데 스타시스템 활용에서 여배우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영화가 초기 헐리웃 영화의 제작방식을 직 접적으로 영향받았음을 고려한다면 중국영화에서 여배우의 역할 또한 무시하 지 못할 것이다. 또한 1930년대 중국영화가 상업적 기능 뿐만 아니라 계몽, 사 회고발성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 상황을 빗댄, 피해자로서의 여성 이라는 헐리웃영화와는 또 다른 여배우의 역할(성격)을 짐작할 수가 있다. 아 울러 이러한 여배우가 중심이 된 영화들에 대한 여성관객에 대한 반응은 구체 적으로 검증하기는 힘들지만, 20세기 30년대까지 100여종의 여성대상 잡지들이 등장하였고, 그 중 독자층이 두터운 잡지인 경우 영화소식이 한 중요한 섹션이 었음을 감안한다면, 영화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 그리고 영향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영화속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의 스타일이 ‘모던’의 이미 지로 상해 도시여성들에게 어필한 측면이 주로 언급되고는 있지만, 그러나 ‘사 회문제극’들이 관객동원에 성공하여 흥행한 상황을 본다면, 의식적인 측면도 영향력에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25) 寒邱는 영화 결말 부분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일가를 알아보고” 등 우연성
감독 자신도,
(이 영화가) ‘新光’ 한 영화관에서 일주일, 일주일 상영한 것이 60일을 상영, 이는 내가 상상하지도 못한 큰 수확이다. ··· 약자를 위해 (그들 의) 불평등에 대해 말하는 것, 이것이 극 작업을 한 이래 나의 일관된 주 장이다. ··· 姊妹花 의 성공은 윤리도덕영화가 관중들을 쉽게 감동시 킨다는 것을 보여준다.26)
라며 자신의 영화를 평하였다.
그렇다면, 1930년대의 변화된 사회상황 속에서 사회의식을 반영하는 영화들이 성황이었는데 이러한 영화들이 여전히 제작된 이유는 무엇인 가? 이에 대해, 대표적 평론가 중의 한명이었던 凌鶴은 진보적인 시나 리오는 상영기회를 얻기 어렵기 때문에 제작자들이 이미 문명극으로 인기를 얻은 貴人與犯人 류와 같은 영화들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27) 그러나 이전과 분명 달라진 점이 있었다. 예를 들어,
姊妹花 라는 영화 속에서 살인자의 누명을 쓴 언니 大寶가 법정 진술 을 하는 장면에서 한 대사, “누가 법을 어겼다는 말인가? 우리 가난한 사 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법을 어겼다면, 당신들(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군벌들을 지칭-역주)은 군수품을 판매하고 매년 내전을 치루는 것이 법 을 어긴 것이 아니란 말인가? 누가 흉악 살인범인가? 소위 법이라는 것 이 뭐란 말인가?”
라며 당시 군벌세력을 질책하고 있으며, 소설내용과는 달리 주인공들 이 직업을 찾아 자립을 모색하는 세 여인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기 존 상투적인 여인들의 비극이나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차별성 을 보여주었다.
흥행이나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들 중 가장 전형적인 서사구조는 작품 속에서 여인상을 비교 대조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감독은 자신 들의 신여성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바로 女人 과 三個摩
을 꼬집으며 고대소설식 영화라고 비판하였다(晨報 -每日電影 1934.2.24).
26) 鄭正秋, “姊妹花”的自我批判 (社會月報 創刊號, 1934.6.15).
27) 凌鶴, 評‘姊妹花’ (申報 1933.10.5).
登女性 , 新女性 이 대표적이었다. 塵無가 “1934년 영화 가운데 가장 환영을 받았던 영화 중의 하나는 여인 이었다”라고 인정한 女人 에 대해 凌鶴은,
영화에서 부녀문제를 토론할 수 있다는 것, 이는 곧 진보의 증명이라 할 수 있다. ··· 그러나 매번 동일한 문제의 정확한 해답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에, 유감이라고 생각한다. ··· 현재까지도 그녀들은 여러 가지 견고한 속박에 둘러싸여 있으며 ··· 자막에서 보여 주길 ‘만약 사회혁 신운동에 힘쓸 수 없다면, 무슨(여성들의) 자유, 해방이란 말인가? 모두 빈말일 뿐이다’ 이는 비교적 정확한 지적이다.28)
라며 여인 을 평하였고, 관중의견에 기고한 章子規는,
여인 은 3명의 성격이 다른 여인을 기술하며 각자 서로 다른 운명의 결과를 보여 준다. 화면의 시작은 (사회제도틀 속에) 속박된 여인을 묘사 하고 있다. 사실, 현대 여인은 여러 가지 구속을 받고 있으며, ··· 이런 구속에서 해방되려면 오직 자신이 일어나 투쟁하는 수 밖에 없다.29) 라며 이전보다 좀 더 적극적인 여성문제에 대한 접근을 보여주고 있 다. 특히 여성의 자립과 관련하여 직업을 찾는 여인들에 대한 언급도 종종 보이고 있다.30) 예를 들어, 敷禮는
여인 은 연출상 전체적인 여인을 그려내지도 못하고 단지 현 사회의 28) 凌鶴, 評 女人 -大上海 (申報, 1934.8.6).
29) 章子規, ‘女人’我評 (申報 1934.8.8, 觀衆意見 ).
30) 전인갑은 生活週刊이라는 잡지를 통해 당시 신여성의 이미지를 건강하고 매혹적인 여성, 입지전적 여성, 자립적 여성, 독신주의로 집약해서 설명하고 있 다. 그 중에서 자립적인 여성은 馬演初가 여자의 경제적 독립은 비록 쉽지 않 으나 출가 전에는 부모에게, 특히 출가 후에는 남편에게 의지하지 않고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처럼 경 제적 자립은 여성이 ‘근대적 개인’이 되기 위한 전제로서 신여성의 필요충분조 건이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집나간 노라’를 걱정하던 5.4시기보다는 신여성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인식이 다소 구체화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글에서 주목한 바는 특히 자립적 여성상과 이혼 문제를 관련성이었다. ( 상해인의 ‘모던’과 생활문화 -생활주간의 분석 , 중국근현대사연구 17, 2003, pp.92-93).
신여성의 일면만을 그리고 있다. 여인이 어떻게 자신의 생활을 해결할 것 인가? 남자에게 의존해서? 육체와 영혼을 팔아서? 여인 , 이 작품이 우리에게 이미 아주 분명하게 분석을 해 주고 있다. 작가는 3명의 서로 다른 ‘여인’을 채택하고 있다. 王意芳은 영혼을 판 류이며, 梁玉芬은 남자 에게 의존하는, 金鈴은 곧 작자가 현사회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유형 으로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해결하는 인물이다... 梁玉芬이 경제적인 이유 로 직업을 찾아 자립하고자 했으나 그녀는 곧 난관에 부딪치지 않았는 가? 그녀가 일자리로 구한 여비서직은 영혼을 판 왕의분과 어떠한 차이 가 있는가? 직업찾는 것이 어려워, 현재 일반적인 지식인 여성이 남자에 게 의지하여 생활하려는 길을 택하고 있지는 않은가? 비록 이후 버려지 는 불행을 당하더라도, 그것을 단지 운명 탓으로 돌린다. 현 사회속의 金 鈴과 같이 ‘여인’이 스스로 생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단 말인가? 결론적 으로 여인 , 이 영화는 여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 최대한 반영은 하고 있 지만, 그러나 어떻게 전체 여인의 직업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이것은 아 직 설명이 부족하다.31)
또한 여인 과 마찬가지로 三個摩登女性 과 新女性 두 작품에서 나온 세 여인들의 신여성 ‘상’도 비슷한 분류를 통해 영화평을 보여주 는데, 예를 들어
“ 新女性 의 매판장부에게 기생하는 왕부인과, 三個摩登女性 의 과부 이들은 기존 잡지 속에서 나타난 숭양적이고 배금주의적 여성상을 대표 하고 있으며, 新女性 의 여류작가와 三個摩登女性 의 상해 아가씨 虞玉 같은 연애지상주의 관념을 갖고 있는 소자산계급의 여성, 그녀들은 당시 지식인 여성을, 그리고 두 영화 모두에 등장하는 여공은 ‘실천적 주체’로 서의 여성, 자립적 여성을 보여주는 상으로서, 현재 누가 이상의 세 부류 의 여성 이외 4번째 전형적인 여성을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결국 세 유형의 ‘신’여성 중 진정한 신여성은 “지 혜롭고 용감하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자립을 강조한 신여성상을 제시하고 있다.32) 한편, “ 新女性 과 三個摩登女性 에서 소자산계급
31) 敷禮, 評‘女人’ (申報 1934.8.8, 觀衆意見 ).
32) 魯思 또한 “영화 속에서 우리에게 던져준 답은 확실히 우리로 하여금 만족하 게 한다. 그 결론은 “진정한 모던 여성은 이지적이며, 용감하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성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은 확실히 힘이 있는 것이다”( 我們 的批判 , 晨報 - 每日電影 1932.12.31).
지식인 여성이 모두 자살로 그들의 운명을 마치고 있다.⋯⋯지식인은 결국 자살로 끝을 맺는가?”라고 언급하면서 자살의 무모함을 지적하고 있지만, 영화는 당시 도시 지식인 여성들의 혼란스러움과 무기력함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었다.33)
이러한 혼란스러움과 무기력함은 ‘결혼’ 문제에 대해서도 그대로 드 러나 결혼이 여성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지적하는 관중 의견들도 있다. 黃影呆은,
의심할 바 없이 나는 여인 이 국산 영화 중 성공한 작품 중의 하나라 고 인정한다. 먼저, 극본에 대해 말하자면, ··· 3명의 서로 다른 성격의 여성이 인생 과정 중에 맞부딪힌 일들로, 이는 중국 현 사회에서 여인들 이 그 해결책을 찾기 힘든 문제이다. 그러나 해결책을 찾기 힘들다하여 영혼을 팔 수도 없으며, 또한 결혼이 반드시 그 문제를 해결해 준다라고 할 수도 없다.34)
湧森 또한,
여인 은 부녀문제를 해결하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여인의 앞길을 제 시해 주지도 않는다. ··· 다만, 아주 좋은 예시를 관중에게 보여 주고 있다. 바로 ‘여인’이 결혼을 한 후, '남편에게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 이다. 주인공 梁玉芬이 시집을 간 이후 그 생활이라는 것이 늦게 일어나 도박이나 하고, 결국 마지막에는 경제적 궁핍으로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딸은 불에 타 죽는다라고 묘사함으로써 현사회 속 이런 여인들을 각성시 키고 있다.35)
라고 지적했다. 결국, ‘자립적’ 여성으로서 직업문제를 거론하거나, 결 혼이 여성문제의 해결이 아님을 지적하는 영화평들이 드물지 않게 게 재되고 있었다.
33) 물론 지식인 여성 뿐만 아니라 당시 지식인들의 허약성을 지적한 영화평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神女 주인공 여성보다는 주위 지식인의 허약성을 塵 無는 지적하고 있다. 그는 “신녀는 소자산계급의 진보성을 표방하지만, 한편으 론 지식인의 정의감과 동시에 그들의 ‘허약성’도 보여주고 있다”(晨報 - 每 日電影 1932.12).
34) 黃影呆, ‘女人’我評 (申報 1934.8.14, 觀衆意見 ).
35) 湧森, ‘女人’我評 (申報 1934.8.14, 觀衆意見 ).
한편 당시 교육의 수단으로서 여성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사람들이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교육문제를 주제로 다룬 작품들을 다수 제작하였다. 대표적인 작품 중의 하나가 바로 婦道 였다. “이것 은 가정교육을 주제로 삼은 영화로, 분명 가정교육의 아동에 대한 영 향은 아주 중요하며, 부녀자들은 각 가정의 기둥으로서, 부녀와 가정교 육은 가장 긴밀한 직접적 책임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세계 각 국은 ‘賢母良妻’를 제창하고 있는 것이다”36)라고 지적했듯이 당시 교육 문제는 ‘賢母良妻’론과도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화 속 의 내용에 대해 영화평론가들과 관객은 국민당과는 다른, 가정안에서 의 어머니역할보다는 사회교육을 중시하는 의견을 영화평에 게재하고 있다. 凌鶴은,
이는 교육영화를 표방한 작품이다. 우리에게 교육영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좋은 아동교육영화는 교육가의 추천이 없더라도 관중들 스스로 공정한 평가를 내린다. 그렇다면 ‘婦道’의 작가는 아동교육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였는가? 그는 청년들 품행의 좋고 나쁨은 순전히 가정교육과 관련이 있으며, ··· 너무 오냐오냐하면 어린아이들의 나쁜 습관만 기르게 된다고 한다. ···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정확한 것인가?
설령 이 영화가 교육가들의 추천을 받은 교육영화라 할지라도 작가는 교 육에 대한 무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큰 잘못은 그가 가정교육 을 교육의 전부로 치부한 점이다. 가정교육 이외 또한 더 큰 사회교육문 제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예를들어 극 중에서 묘사된 것처럼 부모의 자녀에 대한 지나 친 사랑은 분명 자녀에게 해가 되며, 이런 부모는 바로 사회의 죄인인 것 이다. 그러나 가정은 결코 빠져 나올 수 없는 감옥이 아니다. 자녀를 영 원히 가정안에 묶어 놓을 수 없으며, 그들은 사회와 접촉하지 않을 수 없 다. 또한 현재 이런 나쁜 사회환경이 청년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가정교육과 사회교육 두가지 비중상 후자가 전자보 다 영향이 더 크다라고 할 수 있다.37)
36) 阿非, 觀‘婦道’後鑑 (申報 1934.11.13, 觀衆意見 ).
37) 凌鶴, 評‘婦道’ -新光 (申報 1934.11.12). 그는 영화 神女 도 “작가는 자 막에서 말하길, 비록 그녀의 직업은 비천하지만, ‘그녀의 인격을 부정할 수 없 으며’, ‘이는 전체 사회문제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기녀의 말에서
‘설마 내 아들이 공부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인가?’라며, 작가는 현실을 직시한
라며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관중들도,
婦道 는 평범한 작품이나, 교육영화가 많지 않은 중국에서 평균 이상 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작가는 단지 가정교육만 중시하 고 더 큰 사회교육은 홀시하고 있다. 단지 사탕이 나쁘다하여 (사탕을) 먹이지 않는 것만이 전형적인 좋은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가?38)
라며 사회교육을 강조하고 있다. 자녀교육에 있어 ‘賢母’를 강조했던
‘新賢母良妻’와 달리 여성의 ‘어머니’ 역할 못지않게 중요한 사회교육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Ⅴ. 맺음말
근대 중국에서 신여성은 그녀들이 살던 시대나 이후 그녀들에 대한 연구에서나 여성문제의 주요 쟁점 중의 하나였다. 또한 이러한 신여성 의 현상은 중국 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그리고 세계적인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그 논쟁의 중점이나 논의 전개양상은 동일하면서도 다르게 나타났다. 바로 대도시에 나타난 구식 여성과는 분명 다른 외모를 가 진, 혹은 의식을 가진 신여성이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사회에 의해 어 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들이 직접 생활하고 있는 사회 의 변화에 따라서, 한편으론 그들의 의지와 표현, 여론의 향방 등에 따 라서 신여성은 달리 보여지고 해석되어졌다. 특히 이들에 대한 시선은 다양하였으며, 어떻게든 이들을 규정짓고 자신들 사회에 맞게 포섭하 고자, 관련 논의가 활발하게 대도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라며 기녀 자식이라는 이유로 자식을 제대로 교육시킬 수 없음이 사회문제와 관련짓고 있다 ( 評‘神女’ -金城 , 申報 1934.12.9). 관 중의견으로 雅非도 이러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 關於‘神女’的演出 , 申報 1934.12.10, 觀衆意見 ).
38) 章子規, ‘婦道’我評 (申報 1934.11.14, 觀衆意見 ).
신여성의 모습이 처음에는 ‘모던 걸’로 가십기사를 장식하다가 지향 점으로서 ‘賢母良妻’가 부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다른 서구 개념들의
‘體’, ‘用’식 중국적 수용맥락과 일맥 상통해 보인다. 그러나 신문화운동 과 오사운동을 거치면서 새롭게 부상한 ‘여성’, 그리고 이후 ‘신여성’
담론에는 ‘新賢母良妻’에서 요구하는 가정 안 여성이 아닌, 여성자신의 자립, 독립을 강조하는 의식들이 적지 않게 제기되고 있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결혼, 자녀교육, 자립 등 당시 여성과 관련된 문제와 ‘사회 (책임)’를 관련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상당부분 오사신문화운동의 수혜를 받은 사람들이 사회문제의식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의 적극 적인 참여가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 일본과 다른 유사한 상황-식민지이거나 반식민지-의 사회적 경험을 갖고 있 는 한국과 달리 중국은 보다 근본적인 여성문제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또한 영화계 종사자들이 여배우를 제외하고는 여성들의 참여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영화평론가나 독자평을 투고한 관객들 대다수가 남 자였음을 감안하다면, 당시 상당한 한계점을 내포한 신여성 논의가 비 단 여성 자신 이야기를 여성 스스로 제기하고 풀지 못한 채, 남성들에 의한 논의 혹은 남성적 패권주의라는 맥락에서 기인된 바라는, 그 측 면만을 얘기하긴 어려울 것 같다. 오히려 ‘개인’의 소재 자체도 당시 중국적 상황에서 제자리를 찾을 수 없는 처지에서 신여성, 여성문제도 사회적 맥락, 상황에 영향받는 바가 컸고, 담론의 중심에 있던 인물들 도 사회와 여성문제를 연결지어 풀어나가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 향성 또한 지나치게 사회적 상황에 신여성담론을 매몰시킴으로써, ‘新 賢母良妻’ 논의와 마찬가지로 여성권익증진이나 여성해방과 같은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한 또 다른 걸림돌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中文提要)
1930年代上海“新女性談論”的企劃
-以
申报
,
晨报
的影评以及读者评为中心-近代中國, 新女性在她們生活的時代以及之後對她們的研究上是女性問題 主要爭議中的其一. 並且, 這種新女性現象不僅僅是中國的, 還是韓國
、
日 本以及世界性的現象. 雖然如此, 論爭的重點及展開樣態存在統一的一面的 同時又各有千秋, 即雖然是出現在大都市裏與舊式女性有著明顯不同的外貌、
亦 或不同意識的新女性, 但根據她們如何被自身生存的社會所接受、
以及她們 生活的社會的變化, 一方面根據她們的意志和表達、
輿論的方向等, 新女性 被賦予不同的視角以及注釋. 尤其是對她們的視線各種各樣, 論議總把她們 規定與包納在符合自身社會的範圍內, 並以大都市爲中心活躍開展起來.新女性的形象最初以“摩登女郎”來裝飾漫談欄, 後來以“賢母良妻”作爲落 腳點. 從某種角度看, 這與西歐概念中“體”
、
“用”的中國式受用脈絡是一脈相 通的. 但是與經曆了新文化運動和五四運動後新賦予的“女性”, 和以後“新 女性”談論中“新賢母良妻”要求的家庭女性不同的是, 強調獨立的意識被更多 提起. 這終究歸因於與結婚、
子女教育、
自立等當時與女性相關聯的問題及"社會(責任). 這與相當一部分從五四新文化運動中受益的人士參與社會問題意 識
、
並且他們的積極參與依然有效有關. 從這點上與西歐、
日本及其它具備類 似狀況-殖民地或半殖民地-社會經驗的韓國不同, 中國更爲從根本上接近女性 問題, 由此可見, 當時相當內含局限性的新女性論議不僅女性自身提出卻始終 停留在無法解決的狀態, 只從男性的論議或起因於所謂的男性霸權主義的脈絡 談起也比較困難. 反倒是“個人”的所在本身處於當時中國的狀況中, 在無法找 到屬於自己的位置的處境下, 新女性、
女性問題也從社會的脈絡狀況中受到很 大的影響, 處於談論中心的人物們主張將女性問題與社會聯系在一起解決. 但 是這樣的方向性及過於牽強地將新女性談論與社會聯系在一起, 可以說又導致了未能向更積極的方向-諸如“新賢母良妻”論議之類的女性權益增進以及女性 解放邁進.
주제어: 신여성, 현모양처, 모던 걸, 여성영화, 1930년대, 상해 關鍵詞: 新女性, 賢母良妻, 摩登女性, 女性電影, 1930年代, 上海
Keywords: new woman, good wife and wise mother, modern girl, woman movie, 1930s, shanghai
(원고접수: 2011년 1월 12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1년 2월 11일, 수정 원고 접수: 2월 22일, 게재 확정: 2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