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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系辨誣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38-44)

종계변무는 明會典 및 청대에 출간된 官撰書와 私撰書에 잘못 기록된 태조 李成 桂의 世系와 被誣사건의 개정을 奏請했던 사건이다.44) 조선은 1394년에 海嶽山川에 고 39)명종실록권28, 17년 3월 계축①.

40) 허봉,조천기(하), 갑술년 9월 4일조.

41) 허봉,조천기(하), 갑술년 9월 8일조.

42) 허봉,조천기(상), 갑술년 6월 24일조.

43) 純彥曰, 乙卯南征之變, 有一官員之子憩於川邊, 有一京軍斬作倭首而獻之元帥, 與此無異也(조헌,조천일기, 갑술년 7월 16일조).

44) 기존의 변무에 관한 연구는 조선 전시기의 변무에 대한 연구(이성규, 위의 논문; 黃元九, 淸代

하는 明나라 사신 黃永奇의 축문에서 처음으로 종계가 誤記된 사실을 알고, 바로 사신 의 귀국 편에 辨明奏文을 보냈다.45) 1403년에 사신 趙溫은 皇明祖訓에도 동일한 오 류가 있다고 보고하자,46) 태종은 사은사 林彬과 閔無恤을 파견하여 종계변무를 奏請하 여, 명나라의 시정약속을 받았다.47)

그러나 1518년에 주청사 李繼孟은 正德4年에 중수된 明會典에 조선의 종계는 개 정되지 않은 사실을 보고 하였다.48) 중종은 바로 주청사 南袞과 李耔를 파견하여 변 무하자, 예부는 題本을 보내 종계개정의 허락을 통보하였다.49) 정덕연간에 중수된 명 회전에 조선의 종계를 그대로 기록한 사실은 조선을 분개하게 하였다. 서울대 도서관 에 소장된 正德四年本 명회전중 위의 기사가 수록된 부분이 잘려나간 사실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50)

1529년에 聖節使 柳溥는 明會典의 중수소식을 듣고 예부에 정문을 올려 주청하였 다. 그러자 예부는 이미 史館에 보내어 시행하게 하였다고 하였다.51) 그럼에도 불구하 고 조선에서는 빈번하게 종계변무를 주청하였으며,52) 1537년에 龔用卿이 조선에 출사 한 이후에는 더욱 빈번하게 주청하였다.53) 그러나 명나라 관원들은 祖訓이라 고칠 수 없다고 하거나, 혹은 고칠 수 있지만, 누차 주문을 올려야 될 것이라고 하였다.54)

明宗이 즉위한 후에는 조정대신들은 “이미 여러 번 허락한다는 詔旨를 받았고, 황제 도 분명히 勅諭를 내려주었으며, 우리조정에서도 사은사를 보냈는데, 또 주청한다면 사은한 뜻에 어긋나고, 황제의 칙서를 믿지 않는 것으로 되기에 합당하지 않다”55)七種書所載 朝鮮記事의 辯正 ,東方學志30, 1982); 특정사안의 변무에 대한 연구(한명기, 17·8 세기 韓中關係와 仁祖反正-조선후기의 ‘仁祖反正 辨誣’문제- ,한국사학보13, 2002; 박성주, 조선전기 朝·明관계에서의 宗系문제 ,慶州史學22, 2003); 특정시기의 변무에 대한 연구(하정 식,태평천국과 조선왕조, 지식산업사, 2008, pp.286-311); 특정사행의 변무에 대한 연구(권인 용, 明中期 조선의 宗系辨誣와 對明外交-권벌의朝天錄을 중심으로- ,명청사연구24, 2005)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45)增補文獻備考권174, 交聘考 4, 一右.

46) 이성규, 위의 논문, p.505.

47)태종실록권6, 3년 11월 기축①;增補文獻備考권174, 交聘考 4, 三右.

48) 朝鮮國, 即高麗. 其李仁任及子李成桂, 今名旦者, 自洪武六年至洪武二十八年, 首尾凡弒王氏四王, 姑待之(李東陽等修,(正德四年)明會典(欽定四庫全書 史部13, 文淵閣四庫全書電子版)권96, 禮部 55, 朝貢1).

49)增補文獻備考권174, 交聘考 4, 十一右.

50) 이성규, 위의 논문, p.506.

51)중종실록권65, 24년 5월 을미①;중종실록권65, 24년 6월 갑자④;중종실록권65, 24년 6월 무진②;增補文獻備考권174, 交聘考 4, 十二左 등.

52) 1531년에 聖節使 潘碩枰을 파견하여 종계변무를 주청(중종실록권72, 26년 11월 임자①); 1532 년에 聖節使 方輪을 파견하여 종계변무를 주청(중종실록권73, 27년 5월 임자①).

53) 1538년에 성절사 許寬을 파견하여 공용경을 방문하여 종계개정을 제기(중종실록권89, 33년 11월 乙未①); 1539년에 주청사 權撥과 서장관 尹世忱을 파견하여 종계변무를 주청(중종실록 91, 34년 윤7월 임술①); 1539년 윤7월 冬至使 任權에게 종계변무를 주청하게 함(명종실록권91, 34년 윤7월 己亥①); 1539년에 千秋使 尹思翼이 종계변무를 주청(중종실록권92, 34년 12월 임 술①).

54)중종실록권92, 34년 12월 계사①.

55)명종실록권11, 6년 6월 임오①.

하여 주청사를 파견하지 않았다. 그런데 1552년에 귀국한 동지사 韓㞳가 明會典寫 本56) 1책을 가져왔다. 이에 대신들은 경자년(1540)의 예에 따라 종묘에 고유하고,57) 중종의 존호를 올리고 백관에게 加資할 것을 주청하였다.58) 이후 사신이 갈 때마다  명회전의 반포를 알아보았지만, 명나라 관원들은 황제가 열람을 끝내지 않았기에 볼 수 없다고 하였다.59) 이 시기에 조선은 빈번하게 종계변무를 주청하였는데,60) 그것은 조정대신들이 재차 주청하여도 명나라의 견책을 받을 염려는 없다고 주장하였고,61) 영 의정 심연원은 심지어 명종이 즉위하고 바로 주청했어야 옳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 다.62) 홍순언의 삼부자중 이 시기에 종계변무에 참여한 인물은 홍겸이다. 홍순언도 출 사하였지만 종계변무에 참여하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한세능이 조선에 왔을 때, 선조는 宗系辨誣를 위해 奏請使를 파견하려고 한다고 하 자 한세능은 지금 주청하면 반드시 허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63) 따라 서 萬曆年間에 빈번하게 사신을 파견하였는데, 홍순언의 삼부자중 홍순언과 홍수언이 참여하였다.

1573년에 奏請使 李後白, 부사 尹根壽, 書狀官 尹卓然을 파견64)(홍순언) 1573년에 宗系惡名 奏請使 李陽元, 부사 尹根壽, 서장관 李海壽 일행을 파견65) 1574년에 성절사 박희립, 서장관 허봉을 파견하여 종계개정을 요구66)(홍순언) 1574년에 동지사 安自裕를 파견하여, 종계변무를 주청67)

1575년에 사은사 洪聖民을 파견하여 종계개정을 요구68)

1577년에 사은사 尹斗壽와 金誠一을 파견하여 宗系개정을 요구69)(홍수언) 1577년에 주청사 黃琳을 파견하여 변무한 사건을 회전에 기록해 줄 것을 요구70) 1580년에 성절사 李增을 파견하여 祖名의 오자 二字를 고쳐줄 것을 요청.71) 1581년에 辨誣奏請使 金繼輝, 서장관 高敬命을 파견72)

1584년에 宗系奏請使 黃廷彧, 書狀官 韓應寅, 質正官 宋象賢을 파견73)(홍순언) 56) 이는 가정년간에 완성된, 출간되지 않은명회전인 듯하다.

57)명종실록권13, 7년 2월庚申②.

58)명종실록권13, 7년 2월壬戌②.

59)명종실록권17, 9년 8월 己卯①.

60) 1555년에 謝恩使 洪曇이 종계변무를 주청(명종실록권18, 10년 6월 己卯④); 1556년에 冬至使 沈通源이 종계변무를 주청(명종실록권22, 12년 1월 乙卯②); 1557년에 종계개정 주청사 趙士秀 를 파견(명종실록권22, 12년 4월 癸卯②); 1563년에 주청사 金澍와 서장관 李陽元, 성절사 李友 閔을 파견(명종실록권29, 18년 5월 己卯①).

61)명종실록권18, 10년 3월 壬寅②.

62)명종실록권18, 10년 3월 乙巳①.

63)선조실록권6, 5년 11월丙戌①.

64)선조실록권7, 6년 2월 己卯①.

65)선조실록권6, 5年 12月 戊寅②.

66)선조실록권8, 선조7년 5월 甲申③.

67)선조실록권8, 7년 윤12월乙酉①.

68)선조수정실록권9, 8년 12월 乙丑②.

69)선조수정실록권11, 10년 4월 戊午②.

70)선조수정실록권11, 10년 9월 甲寅③.

71)선조수정실록권14, 13년 11월 丁卯③.

72)선조수정실록권15, 14년 5월 癸亥⑦.

73)선조실록권18, 17년 5월 戊寅①.

1584년은 종계변무의 소원이 성취된 중요한 해이다. 그것은 奏請使 黃廷彧이 만력 황제의 칙서와 개정된 명회전朝鮮國條 의 全文(필사본)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선조 는 慕華館에 나가 사신일행을 마중하고 宗廟에 고하였다.74) 1588년에 謝恩使 兪泓 일 행은 중수된 명회전朝鮮國條 1질을 받아오고,75) 1589년에 聖節使 尹根壽 일행은 중수된 明會典全帙과 勅書를 받아왔다.76) 이렇게 근 200년간의 소원이 이룩되자 선 조는 1590년 8월에 光國功臣의 錄卷을 반사하였다.77) 이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역관의 신분으로 2등 광국공신으로 녹훈되어 당릉군으로 책봉된 홍순언이다. 이후 홍순언은 羽林衛將으로 승진하였는데, 遞差시키라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다. 그 원인은 寒微한 서얼출신이었다. 그러나 선조는 홍순언은 공신이고, 우림위장은 서얼이라도 합당하지 않을 것이 없다고 무마시켰다.78)

중수된 明會典에는 종계변무의 전 과정을 기록하고, 이성계의 종계를 분명하게 개정하여 기록하였다.79) 주목되는 점은 “萬曆三年, 使臣復申前請, 詔付史館編輯, 今錄 於後”라는 기록인데, 만력3년(1575)의 사신은 사은사 홍성민을 가리킨다. 明나라는 수 많은 사행에서 왜 만력3년의 사은사행 만을 기록하였을까. 종계변무가 확정된 제일 중 요한 사행으로 간주한 것은 아닐까. 그러면, 조선에서 만력12년(1584)의 주청사(황정 욱)행으로 종계변무가 확정되었다고 간주하는 것과 상반되는데, 이러한 인식의 차이가 발생한 원인은 무엇일까.

아마도 양국의 입장 차이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조선은 正德年間에 明會典을 중수할 때의 시행착오로 인해,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주청 사 황정욱은 필사본을 가져왔지만, 바로 3-4년 뒤에 명회전의 발간이 현실화되었으 므로 이들의 공로는 크게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명나라는 만력4년(1576 년)에 명회전의 중수를 지시하였기에 바로 전해에 주청한 사은사(홍성민)행을 기록 하였을 것이다.

홍성민의 사행을 기록하고, 史官은 성민이 조정에 돌아와 칙서를 내리려 한 일을 말 하지 않은 것은 기쁜 소식을 보고하여 상을 받는 것을 꺼려서라고 하였다.80) 사실 종 계변무를 진행하는 근 200년간, 명나라에서 허락을 받아온 사신들은 적지 않다. 그러 나 正德年間의 前車之鑒으로 명회전의 중수가 이루어지기전까지는 그 누구도 낙관 할 수 없었다. 또한 허락을 받아와 상을 받았던 사신이 개정된 사실이 확인되지 않아 문제가 된 적도 있었다.81) 홍성민의 태도는 이러한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에 74)선조실록권18, 17년 11월 계유②.

75)선조실록권21, 20년 10월 을축①;선조실록권22, 21년 3월 신해①.

76)선조실록권23, 22년 11월 병인①.

77)선조수정실록권24, 23년(1590) 8월 경오①.

78)선조실록권25, 선조24년 2월 정축①; 동년 4월 정미①; 동년 4월 무신② 등을 참조.

79) 祖訓, 朝鮮國即高麗. 其李仁任及子李成桂, 今名旦者, 自洪武六年, 至洪武二十八年, 首尾凡弒王氏 四王. 姑待之. … 先是永樂元年, 其國王具奏, 世系不係李仁任之後, 以辯明祖訓所載弒逆事, 詔許改 正 … 萬曆三年, 使臣復申前請, 詔付史館編輯, 今錄於後. 李成桂系出本國全州 …(申時行等修, 會典卷105, 禮部63, 朝貢1, 東南夷(上), 朝鮮國條, 중화서국, 1989, pp.571-572). (밑줄은 필자) 80)선조수정실록권9, 8년 12월 을축②.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38-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