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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음말 : ‘영고탑회귀설’의 이해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87-90)

이상에서 17세기 청과 내륙아시아의 여러 정치 세력의 관계가 실록에 어떻게 기 록되어 있는가를 살펴보았다. 16세기 말 요동에서 누르하치가 흥기하기 전까지 사실 몽골은 한동안 거의 조선의 시야에 들어오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누르하치 세력이 몽골 제부에까지 미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몽골은 동아시아 정세 변화의 중요 한 변수로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누루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명과 81)숙종실록18권, 숙종13년(1687, 강희26) 3월 3일(신사).

82) 구범진은 ‘네르친스크 조약’과 ‘캬흐타 조약’에는 ‘漢人과 漢文 배제’의 원칙이 관철되었다고 주 장하였다. 두 조약의 평등성은 華夷秩序의 관념과 명백하게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漢人들에게 이를 감추기 위해 청조는 주도면밀한 ‘은폐’의 전략을 구사했고, 그 방법이 바로 ‘漢 人과 漢文 배제’의 원칙이었다는 논리이다.(구범진, 淸代 對러시아 外交의 성격과 그 변화-締約 大臣과 交換 條約文의 言語를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61, 2008) 하지만실록에 기록된 위 자료는 직접 ‘네르친스크 조약’에 대한 언급은 아니었지만, 청과 러시아가 이와 같이 대등한 입 장에서 교섭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선에까지 알려진 것을 의미한다. ‘漢人과 漢文 배제’의 원칙이 漢人에 대한 ‘은폐’의 전략이었다고 한다면, 청조가 이 원칙을 19세기 중엽까지 관철하였 다고 하더라도 ‘은폐’의 전략은 처음부터 실패하였다고 생각된다.

후금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몽골의 모습은 당시 명, 후금, 몽골 사이의 관계를 그대 로 드러내고 있었다. 다만 조선은 그러한 현실을 면밀하게 분석할 만큼 충분히 정보를 축적하고 있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이합집산이 변화무쌍한 몽골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위험한 존재로 인식하기에 충분하였다.

홍타이지 시기가 되면 심양관의 존재로 인하여 조선인들이 직접 몽골인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고, 또 몽골 지역을 직접 여행하거나 체험하는 기회도 있었다.

몽골에 관한 지리 정보도 전보다 풍부해졌을 뿐 아니라 청조가 몽골을 복속하고 공고 한 연대를 구축하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몽골은 조선과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닌 가까운 정치적 실체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런데 입관 직후부터 몽골의 이상 동향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순치제의 폐후 사 건이나 이에 가탁한 강희제 폐후 사건에 관한 소문은 사실이 다소 왜곡․과장된 측면 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청조 내부에서도 청조 황실과 몽골 귀족 세력 사이 의 관계를 두고 불안한 사회 분위기가 조정되고 있었다는 현실은 충분히 반영하고 있 었다. 특히 ‘아부나이 수금 사건’과 ‘부르니의 반란’은 청의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사실들을 확인시켜주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1670년대부터는 ‘태극달자’의 존재가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당시 몽골에서 세 력을 얻고 있었던 오이라트, 구체적으로는 준가르의 갈단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 다. 준가르의 존재는 강희제가 3차에 걸친 정벌을 감행해야 할 정도 중요했다. 이에 성공함으로써 대청제국의 확고한 초석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만큼 준가르는 청에게도 힘겨운 상대였다. 게다가 당시 내부에서는 삼번의 난이 일어났고 대만의 정씨 세력이 여전히 위협이 되고 있었다. 이러한 국내외 상황에서 청조의 사회 분위기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이러한 정세를 관찰한 조선에서 소위 ‘영고 탑 회귀설’이 절정에 달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이러한 불안한 정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대비달자’의 존재였다. 조선이 ‘대비달자’의 실체가 몽골의 별종이 아닌 러시아임을 파악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청과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을 벌이는 ‘대비달자’는 ‘영고탑 회귀설’로 대변되는 북변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중시키에 충분한 정치적 실체로 다가왔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조선이 인식한 내륙아시아 정세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영고탑 회귀 설’을 단순히 막연한 ‘胡運不百年’에 근거한 청조 멸망에 대한 기대의 표현이었다고 보 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방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게도 존립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 다. 그러므로 조선도 어느 특정 시대를 막론하고 주변의 정세를 매우 예민하게 관찰하 였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특히 이 시대 흐름은 거시적으로 보면, 몽골의 시대에서 한인의 시대를 거쳐 만주의 시대의 변화가 나타났다. 북방의 몽골은 이러한 변화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영고탑 회귀설’로 대변되는 북변에 대한 위기의식이 비록 17세기, 그 중에서도 마지막 20년간 절정에 이르렀지만, 그 본질은 사실상 조선 시대 전반에 걸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한인의 왕조인 명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 던 시대와 오랑캐로 인식한 만주의 청이 패권을 장악한 시대 사이에 인식의 차이는

존재한다. 그것은 같은 몽골의 위협이라고 하더라도 명조 시대에는 그것이 중원 왕조 를 붕괴시키리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청조 시대에는 그것에 대한 ‘기 대’와 ‘희망’이 강하게 나타났고, 나아가 오히려 그것을 ‘우려’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 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맹목적인 ‘화이의식’이 만들어낸 근거 없 는 현실 인식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시 청조가 처한 현실은 조선이 이러한 ‘우려’를 갖기에 충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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