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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라트 준가르(太極㺚子)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80-85)

코르친과 차하르의 이반 외에도 몽골의 또 다른 세력이 청조의 위협으로 등장하였 다. 1670년 조정에서는 ‘청인이 두려워하여 금과 비단을 뇌물로 주는 西凉의 몽골’49) 이라는 존재가 거론되었고, 1672년 謝恩兼冬至使로 파견되었던 昌城君 李佖 등의 聞見 事件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고되었다.

蒙古 奇握溫의 후예가 군대와 말이 웅장하여 淸人이 두렵게 느끼고서 해마다 3백 6십만 金을 실어다 주고 있으니, 명색은 속국이라고 하나, 실은 臣服하는 것이 아닌데, 근일에는 大同의 땅을 떼어 주어 放牧하기를 요구하여, 장차 실랑이가 벌어지려는 형편이므로 한창 장수를 가려 군대를 조련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대체로 이들의 형세가 조만간 아무래도 청나라의 절박한 害가 될 것인데, 우리나라의 걱정 또한 작지 않습니다. 지난 丙午年(1666, 강희5, 현종7) 사은사 허적 등이 연경에 들어갔을 때 闕庭에서 몽고 사신과 맞닥뜨렸는데, 역관으로 하여금 탐문을 하였더니, 답하기를 ‘우리 몽고는 지금 세 나라가 되었다. 하나는 項朶顔이고, 하나는 大朶顔이고, 하나는 山朶顔이다. 그 밖에 국경과 근접한 부락은 모두 청나라에 속해 있다. 우리 항타안은 곧 大元의 후예이다. 비록 청나라에 귀부하고 있으나 그래도 帝號가 있고, 대타안은 대국에 복종하여 몹시 친대를 받으며, 산타안은 군대가 강 한 것에 자신감을 가지고 복종하는 일이 없다.’ 하였고, 또 말하기를 ‘북경은 우리나라 소 유인데 잃어버린 지가 지금 이미 수백 년 째이다. 산타안은 雙環㺚子라고도 하는데 요새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제 스스로 지켜 나가고 있어, 비록 청나라의 위세로도 감히 加兵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50)

여기에 언급된 ‘朶顔’이라는 이름은 명 태조가 1389년(홍무22) 북원의 나하추 세력을 물리치고 설치한 兀良哈 三衛(朶顔, 福餘, 泰寧)에서 유래한 것이다. 각각의 몽골 이름 은 우량하, 오지에트, 옹리우트이다. 이들은 1434년 오이라트에 복속된 후 오지에트라 고 불렸으며, 후에 호쇼트 부가 되었다.51) 이렇게 보면 朶顔은 아마도 오이라트를 의 미하는 표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36년 동쪽의 요동에서 大淸이 성립되던 무렵 서쪽의 청해와 티베트 일대에서는 49)현종실록18권, 현종11년(1670) 3월 3일(경신).

50)현종개수실록26권, 현종13년(1672) 10월 27일(무진).

51) 宮脇淳子, 앞의 책, p.141.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와 칼마파 사이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 대결에서 겔룩파에게 승 리를 가져다 주고 달라이 라마 5세에게서 持敎法王의 칭호를 받은 것이 호쇼트 부장 구시 한이었다. 그는 오이라트 최초의 한이 되었고 1656년 사망할 때까지 실질적인 티 베트의 한이기도 하였다. 그의 지위는 아들인 다얀 한(r.1656~1670)에게 이어졌다.52) 그렇다면 1666년 사은사 허적이 만났던 몽골 사신은 아마도 호쇼트 한인 다얀 한의 사신이었을 것이다. 이 경우 項朶顔은 바로 호쇼트를 가리키는 것이 되고, “帝號가 있 다”고 한 것은 아마도 오이라트의 한을 칭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53)

이 외에도 1673년 삼번의 난이 발생한 직후 청-몽골 관계 악화에 대한 기대감이 높 아지는 가운데54) ‘太極㺚子’라는 새로운 몽골 세력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였 다.55) ‘태극달자’는 “오삼계의 아들이 태극달자의 사위”라고 하는 등, 오삼계와의 통혼 을 통한 연합에 대한 우려가 거론되면서 그 세력의 강성함과 청조에 대한 위협성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56) 물론 오삼계의 아들과 ‘태극달자’의 통혼에 관한 내용은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삼번의 난 이후 오삼계와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5세의 연계에 대한 강희제의 의심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 같다. 당시 강희제는 오삼계와 경계를 접하고 있는 달라이 라마 5세의 동향에 매우 신경을 쓰고 있었고, 그가 기꺼이 청을 지원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티베트의 동향에 대한 의심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티베트의 배후에는 달라이 라마를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는 오이라트가 있다는 것을 강희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실록에 기록된 태극달자와 오삼계의 통혼관계에 관한 정보는 구체적인 내용으로 보면 사실이 아니지만, 삼번의 난 당시 청조와 티베 트, 몽골의 관계와 그에 대한 청조의 우려가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고 하겠다.

1653년 오이라트 4부의 하나인 준가르의 부장인 바투르 홍타이지가 죽자, 준가르 내 부에서는 지위 계승을 둘러싸고 형제 간에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승리하여 준가르 부장이 된 것은 바투르 홍타이지의 넷째 아들 갈단이었다. 그는 이어 자신을 도왔던 호쇼트 한인 오치르투 한을 죽이고 오이라트 전체를 지배하는 수장이 되었다.

52) 宮脇淳子, 앞의 책, p.211~217 ; 르네 그루쎄 지음, 김호동, 유원수, 정재훈 옮김,유라시아 유 목제국사, 사계절, 1998, pp.724~726.

53) 나머지 大朶顔과 山朶顔은 현재로서는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매우 약하다. 朶顔을 오이라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호쇼트 외에 오이라트 제부 중 하나일 것이라고 추정할 수밖에 없다. 사 료상의 “대타안은 대국에 복종하여 몹시 친대를 받”는다는 표현에 주의하다면, 혹시 大朶顔은 차하르를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54)현종실록22권, 현종15년(1674) 5월 16일(기묘) ;숙종실록3권, 숙종1년(1675) 5월 16일(갑 술).

55)현종개수실록28권, 현종15년(1674) 5월 20일(계미). 아마도 삼번의 난에 관한 정보를 담고있 는 告訃使의 密啓에 ‘太極㺚子’에 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한 領議政 金壽 興은 “그것은 바로 大元의 자손인데 스스로 병력이 강하다고 믿고 자못 북경을 가볍게 보는 뜻 이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56)숙종실록2권, 숙종1년(1675) 1월 17일(병자) ;숙종실록2권, 숙종1년(1675) 1월 26일(을유)

;숙종실록13권, 숙종8년(1682) 3월 17일(을축). “오삼계의 義子인 張勇이 태극달자의 사위”라 는 정보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p.156~157 참고, 張勇이 오 리타르 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이러한 소문은 그렇기를 바라는 漢人들의 기 대와 희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삼번의 난이 한창이던 1677년 말부터 갈단에게 패한 오이라트의 일부 세력이 불법적 으로 청의 서부 변경을 넘어 식량과 양식을 약탈하기 시작하였고, 몽골에서는 갈단이 오르도스에서 회맹을 요구한 것을 놓고 장차 청을 침략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라는 소 문이 퍼졌다. 1679년 오이라트의 일부 세력은 계속 청의 서변을 약탈하였고, 강희제는 두르베트 부의 달라이 바투르 타이지 등을 통해 이들을 통제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삼 번의 난의 진압에 몰두해야 했던 강희제는 갈단에게 청의 서변을 침략하는 무리들을 제거하고 그들이 약탈한 것들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였다. 1679년 가을 갈단은 강희제 에게 서북 지역은 자신의 영역이며 청해 지역만이 양측의 조상이 나누어 가진 곳인데, 지금은 청이 통제하고 있으니 돌려받기를 원한다는 서신을 전달하였다.57) 이처럼 1670 년대의 ‘태극달자’는 바로 오이라트에서 갈단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청조의 서변이 소 란해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당시는 마침 삼번의 난이 한창이던 때이므 로 그 위기는 더욱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1682년에는 ‘태극달자’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정보가 들어온다.

지금 몽고의 太極㺚子가 가장 강성하여 제압하기 어려운데, 청나라에 臣服한다고는 하 나 실은 청인이 도리어 섬깁니다. 㺚子가 拜陵하겠다고 말하거나 會獵하겠다고 말하면, 청 인이 두려워서 金帛을 많이 주고 그만두도록 꾄다 합니다.58)

太極㺚子의 병력이 매우 강성하여, 매번 황제와 함께 수렵할 것을 청하는데도 청나라에 서는 두려워하여 해마다 金 3백 50만 냥을 주어서 때우고, 청나라 장수 張勇이 陝西를 수 비하며 꾀를 내어 묶어 두고 있는 까닭에, 아직 군사를 일으킬 일은 없으나, 이것이 腹心 의 병통이 된다고 합니다.59)

이들을 ‘태극달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1670년대의 ‘태극달자’와 같 은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되고, 특히 “청나라 장수 張勇이 陝西를 수비하며 꾀 를 내어 묶어 두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오이라트 세력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60) 청조가 ‘태극달자’ 혹은 ‘서달’로 표현되는 오이라트 준가르를 각별히 경계하 고 있다는 소식은 계속 전해졌다.61) 1685년에는 “태극달자(서달)이 조공을 핑계대로 수만의 기병을 이끌고 關 밖에까지 몰려왔다”는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이 전해졌고,62) 57) 이상 준가르의 내분과 갈단의 등장에 따른 오이라트와 청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Peter C.

Perdue, China Marches West; The Qing Conquest of Central Eurasia,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2005, pp.139~140 참고.

58)숙종실록13권, 숙종8년(1682) 1월 24일(임신).

59)숙종실록13권, 숙종8년(1682) 11월 24일(정묘).

60) 송미령은 그 논지로 보아 1688년 이전의 ‘태극달자’ 혹은 ‘서달’은 동몽골을, 그 이후의 ‘태극달 자’, ‘서달’은 준가르로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p.158~163) 하지 만 1688년 이전의 ‘태극달자’, ‘서달’을 동몽골로 추정한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물론 여러 몽골 세력에 관한 정보가 혼재되어 있을 수 있지만 오삼계와의 관련을 의심한다던가, 張勇이 방어하 고 있다는 내용으로 보아 ‘태극달자’는 대부분 오이라트의 준가르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61)숙종실록14권, 숙종9년(1683) 4월 29일(신축) ;숙종실록15권, 숙종10년(1684) 12월 6일 (정유).

62)숙종실록16권, 숙종11년(1685) 4월 2일(신묘).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8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