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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44-49)

壬辰倭亂은 조명연합군이 7년간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한 國際戰爭으로서 조선시대 의 최대사건이었으며, 조선의 정치·문화·경제, 그리고 일반백성들의 생활·언어·풍속 등 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이었다. 홍순언의 일화에 의하면, 명나라 예부시랑 석성과 의 奇緣으로 명나라의 지원병을 이끌어 왔다고 하는데, 홍순언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역할을 하였을까.

㉠홍순언은 일본이 퍼트린 流言蜚語를 해명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일본은 전쟁을 발발하기 전에, 한편으로는 수차례 조선에 사신을 보내 통신사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조선은 이미 굴복하여 일본의 앞잡이가 되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유언비어의 해명에 대한 기록은 여러 문헌에 보이고 있는데,100) 선조실록에 의하면, 1591년 4월에 玄蘇 등이 재차 조선에 출사하여 ‘假道入明’을 요구하였다. 조선조정은 의논 끝에 聖節使 金應南에게 왜적이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고 禮部에 移咨하게 하 였다. 그런데 왜적은 유구에도 중국을 침범하겠다는 말과, ‘조선은 이미 굴복하여 3백 인이 항복해 왔는데 지금 배를 만들어 그들을 앞잡이로 삼을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퍼 뜨렸다. 유구에서 명나라에 보고하자 兵部가 遼東都司를 시켜 조선에 咨文을 보내 그 사실 여부를 물었다. 조선은 奏請使 韓應寅, 서장관 辛慶晉, 질정관 吳億齡 등을 파견 하여 그간의 곡절을 해명하게 하였다.101)

유언비어의 해명은 성절사 김응남 일행이 해결하였다. 이번 사행에 홍순언이 수행 하였는데, 북경에 갔을 때, 마침 琉球의 陳奏使도 머물고 있어서, 명나라는 조선의 咨 文과 유구의 보고가 대략 같음을 보고 왜적의 속임수를 알아챘다. 황제는 칙서를 내려 襃獎하고 表裏와 銀兩을 넉넉히 주었다.102) 귀국 후, 김응남과 譯官 洪純彥 등은 모두 상을 받았다.103) 이문학관으로 성절사(김응남)를 동행한 許澂은 홍순언의 역할을 아래 와 같이 서술하였다.

①일행이 북경으로 향할 때, 倭亂情報를 예부에 자문으로 올릴 무렵이었습니다. 중국국 경을 넘자 만나는 사람마다 손가락질하고 … 景色이 전과 판이하였습니다. 산해관에 도착 하니, 사람들은 “조선은 왜놈들과 함께 배반하고서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큰소리로 욕했 습니다. 洪純彥의 노련한 통역으로 사건이 해결되었지만, ②사신들은 걱정되고 두려워서 홍순언과 의논하고, 홍순언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유심에게 편지를 전하여, 본국의 사 정을 각로(허국)에게 전하게 하였습니다. … 通州에 도착하자 유심 … “근래 福建省 등지 에서 조선이 왜놈을 유인하여 중국을 침범하려고 한다는 보고가 올라와 의논이 자자한데, 각로만이 조선은 그럴 리가 없다고 비호하고 있습니다. 각로는 ‘조선節使가 오면 반드시 보고할 것이다. 만약 조선에서 보고하지 않는다면 과연 의심할 만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 고 과도관이 조선사신이 오면, 鞠問하라고 요청하려 하자, 각로는 ‘사실을 알지도 못하면서 100)선조실록권27, 25년 6월 병오⑤; 박동량,寄齋史草(下), 壬辰日錄 ; 李裕元,林下筆記

18, 文獻指掌編 ; 申炅,再造藩邦志卷一; 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16, 雜著, 雜記 등.

101)선조실록권25, 24년 10월 병진①.

102)선조실록권25, 24년 10월 병진②.

103)선조실록권25, 24년 11월 갑자①.

사신을 국문하는 것은 먼 나라를 회유하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논의가 조금 수그러졌지 만, 조선의 변란보고 여부를 기다린 다음 처리하기로 하였습니다. 때마침 편지를 받으니, 각로께서도 매우 기뻐하면서 저더러 먼저 알리라고 하기에 왔습니다”고 말을 마치자, 남이 볼까 두려워하면서 말을 달려 가버렸습니다. ③북경에 도착하자 각로는 김응남 등을 불러 아국의 사정과 왜노의 반역에 대하여 자세히 물은 후, 조정에 알리자 모든 사람의 의심이 차츰 풀렸습니다.104)

①에서 중국인들의 오해로 심한 욕을 듣게 되자 사신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중요 한 시각에 홍순언이 자신의 경험과 臨機應變 능력을 통하여 사건을 무마하였음을 살 펴볼 수 있다. ②에서는 홍순언이 유심을 통하여 명나라 예부상서 허국과 연락을 취하 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유심은 홍순언의 편지를 받고 통주까지 미리 와서 이들을 만나 조선에 대한 명조정의 태도를 알려주었다. 여기에서 홍순언과 유심(나아 가 허국)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③에서는 조선사신이 북경에 도착하자 예부상서 허국은 바로 이들을 불러 조선의 사정과 일본의 반역에 관한 자초지종을 묻고 조정에 알려 유언비어를 해명할 수 있었음을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홍순언은 유심을 통해 허국을 움직여 유언비어를 해명하였다.

이후 조선의 패전소식이 전해져 명 조정에서 의논이 흉흉할 때에도 許國만이 “조선 은 禮義의 나라이니 결코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105) 申炅은 禮部 尙書 허국이 유언비어를 해명하여 조선을 보존하게 하였다고 기록하였다.106) 유언비어 가 해명되고, 황제가 聖旨를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遼鎭의 의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 다. 宋國臣을 파견하여 조선국왕의 眞僞를 알아보게 하고서야 비로소 믿게 되었다. 宋 國臣은 황홍헌을 수행하여 조선에 왔었던 인물인데, 이번 조선 행은 스스로 자청하였 다고 한다.107)

이렇게 조선에 왔었던 명나라 인사들의 노력으로 일본이 퍼트린 유언비어는 해명되 었다. 이중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당연히 허국이다.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 適 期에 유심을 통해 허국과 연락을 취한 홍순언의 역할은 어쩌면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 출사하였던 명나라 인사들은 조선에 대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고, 조선 문사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중 교량역할을 하는 홍순언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 물론 홍순언을 대신하여 이러한 역할을 하는 누군가가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홍순언과 같이 훌륭하게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 다. 게다가 조선에서 사신을 파견할 때, 명나라 사정에 밝은 자를 선발하는 것은 아니 었다.108) 때문에 홍순언과 같이 유능하고, 중국에 인맥이 넓은 역관이 극히 중요한 역 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 원병을 요청하는데 공을 세웠다. 1592년 8월에 북경에서 돌아온 謝恩使 申 104) 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16, 雜著, 雜記. ()는 필자.

105)선조실록권27, 25년 6월 병오⑤.

106) 申炅,再造藩邦志卷一.

107)선조수정실록권26, 25년 6월 기축;선조실록권27, 25년 6월 병오⑤.

108)중종실록권65, 24년 6월 갑자④.

點이 국왕에게 명조정의 상황을 보고하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석성이 언급되고 있다.

그는 병부상서 석성이 三使가 아닌 역관 홍순언을 단독으로 불러 조선에서 원병을 요 청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힘을 써서 조선에 지원군을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하였다.109) 이 기록으로 비록 석성과 홍순언의 특수한 인연은 설명할 수 없지만, 적어 도 이들이 서로 알고 있는 사이임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병부상서 석성은 제일 적 극적으로 조선에 지원병을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110)

홍순언과 친분이 있는 한세능도 조선의 청병에 일조하였다. 1591년에 홍순언이 성 절사 김응남 일행을 수행하여 북경에 갔을 때에도 禮部侍郞 韓世能과 만남이 있었으 며,111) 한세능은 시종일관으로 조선의 원병요청에 일조하였다고 한다. 謝恩使 申點은 書狀官 鄭期遠, 唐陵君 洪純彥과 의논하여 免宴銀 45냥, 남은 여비와 잡물로 弓角 1308편과 焰硝 2백 근을 사왔다고 하면서 예부좌랑 한세능과 제독원외 강경이 시종일 관으로 조선의 청병을 도왔다고 하였다.112) 특히, 선조가 대신을 인견하고 明軍의 출 정상황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응인은 “洪純彥이 오늘 돌아올 것인데, 반드시 師期를 알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하였다.113) 한응인은 홍순언이 수행한 성절사(김응남)행 뒤 에 파견된 주청사이다. 나중에 파견된 사신도 이미 귀국하였는데, 홍순언은 아직도 귀 국도중에 있다고 한다. 여기에서 홍순언이 북경에 남아서 청병의 마무리 작업을 하였 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임진왜란 중에 홍순언은 어전역관으로서 明軍과 조선군신의 의사를 소통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명군이 조선에 도착한 이후, 바로 進兵하지 않아, 조선조정에서 는 진병하라는 뜻으로 제독(李如松)에게 呈文을 올렸다. 그러자 제독은 경략(송응창)이 남쪽사람으로 군사의 일은 조금도 모른다고 하면서 예로부터 문신이 강화를 주장하고 무신이 싸움을 주장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洪純彦을 불러 자신의 입장을 대변하게 하였다. 그러자 홍순언은 조선군신의 대변인의 입장에서 조선의 입장을 천명하였 다.114) 이후 국왕이 평양에 행하여 이제독을 만나 진병을 재촉할 때에도, 제독은 洪純 彥에게 도움을 청하였다.115) 그리고 선조는 홍순언에게 많이 의지하였다. 1592년 8月 에 請兵陳奏使 정곤수는 홍순언을 대동하지 못함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그것은 명나라 사신이 오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주에 있던 선조에게 홍순언과 같은 御前역관은 그 무 엇보다 더욱 중요하였을 것이다.116)

이상과 같이, 홍순언은 임진왜란 중에 유언비어의 해명에서 시작하여, 지원군의 요 청, 및 전쟁기간에 조선군신과 명군 사이의 의사소통을 담당하였으며, 자신의 인맥을 109) 朴東亮,寄齋史草(下), 壬辰日錄 卷三, 선조 25년 8월.

110) 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16, 雜著, 雜記.

111) 柳成龍,西厓先生文集권16, 雜著, 雜記.

112)선조실록권28, 25년 7월 신사⑥.

113)선조실록권31, 25년 10월 경인③.

114)선조실록권36, 26년 3월 임술②.

115)선조실록권36, 26년 3월 기묘①.

116)선조실록권34, 26년 1월 갑술⑧.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4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