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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르하치 시기의 ‘황태극’, ‘서달자’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69-72)

16세기 말(1590년대)에 누르하치가 흥기하여 만주 일대에서 건주여진과 그 밖의 여 진 각부를 통합하고 몽골의 각부를 복속하기 시작하면서 몽골의 동향은 다시금 조선 조정의 관심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1596년(선조29) 누르하치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파견된 신충일의 견문에 이미 누르하치의 여진에 복속된 몽골의 우두머리로 추 정되는 자들의 존재가 보이고, 또 “몽고와 三衛까지도 복속하였다”는 보고가 올라가기 도 했다.8) 이미 누르하치가 위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한 상황에서 조선은 여진과 연결 되는 몽골의 실체를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은 왜란 때문에 파견된 李如梅(李成梁 의 아들)과 같은 인물이 제공한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당시 누르하치 세력과 더불 어 성장하는 몽골 세력의 실체에 대해서 기본적인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적(서북의 달자-필자주)과 北虜는 원래 서로 통하는 遺種이오? 北虜 에는 皇太吉이 있는데 이 또한 달자의 종류이오?” 하니, 부총(이여매-필자주)이 말하기를, 黃太吉은 바로 西胡입니다. 蒙古의 波羅那耶波羅가 老羅赤을 치려고 黃太吉에게 요청하여 공격하다가 불리하자 물러간 적이 있습니다. 老羅赤은 곧 金의 㺚子를 대신하고 태길은 곧 遼의 㺚子를 대신해서 적은 숫자로 많은 수의 적을 대항합니다.9)

이를 통해 조선은 몽골에는 北虜의 皇太吉(西胡) 세력과 蒙古의 波羅那耶波羅의 세 력이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들이 연합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하다가 실패한 적이 있 다는 것은 아마도 1593년 몽골의 코르친 부가 여허 등과 연합한 이른 바 ‘九部聯合軍’

이 누르하치를 공격했던 사건을 가리키는 듯하다. 누르하치는 金을, 황태길은 遼를 계 8)선조실록71권, 선조29년(1596) 1월 30일(정유) ;선조실록72권, 선조29년(1596) 2월 2일(기

해).

9)선조실록97권, 선조31년(1598) 2월 3일(무오).

승한 세력이라고 한 것은 누르하치가 여진, 황태길이 거란 계통이라고 인식하고 있었 음을 보여준다. 이어서 같은 해에 누르하치가 西㺚子에게 20만 병력을 청병하여 일시 에 寬甸․遼陽 지방을 공격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10) 1605년에는 누르하치가 여전히 여허․몽골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 전해졌다.11) 아직 구체적인 몽골의 실체나 동향, 여진 및 명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정확하였으나, 당시 누르하치가 동생 수르하치 와 대립하고 있었고, 통혼을 통해 끌어들은 몽골 세력과도 대립하는 등 대내외적인 위 기에 처해 있었던 상황은 저간의 정보를 수집한 평안도 관찰사 이시발을 통해 조정에 보고되었다.12) 이러한 정보는 역사적인 사실에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니었다.

누르하치는 차차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점차 여진 내부를 통일하고 통혼정책을 통해서 몽골과의 관계를 개선해갔다. 1616년 후금 건국으로 상징되는 누르하치 세력의 확대는 조선에서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지만, 西㺚의 동향은 여전히 유동적으로 인식 되었다. 사르후 전투 이후 누르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황태길의 㺚子(서 달)”가 廣寧의 明軍과 연합하여 遼陽으로 진격해 들어갔다는 소식이 들어왔는가 하 면,13) 바로 며칠 후에는 사실이 아닌 것 같다는 회의론이 제기되었다.14) 이듬해인 1622년이 되어 이 사건의 진상이 전해졌다. 명이 후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요동 을 빼앗겼고, 명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서달과 연합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15) 그런데 몇 년 후인 1624년에는 후금이 서달과 결탁하였다는 정보가 들어왔다.16) 또 얼 마 후에는 후금이 서달에게 속았고 이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17)

당시에는 명과 후금, 그리고 몽골 사이에 이와 같은 합종연횡이 빈번하게 일어났고, 몽골 내부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각 部가 후금이나 명에 가담하거나 이탈하는 등 변화무쌍한 국제관계가 전개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당시 국제정세의 전 망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몽골의 동향이었다. 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우왕좌왕하고 이합집산하는 당시 몽골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유동적인 국제관계 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이 시기에 몽골을 가리키는 ‘서달자’, ‘황태길’ 등 새로운 이름이 등장하고 있 10)선조실록107권, 선조31년(1598) 12월 13일(갑자).

11)선조실록191권, 선조38년(1605) 9월 23일(갑오).

12)광해군일기21권, 광해군1년(1609) 10월 13일(신유). 이 보고는 滿浦僉使 金應瑞의 牒呈에 의 거한 것인데, 그 정보원은 灣遮部落에서 온 穩城의 藩胡인 (嘉義大夫) 加音巨라고 이름하는 오랑 캐 등 11명의 말, 그리고 梨坡에 거주하면서 대대로 귀순한 호인 童大乃가 老城(누르하치가 처 음 定都한 퍼알라성)에 갔다 와서 아뢴 말에 근거한 것으로 당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소문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소문이 사실에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13)광해군일기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7일(무진) ;광해군일기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9일(경오) ;광해군일기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일(신미).

14)광해군일기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4일(갑신).

15)광해군일기176권, 광해군14년(1622) 4월 19일(갑신) ;광해군일기177권, 광해군14년(1622) 5월 15일(경술).

16)인조실록7권, 인조2년(1624) 12월 6일(병술).

17)인조실록9권, 인조3년(1625) 6월 22일(무술) ;인조실록10권, 인조3년(1625) 12월 10일(갑 신).

음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몽골을 가리키는 이름의 하나인 ‘西㺚子’가 처음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1538년(중종33, 가정17)의 일이다.18) 시기적으로는 투메트의 알탄 한이 몽골의 실권을 장악하고 활약하기 시작하는 때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래도 ‘서달자’는 알탄 한이 주도하는 동몽골(내몽골) 세력을 지칭하는 이름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후 이 이름이 다시 실록에 등장하는 것은 앞서 검토했던 1598년(선조31)의 두 기 사이다. 이 때 주의를 끄는 것이 ‘황태길’이라는 이름이 함께 등장한다는 것이다. 明將 이여매의 인식 속에 ‘황태길’은 곧 ‘서호’와 같은 의미이다. ‘서호’를 ‘서달자’와 같은 의 미로 보아도 무방하다면, ‘서달자’가 곧 ‘황태길’이 되는 것이다. ‘황태길’은 몽골어 ‘홍 타이지’를 音譯한 것으로 추정된다. ‘홍타이지’라는 칭호는 알탄 한이 자신이 정복한 오이라트 지역에 대한 지배를 맡긴 쿠툭타이 세첸 홍타이지와 부얀 바토르 홍타이지 에게 副王의 지위를 부여하기 위해 채용한 칭호였다.19) 이렇게 보면 여기서 ‘황태길’,

‘서달자’ 등의 이름은 서쪽의 오이라트를 지배하는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1620년(광해군12)에는 ‘서달’이라는 이름이 등장하고,20) 1621년에는 “황태길의 달자 20만이 요양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서 이들을 ‘서달’이라고 호칭 하고 있다.21) 이 기록들은 모두 1619년 사르후 전투 이후 요동으로 진출하는 누르하치 의 後金을 저지하기 위한 명과 차하르 부의 릭단 한의 연합 세력의 동향에 관한 것으 로 보인다. 이처럼 1620년대부터 후금이 차하르 부를 복속하고 大淸을 선언하는 1636 년 무렵까지 실록에 등장하는 ‘서달’은 대체로 차하르 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보인다.

元朝가 막북으로 쫓겨 간 이후 몽골은 원조(칭기스 한, 특히 쿠빌라이 한)의 적통을 계승한 北元 세력(흔히 타타르라고 불리기도 한다)과 오이라트의 대립이라는 형세가 만들어졌다. 이 무렵 오이라트의 에센이 등장하여 몽골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나, 그가 죽은 후에 패권은 다시 북원 세력인 다얀 한에게 돌아갔다. 이후 몽골 대한의 지위는 18)중종실록89권, 중종33년(1538) 11월 25일(을미).

19) 宮脇淳子, 조병학 역,최후의 몽골유목제국, 백산출판사, 2000, p.166 ; 214. 이에 따르면, 알탄 한이 비록 한의 칭호를 취하였으나 어디까지나 투메트 부장으로서 ‘지농’의 아들이었으므로 자신 의 부왕에게 대한의 부왕의 의미를 가진 ‘지농’의 칭호를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홍타이지’라 는 칭호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홍타이지’라는 칭호는 칭기스 한의 직 계 자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다. 그 원칙이 깨지는 것은 오이라트의 구시 한 시기에 이르러서 의 일이다. 송미령의 경우는 皇太吉이 알탄 한의 장자인 훙타이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하였 다.(송미령, 앞의 논문, 2009, p.151) 蒙古의 波羅那耶波羅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현재로서 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차하르 부장이자 몽골의 대한은 보얀 체첸 한이었다. 또 당시 누르하치와 직접 대립했던 몽골 부족인 코르친의 부장을 가리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광해군일기(정초본) 153권, 광해군12년(1620) 6월 2일(무신).

21)광해군일기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7일(무진) ;광해군일기(정초본) 165권, 광해군13 년(1621) 5월 27일(무진) ;광해군일기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9일(경오) ;광해군일기(정초본) 165권, 광해군13년(1621) 5월 29일(경오) ;광해군일기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 일(신미) ;광해군일기(정초본) 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일(신미) ;광해군일기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4일(갑신) ;광해군일기(정초본) 166권, 광해군13년(1621) 6월 14일(갑 신) ;광해군일기176권, 광해군14년(1622) 4월 19일(갑신) ;광해군일기177권, 광해군14년 (1622) 5월 15일(경술).

대대로 칭기스 한의 적통인 차하르 部長으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몽골의 실권은 명목 상 몽골의 대한인 차하르 한이 아닌 투메트의 알탄 한이 장악하였다. 알탄한은 다얀이 오이라트에 대한 지배권를 위임한 셋째 아들인 바르스 볼로드의 아들로서 투메트의 한의 지위를 계승하였다. 이러한 몽골의 세력 지형으로 볼 때, 굳이 구별을 한다면,

‘황태길’은 오이라트 또는 그들을 지배하는 세력을, ‘서달’은 차하르 부가 주도하는 북 원 세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明將 李如梅가 ‘西胡의 黃太吉’

과 ‘蒙古의 波羅那耶波羅’를 구별하여 인식한 것도 몽골의 이러한 세력 지형을 이해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이러한 세력 지형까지는 이 해하고 있지 못하였고, 다만 후금의 요동 진출 과정에 ‘서달’이 개입하면서 요동에서 세력 관계가 복잡하게 재편되고 있으며, 그 여파가 조선의 북변 방어에 부정적인 영향 을 미치고 있는 상황은 충분히 고려되고 있었다.

1621년(광해군13) 광해군은 “西㺚이 요양을 핍박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은 허황된 말이 아닐 것이다. 서달이 다시 瀋陽을 함락한다면 이 적들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가득 메우게 될 염려도 없지 않으니 昌城과 義州 두 곳을 굳게 지키고 강가를 기찰하 는 등의 일을 별도로 의논해서 처리하도록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22) 서달의 공격으로 후금이 동쪽으로 밀려오면 조선의 북변이 위험할 수 있다는 우려는 조선 후기 朝野에 팽배해 있던 이른 바 ‘영고탑 회귀설’을 떠올리게 한다. 이처럼 ‘영고탑 회귀설’은 후금 이 등장한 직후부터 몽골의 동향과 관련하여 조선이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항상적인 외부적 위협의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23) 이와 같이 16세기 말 누르하치가 등 장하는 초기부터 몽골의 존재가 요동 정세에 미치는 영향, 즉 몽고․여진․명 삼자의 변화무쌍한 이해관계와 그것이 조선의 북변 방어에 위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 히 인지되고 있었다.

Dalam dokumen 歷史上의 中國과 韓國 (Halaman 69-72)